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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아소그룹 “504개 유골, 탄광과 무관” 책임 인정안해

등록 2010-01-26 22:05

지쿠호 지역의 강제연행 문제를 연구하는 요코가와 데루오. 왼쪽 뒤로 보이는 집이 야사카 공민관.
지쿠호 지역의 강제연행 문제를 연구하는 요코가와 데루오. 왼쪽 뒤로 보이는 집이 야사카 공민관.
[2010 특별기획 성찰과 도전] 요미우리신문 요상한 보도
1976년 다른 유골과 섞어버린 조선인 유골
30년뒤 “아소회사, 1984년께 유족에 반환”
아소 다로 전 총리가 외상으로 재직하던 시절, 일본신문에 아소계 회사가 조선인 유골 6위를 유족에게 반환했다는 기사가 느닷없이 실렸다. <요미우리신문>은 2006년 2월28일 아소 그룹의 핵심기업인 주식회사 아소의 경영본부 부본부장의 말을 빌려 요시쿠마 탄광 부지 재개발 때 발견됐던 조선인 유골 6위를 탄광 근처에 살고 있던 유족에게 돌려주었다고 크게 보도했다. 이 신문은 유골반환 시점이 84년 내지 85년이고, 이들에 대한 정보는 이즈카 시내 창고에 보관돼 있던 자료에 기재돼 있었다고 전했다. 신문에 인용된 이 간부는 6명이 아소광업의 징용자였음을 증명하는 자료는 없다고 말하고 아소회사가 조선인 유골을 방치하고 않고 적절히 처리했음을 보여주는 자료라고 주장했다. <요미우리신문> 보도가 나온 지 40일이 채 안된 시점에서 이번에는 <아사히신문>이 비슷한 취지의 내용을 1단 기사로 보도했다.

지역의 강제연행 연구자들은 <요미우리신문> 보도의 신뢰성을 크게 의심하고 있다. 기사가 나온 때는 한국정부에서 유골 반환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하던 무렵이다. 연구자들은 유골문제를 취재한다며 찾아온 <요미우리신문> 기자에게 요시쿠마 무연고 묘지에서 약 5백m 떨어진 납골당에 조선인 유골이 있었는데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얘기를 하고 사진자료까지 주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얘기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취지로 기사가 나와 해당 기자를 계속 찾았는데 연결이 되지 않았다고 했다. 이들은 그 기자가 사진을 들고 아소 쪽으로 찾아갔다가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 믿기 어려운 아소 쪽 해명 역할을 떠안은 것으로 보고 있다.


요시쿠마 탄광의 무연고 묘지에서 나온 유골들을 모아놓은 납골당
요시쿠마 탄광의 무연고 묘지에서 나온 유골들을 모아놓은 납골당
문제의 사진을 촬영한 사람은 하야시 에이다이(77)다. 70년대부터 조선인 강제연행이나 식민지 문제 등을 집요하게 취재해 수십권의 르포를 써온 인물이다. 그가 90년~91년에 낸 <전시 외국인강제연행관계사료집> 4권은 이 시대를 연구하는 전문가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자료다. 하야시는 1975년 여름 요시쿠마 탄광 터의 유골문제를 취재하다 납골당 존재를 알게 됐다. 그는 이전에 탄광에서 노무관리를 하던 사람이 납골당의 열쇠를 갖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가 내부를 보여줄 수 없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유족이 아니면 내부에 들어갈 수 없다고 거절당했다. 그러다 우연히 만난 절의 한 주지가 옛 노무관리자를 잘 안다고 해서 함께 다시 찾아갔다. 노무관리자는 납골당 자물쇠를 열어주었다. 납골당 내부에는 5~6개의 선반이 있고 골호가 들어차 있었다. 가장 오른쪽 선반의 두 번째에 조선 이름이 쓰여 있는 골호가 눈에 들어왔다. 전부 6개였다. 그날은 사진을 찍기에 노출이 충분하지 않아 하야시는 이틀 후 다시 찾아가 촬영에 성공했다.

중앙일간지나 방송사의 프리랜서로도 일하던 하야시에게 도쿄의 한 방송국에서 취재요청이 왔다. 그는 76년 봄 사전준비차 옛 노무관리자를 찾아가 티브이 촬영을 허용해달라는 요구를 했다. 노무관리자는 취재 요청을 거부하면서도 납골당 문은 열어주었다. 하야시는 조선인 유골이 보이지 않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바로 누구에게 넘겨진 것인지 물었다. 그러자 노무관리자는 4.5cm 높이의 관 비슷한 것을 가리켰다. 관의 구멍을 통해 밑바닥의 지하실로 유골을 떨어트렸다고 했다. 한번 바닥으로 밀어넣은 유골은 다시 올라오는 법은 없다. 일본법에 따르면 사후 50년이 지난 유골은 다른 유골과 합칠 수 있다. 76년이라면 일제 패망 31년이 되는 셈이니 유골을 섞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할 수 있다. 하야시는 아소 쪽이 신원을 확인하는 노력을 하지 않고 그냥 처리해버린 것으로 생각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뒤 요미우리신문을 통해 유골 반환을 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일제 때의 악랄한 혹사 행위는 거론하지 않더라도 전후 뒤처리에도 아주 냉담했던 아소 회사의 행적으로 보아 선뜻 수긍이 가지 않는 해명이다. 우리 정부가 유골문제에 관한 일본과의 협의에서 아소광업의 강제동원과 유골실태 조사를 거론한 것은 2005년 11월이다. 아소 쪽 주장의 진위 여부와 관계없이 <요미우리신문>의 보도는 이에 대한 비공식 답변으로 보인다.

김효순 대기자 hyo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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