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중심의 전기차 배터리 공급망 재편에서 ‘제련기술’이 핵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제련은 ‘열이나 화학적·전기적 방법을 통해 광석에서 금속 등의 원소를 추출하는 방법’을 말한다. 땅속에서 파낸 암석 등을 모아 불순물을 제거해 순도 높은 특정 원료를 뽑아내는 기술이다. 철광석을 녹여 철을 만들어내는 ‘제철 기술’도 넓은 의미의 제련기술이다.
미국 정부는 전기차 배터리 공급망에서 중국을 제외하기 위해 지난 8월16일 발효된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 전기차 보조금 제한 조건을 담았다. 미국 정부는 이 법안에 ‘전기차의 북미 최종 조립’, ‘배터리 부품·광물 조달 비율’을 전기차 보조금 수령의 조건으로 내걸었다. 이 가운데 광물 조항은 사실상 중국을 겨냥한 조항이다. 미국 또는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국가에서 일정 비율 이상의 배터리 광물을 조달해야 한다. 2023년 40%로 시작해 2027년까지 80%로 단계적으로 의무 비율이 올라간다.
하지만 광물 원산지 국가 비중을 따져보면 중국의 비중은 그다지 크지 않다. 4대 배터리 광물인 리튬·코발트·니켈·망간의 생산지 1∼3위를 꼽아보면, 중국은 리튬 채굴량 3위(13%)에만 이름을 올릴 뿐 나머지 광물 생산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다. 오스트레일리아(리튬·52%), 콩고(코발트·73%), 인도네시아(니켈·36%), 남아프리카공화국(망간·39%)이 최대 생산 국가다. 원산지만 보면 미국이 중국을 견제할 이유가 없다.
문제는 앞서 언급한 제련이다. 배터리 4대 광물의 제련 공정 모두 절반 이상이 중국에서 진행된다. 리튬 68%, 코발트 84%, 니켈 76%, 망간 90%다. 중국 밖에서 캐낸, 배터리 원료를 품은 암석들이 중국으로 모여들어 제련 과정을 거친 뒤 상품성을 지닌 순도 99.9%의 원료로 탄생하는 것이다. 국내 배터리제조사 구매담당자는 “만약 당장 중국 제련기업이 생산한 배터리 원료 공급이 끊긴다면 미국 완성차 업체마저도 전기차 생산을 멈출 수밖에 없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국내 업체들도 중국 수입 비중이 높다. 배터리에 가장 많이 들어가는 광물인 니켈의 중국 수입 비중은 64%이고, 전구체(니켈·코발트·망간 화합물)의 중국 수입 비중은 96%에 이른다.
중국에 제련 시설이 몰려있는 이유는 처음에는 값싼 노동력이었다. 이후 환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환경 규제에서 느슨한 중국으로 제련 공정이 더 많이 몰렸고, 시간이 흐르면서 제련기술이 축적되면서 중국 중심의 제련 공급망이 구축된 것이다.
미국 정부가 인플레 감축법의 광물 조항 원산지 조건을 채굴 장소가 아니라 광물이 제련된 지역을 기준으로 삼을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미국 정부는 올해 말 인플레 감축법 조항의 구체적인 사항을 정할 계획이다.
미국이 자국 배터리 공급망 구축에 속도를 내면서 국내 기업들이 제련 사업에 뛰어들어 중국의 역할을 대체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국내 제련기술을 활용해 국내 또는 해외에 투자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경우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자원활용연구본부장은 “오스트레일리아나 캐나다에서 광물을 캐낸 뒤 현지 또는 국내에서 제련하고, 제련을 통해 나온 원료를 국내 배터리·완성차 업체들이 사용하는 공급망을 구축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며 “인플레 감축법으로 중국 제련이 차지하는 60% 이상의 제련 공정이 (미국 공급망에서) 배제되면 우리에겐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국내에도 고려아연, 엘에스엠앤엠(LS MnM·옛 엘에스니꼬동제련), 영풍 등 제련기업은 있다. 다만 이들은 구리, 아연 등 범용 비철금속을 제련한다.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배터리 광물 제련을 하는 기업은 아직 없다. 엘지(LG)에너지솔루션·에스케이(SK)온·삼성에스디아이(SDI) 등 국내 배터리제조사들도 배터리 광물 확보를 위해 오스트레일리아, 인도네시아 등에서 광산 보유 기업과 계약을 맺거나 투자에 나서고 있지만 직접 제련 사업에 뛰어들지는 않는다. 배터리제조사 관계자는 “직접 광물 조달 계약을 맺지만 제련 사업을 진행하지는 않는다”며 “투자한 광산 인근에 제련 시설이 있는 곳도 있지만 드문 경우이고 주로 중국으로 보낸다”고 말했다.
국내에는 포스코그룹이 배터리 광물 제련 사업에 나서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광산에서 리튬광물을 국내에 들여와 2023년 하반기부터 배터리용 리튬을 생산할 계획이다. 뉴칼레도니아에서도 니켈광물을 가져와 광양에서 제련하고 있지만 아직까진 철강 생산에 필요한 니켈을 생산하는 단계다. 이달 내로 배터리용 니켈 제련 공장 착공에 돌입한다.
정경우 본부장은 포스코그룹 이외에서 국내 기업들이 제련 사업에 뛰어들어 수익을 낼 수 있을 능력이 충분하다고 본다. 상업성이 적어 개발 매력이 떨어지는 광산의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해 중국이 제외될 가능성이 높은 제련 시장을 선점하는 것이 그가 설명한 방법이다. 정 본부장은 “한국은 구리와 아연 분야의 제련기술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발전시켜 비철금속 제련 분야에서 세계 진출에 성공한 사례를 갖고 있다”며, “최근 채산성이 부족한 자원을 보유한 국가에서 자국 자원을 개발할 기술이 있냐는 문의가 많이 온다. 관련 기술을 연구에 집중하면 국내 기업의 자원 시장 진출을 돕고 자원 안보체계를 구축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다만, 아직 국내 제련기업들은 배터리 원료 제련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 없다. 고려아연 관계자는 “제련 이후 벨류 체인인 전구체, 양극재 등 사업에 진출할 계획은 있지만 아직 직접 제련 사업에 나설 계획은 없다”고 말했다.
제련 사업의 가장 큰 걸림돌은 환경 이슈다. 중국 제련 사업을 다른 나라가 빠르게 대체하기 쉽지 않은 배경이다. 낙동강 상류 지역에서 아연을 제련하는 영풍은 수년째 환경오염 문제로 비판받고 있다. 아연 생산 과정에서 나오는 카드뮴 등이 낙동강 수질을 위협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새로 제련 사업을 시작할 때 투자비용을 늘려 환경오염 문제를 말끔히 처리한다해도 사회적 수용성이 낮아 주변 주민들의 반대에 부닥칠 가능성이 크다. 국내 제련업계는 중국 제련기업들이 환경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고 있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제련업계 관계자는 “각종 환경 규제들이 까다로워 국내에서 새로 제련 사업을 시작하긴 부담스럽다. 오스트레일리아와 같이 큰 땅덩어리를 가진 나라가 아니라면 환경 이슈를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제련 분야에서 이른 시일 안에 신기술이 개발되기 어렵다는 의견도 나온다. 익명을 원한 배터리소재 전문가 ㄱ씨는 “제련기술 향상을 통해 국내 기업들이 제련 부분에 더 많이 진출해서 중국을 대체해야 한다는 방향에는 동의한다”면서도, “불순물을 걸러내고 순도를 높이는 굉장히 단순한 공정이어서 대단히 혁신적인 기술을 찾기가 힘들고, 기술을 개발해도 생산량을 늘리면 예상하지 못한 문제들이 발생해 공장이 잘 안 돌아가는 경우가 많아 쉬운 길은 아니다. 지금까지 순도가 낮은 광물에 신기술을 적용해 채산성을 높였던 사례는 한두건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제련 분야에 국내 연구개발 지원금이 배정되지 않아 기술 개발이 더디다는 지적도 있다. 자원분야 전문가 ㄴ씨는 “정부 연구개발비는 첨단 신기술에 투입돼야 한다는 인식이 강한데, 제련 분야가 전통적인 산업이라는 이유로 정부의 연구개발비를 받기 어려운 상황이다. 연구개발 역량을 집중해 국내 제련기술 효율을 높여 국외로 진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안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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