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규탄시민행동 회원들이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 아베 정권의 화이트리스트 한국 배제 규탄 긴급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설마’ 하는 마음이 조금은 있었던 게 사실이다. 일본 기업도 피해를 입을 텐데, 미국이 중재에 나섰다는데, 한·미·일 안보협력에 균열이 생길 수도 있을 텐데, 하면서 말이다. 근거 없는 기대였다. 한국 기업의 피해가 더 클 수밖에 없고, 미국이 자국의 이해와 무관한 일에 적극적으로 나설 까닭도 없다. 한국이 안보협력 관계를 주도하는 위치도 아니다.
예고됐던 일이다. 냉정해야 할 때다. 무엇보다 사실관계를 명확히 살펴야 한다. 위기를 부풀려 조장하는 일은 삼갈 일이다. 이미 수출규제를 강화한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 품목도 그렇지만, ‘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이 배제됐다고 일본의 주요 소재·부품 수입이 전면 금지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 경제가 당장 무너질 것처럼 호들갑 떨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본의 압박은 더욱 정교해지겠지만, 치밀한 위기 대응 전략으로 맞서는 수밖에 없다. 기업이 단기 수급대책을 마련하는 데 정부가 강력히 지원하는 것은 의무다. 당장의 위기에 맞서며 안정을 되찾는 것이 급선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근본 대책이다. 정부 기조는 국산화에 방점이 찍혀 있다. 국내 생산설비 확충과 국산화 기술 개발을 지원하고, 핵심 소재·부품·장비에 대대적으로 투자하겠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세액공제를 확대하고 공장 관련 인허가를 간소화한다는 것이다. 환경·노동 등 사회분야의 규제도 더욱 느슨해질 참이다. 결국 대기업을 중심으로 소재·부품 협력사의 수직계열화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대기업들 역시 ‘탈일본 국산화’를 외치고 있다.
그러나 ‘밸류 체인’(가치사슬)을 바탕으로 하는 국제 분업구조의 장점을 포기하고 경제성이 떨어지거나 개발이 사실상 불가능한 소재·부품까지 무리하게 국산화한다는 것은 경제원리에 맞지 않는다. 국산화를 강조하는 기업들도 실제로는 일본산의 대체가 가능한 경우에만 구매선 전환으로 대응하고 있다. 국산화를 크게 강조하는 것은 거센 애국주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시민사회에 일고 있는 불매운동은 자연스럽다. 치욕스러운 과거사까지 돌이켜 보지 않더라도 일본 정부의 치졸한 행태에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다. 반이성적이니 감정적이니 하는 일부 지식인의 평가는 온당치 않을뿐더러 무의미하다. 경계할 것은 이런 흐름을 이용하려는 움직임이다. 정부와 대기업이 국산화를 강조하는 목소리에 그런 조짐이 엿보여 걱정스럽다.
정부는 경제 살리기를 강조하며 대기업과 손잡아왔다. 문재인 대통령은 “재판은 재판, 경제는 경제”라며 최근 들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부쩍 자주 함께했다. 여당 핵심 인사들은 공공연히 “삼성을 키워줘야 한다”고 말해왔다. 여당 싱크탱크를 이끄는 이른바 ‘정권 핵심’ 인사가 최근 “세계시장에서 1등 제품을 많이 수출하는 기업이 슈퍼 애국자”라며 삼성을 추켜세운 광경은 속내를 명확히 보여줬다. 정부와 삼성의 ‘신밀월’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기업은 이윤 획득이 존재 이유다.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애국’이란 도무지 기업에 맞지 않는 단어다. 부쩍 바람을 타는 ‘애국 마케팅’이야 장삿속이겠지만, 애국이란 기치로 통상 문제에 대응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뿐더러, 얕은 계책일 가능성이 높다. 정부나 기업 모두 마찬가지다. ‘반일애국운동’ 차원이라며, 소재·부품 국산화를 위해 연장근로도 감수하고 재벌 총수들의 불법행위도 넘어가고 세금도 깎아줘서는 안 된다.
근본을 봐야 할 때다. 일본은 오랜 시간 일궈온 기초과학을 무기로 삼고 있다. 한국은 어떤가. 하청업체의 납품단가는 후려치고, 총수 일가 지분율이 높은 계열사에 일감을 몰아줘온 재벌 체제에서 기초과학을 탄탄히 다지는 것은 뒷전으로 밀려왔다. 한국이 절차탁마할 것은 기본기다. 기본은 원칙이다. 반칙과 술수가 통하는 사회, 재벌 총수의 불법과 범죄에 눈감는 경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기만 하면 되는 정치로는 백전백패다. 일본의 보복을 내년 총선에 유리하다 사고하고 위기를 과장해 총수의 존재감을 드높이는 나라에서, 우리는 일본과 어떻게 싸워가야 할까.
김진철 산업팀장 nowher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