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공동주택이 밀집해 있는 서울 마포구 공덕동 일대의 모습. 연합뉴스
“좋은 데 살면 세금 많이 내야 하는 건 맞는데, 전세로 살다가 청약 당첨돼 들어온 아파트잖아요. 강남에 고가주택이 내는 종부세를 내가 내는 게 맞나요. 딱 그냥 ‘넌 이런 데 살지 마’라고 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죠. 도저히 민주당을 찍을 수 없더라고요.”
서울 강동구 고덕동 고덕 주공을 재건축한 ㄹ아파트(전용 84㎡)에 지난해 입주한 ㅇ(42)씨는 지난 3월 공동주택 공시가격안이 발표되고 서울시장 보궐선거 과정에서 부상한 조세저항의 당사자다. 노무현 정부 시절 “평생 살아온 집을 팔고 떠나란 얘기냐”며 종합부동산세에 반발했던 ‘강남 토박이 70대 은퇴자’의 기시감이 강하게 느껴지는 그의 말에서는 공시가격 정책이 놓친 사각지대가 보인다. 2017년 5월 이후 분양한 ㄹ아파트를 비롯해 고덕 주공을 재건축한 대단지 아파트 5곳이 위치한 고덕제1동(62.4%), 고덕제2동(67.1%), 상일동(63.6%)은 오세훈 서울시장의 서울 평균 득표율(57.5%)과 강동구 평균 득표율(58.8%)보다 크게 높았다.
오세훈 서울시장 당선으로 공시가격 정책에 대한 수정 요구가 높은 가운데 공시가격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이명박 정부는 2008년 12월 ‘1주택 고령자 장기보유 특별공제’로 종부세 사각지대를 메웠으나, 종부세 과세기준을 인상하고 세율을 인하하는 등 종부세 자체를 무력화시켜 ‘부자 감세’라는 비판을 들었다. 조세저항이라는 암초를 만난 공시가격 제도가 ‘후퇴’가 아닌 ‘개선’이 될 수 있도록 문재인 정부가 실기한 포인트 4가지를 복기했다.
■ 중저가 주택까지 폭등한 2020년에 확정한 현실화 로드맵
올해 공동주택 공시가격안은 전년 대비 19% 급등했는데, ‘공시가격 현실화’ 때문이 아니라 ‘부동산 가격 폭등’의 영향이 훨씬 컸다. 공시가격 현실화율(공시가격의 시세 반영 비율)은 1.2%포인트 제고(69.0%→70.2%)되는 데 그쳤다.
문제는 공시가격을 시세의 90%까지 끌어올리겠다는 ‘공시가격 현실화 로드맵’이 확정된 2020년이 ‘최악의 타이밍’이었다는 것이다. 지난해는 30대의 ‘공황매수’(패닉바잉)로 6억원 안팎의 중저가주택 가격 상승세가 두드러졌다. 정부가 지난해 ‘공시가격 현실화 로드맵’을 확정하면서 국회가 ‘재산세 특례제도’를 도입해 공시가격 6억원 이하 주택에 재산세 감면 혜택을 부여했지만, 체감도가 낮은 이유가 여기 있다. 6억원 초과 주택은 2018년 12.8%에 그쳤으나 올해는 29.4%로 3배 가까이 늘었다.
박용대 참여연대 조세재정개혁센터장(변호사)은 “가격이 비교적 안정된 상태였던 정권 초기에는 공시가격 현실화에 미온적이었고, 전체 주택 가격이 폭등한 상태에서 진행하려니 문제가 생긴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덕례 주택산업연구원 주택연구실장은 “공시가격과 실거래가의 갭(격차)이라는 근본적인 문제 해결보다는 투기수요를 억제하기 위해 세금을 올리는 수단으로 공시가격이 인식된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공시가격 9억원 초과 주택도 2018년 5.54%에서 올해 15.99%로 급증했다. 2018년 이후 연간 3%포인트 수준으로 증가하던 9억원 초과 주택 비중은 올해 5%포인트로 증가 폭이 늘었다. 6억원 초과 주택 역시 연간 4%포인트 증가하던 것이 올해 9%포인트로 증가 폭이 2배를 웃돌았다. 올해 조세저항의 강도가 클 수밖에 없다.
강남 거주자나 다주택자 같은 ‘전통적’ 조세저항 집단 말고 강동구 고덕동 재건축 아파트 단지 주민들처럼 이번에 새롭게 등장한 이들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문재인 정부 시기 무주택 실수요자에게 청약 기회만 확대됐을 뿐, ‘부담 가능한 가격’의 주택 공급은 부족했다. 2017년 5월 이후 분양한 고덕 주공 재건축 아파트 단지 5곳은 2016년 11·3 대책으로 청약 시장이 무주택 실수요자 중심으로 재편된 혜택을 본 곳이다. 강동구는 당시 소유권 이전 등기 때까지 전매가 금지돼 실거주 1주택자에 특히 유리했다.
하지만 이들은 2014년 분양가상한제가 폐지된 뒤 고공행진을 하던 고분양가의 희생양이 됐다. 2017년 5월 고덕 롯데캐슬베네루체(분양가 최고 7억9100만원, 한국부동산원 당월 매매중위가격 5억2900만원) 2017년 7월 고덕센트럴아이파크(8억500만원, 5억4000만원), 2017년 10월 고덕아르테온(8억5700만원, 5억4800만원) 2018년 6월 고덕자이(8억6500만원, 6억6400만원) 등 분양가가 매매중위가격보다 30% 이상 높았고, 이미 고가주택 기준인 9억원 턱밑까지 오른 상태였다. 이들 아파트는 입주와 동시에 공시가격이 9억원을 초과했다.
보유세를 ‘세금폭탄’으로 체감하는 담세능력의 문제 이전에 주택구매능력을 넘어선 고분양가의 문제가 있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분양가상한제는 정권이 출범한 지 3년이 지난 지난해 7월에서야 부활했다.
분양가 통제를 받지 않은 고가의 신규아파트를 분양받은 1주택 실거주자 대다수가 부동산 가격 폭등 시기 종부세 납부 대상으로 편입됐을 가능성이 크다. 보유세 체계는 누진제로 공시가격 변동률보다 보유세액 변동률이 더 크기 때문에, 공시가격 변동률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박상수 한국지방세연구원 부원장이 2019년 분석한 결과를 보면, 공시가격이 6% 상승하면 재산세는 13% 상승한다. 공시가격 10억원 주택은 공시가격이 11% 상승할 때, 종부세가 124% 증가했다. 국회 예산정책처는 올해 낸 보고서(‘추계&세제 이슈’)에서 “종합부동산세 및 재산세의 과세체계가 초과누진세율임을 감안하면, 공시가격 상승으로 부동산 보유자의 과세표준 구간이 이동하는 경우도 존재하므로 실제 세수는 평균적으로 공시가격 상승보다 높은 수준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공시가격 현실화 로드맵이 9억원 이상 고가주택은 현실화율 90% 달성 시기를 앞당긴 점도 향후 더 광범위한 조세저항을 부를 수 있는 지점이다. 로드맵에 따르면 내년 현실화율 목표치가 9억원 미만은 69.4%이지만 9억~15억원은 75.1%다. 박상수 부원장은 “현실화 속도를 차별화하면서, 9억원 이상 주택은 시세 급등 효과에 정책 효과가 같이 발생해 세 부담이 많이 늘어나는 측면이 있다”며 “고가주택의 세 부담을 높이는 문제는 사실상 조세정책이고, 국회가 조세법률주의에 의해 세율로 결정해야 하는 문제이므로 이 부분을 국회가 결정하도록 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다만 박 부원장은 “공시가격 자체가 90%로 간다는 것은 정책 일관성이나 안정성 측면에서 타당하다”며 공시가격 현실화 로드맵 자체를 뒤흔드는 것을 경계했다. 공시가격 현실화와 세 부담 문제를 분리해야 한다는 것은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이용만 한성대 교수(부동산학과)는 “공시가격은 과세목적뿐만 아니라 다양한 행정가격으로 쓰이는 데 과세목적으로만 이해되면서 세금 문제를 공시가격으로 풀려는 경향이 있다”며 “공시가격이 진짜 시장가격을 보여주는 게 목적이라면 시장가격을 제대로 반영해야 하고, 공시가격 급등에 따른 세 부담 문제는 국회에서 세율을 조정하면 된다”고 말했다. 정준호 강원대 교수(부동산학과)는 “외국은 공시가격보다 세율로 세금을 결정하고 이 과정에서 의회의 역할이 크다”며 “한국의 국회는 그동안 보유세 강화를 사실상 행정부가 결정하는 공시가격에 떠넘긴 채 제 몫을 다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정세은 충남대 교수(경제학)는 “공시가격 현실화 로드맵이 보유세 강화로 받아들여지면서 투기수요가 잦아들고 부동산 시장이 안정되는 측면이 분명히 있다”며 “부동산 시장을 실거주 위주로 재편하는 과정에서 1주택 실거주자가 과도한 세 부담을 지는 문제가 없도록 해야 하지만, 이 과정에서 ‘똘똘한 한 채’ 수요를 자극하는 우를 범해서도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진명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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