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공화당이 도널드 트럼프 때문에 공황상태이다. 이대로라면 그가 대통령 후보가 될 공산이 크지만, 본선에서 패배가 불 보듯 뻔하다. 그가 후보가 안 되더라도, 그의 존재는 대통령 선거와 같이 치러지는 의원 선거에 악영향을 줄 것이다. 그에게 열광하는 보수적인 백인 중하류층과 당의 전통적인 중도 우파 기성세력 사이에서 균열이 커지는 것은 더 심각한 문제다.
트럼프 현상은 공화당의 자업자득이다. 트럼프 현상은 1960년대 중반 이후 공화당이 달려온 우경화의 산물이다. 1930년대 민주당의 뉴딜연합에 밀려 소수당으로 전락한 공화당은 이 우경화 전략으로 결국 90년대 초반부터 다수당으로 오르는 데 성공했다. 공화당의 우경화는 1964년 대통령 선거 후보였던 배리 골드워터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반전운동 등으로 진보세력이 득세하는 민주당에 불만을 가진 남부 및 중하류 백인층을 종교·결혼·총기 문제 등에서 보수적 견해를 표방하는 사회적 보수주의로 자극해 지지 계층으로 끌어들였다.
그 결과, 민주당의 아성이던 남부를 공화당의 텃밭으로 바꿨다. 이는 미국의 현대 정치사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이다. 민주당 뉴딜연합의 한 축이던 남부의 보수적 백인계층들을 공화당 지지자로 만듦으로써 의회 선거에서 항상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됐다. 이를 한국 상황에 비유하면, 마치 호남을 새누리당 지지 텃밭으로 바꾼 것과 같다. 2014년 중간선거에서는 하원 435석 중 247석, 상원 100석 중 54석을 얻어 공화당의 다수당 지배가 무너졌던 1929년 이후 최고의 성적을 올렸다.
공화당 우경화의 아버지 배리 골드워터의 애리조나 상원의원직을 계승한 존 매케인은 “골드워터는 공화당을 동부의 엘리트 조직에서 로널드 레이건 선거의 온상으로 바꿨다”고 평했다. 민주당 성향이면서도 레이건을 지지했던 ‘레이건 데모크랫’ 등 보수적인 백인 중하류 계층으로 당의 기반을 넓혔다는 것이다.
달도 차면 기우는 법이다. 공화당을 다수당으로 회복시킨 우경화 전략은 이제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고삐가 풀려버렸다. 공화당에 의해 끊임없이 불만이 자극된 보수적인 백인 중하류 계층들은 이제 당의 기성세력들마저 불신하고 공격하고 있다. 2000년대 이후부터 시작된 공화당의 보수적 풀뿌리 운동인 티파티 지지자들과 그 의원들은 이제 공화당을 좌지우지하는 세력으로 커졌다. 최근 존 베이너 전 하원의장이 물러난 것도 티파티 계열 의원들의 작품이다.
트럼프의 막말이 오히려 그의 지지를 올리는 것도 그동안 공화당의 선거 전략전술을 보면 이상한 게 아니다. 트럼프가 막말로 떠드는 반이민, 극단적 애국주의 등은 사실 그동안 공화당 후보들이 점잖게 말하던 것이다. 트럼프는 이를 더 자극적이고, 명확하고, 시원하게 말하고 있을 뿐이다. 트럼프가 언론인의 70%는 “정말로 부정직하다”고 말하는 것도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 이래 공화당 인사들이 수십년 동안 심어온 주류 언론에 대한 불신을 극대화한 것이다. 워싱턴 연방정부에 대한 그의 비난도 연방정부는 직업 정치꾼들이 기생하는 거품이 낀 낭비적인 제도라는 전통적인 보수적 견해를 대변한다. 공화당 내에서 트럼프의 대안으로 거론되는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도 국세청 폐지와 단일 세율을 주장하는 것을 보면, 트럼프의 견해가 당내 분위기에서 극우라고 할 수도 없다.
공화당은 트럼프 지지자들을 껴안지 않을 수도 없다. 이는 갈수록 공화당의 지지 계층을 보수적 백인계층으로 협소화시킬 거다. 더 큰 비극은 트럼프 현상이 미국 정치를 인종정치로 바꾼다는 거다. 미국의 비히스패닉계 백인은 2012년 현재 인구의 63%이나, 2043년이 되면 과반에 못 미치게 된다. 백인들은 공화당에, 비백인들은 민주당에 투표하는 미국 정치는 한국의 지역분할 정치보다도 더 재앙이 될 게 확실하다. 링컨의 정당이라고 자부하는 미국 공화당이 우파 포퓰리즘 정당으로 전락하는 것은 미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비극이다.
정의길 국제부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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