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일 미국 민주당 하원 선거위원회(DCCC)가 ‘구시퍼 2.0’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해커에게 해킹을 당했다는 내용을 보도하는 미국 <시엔엔> 방송 화면. <시엔엔> 누리집 갈무리
지난달 연이은 해킹 폭로 사건으로 홍역을 치렀던 미국 민주당이 또 한 번 ‘이메일 해킹 스캔들’ 내홍에 시달릴 조짐을 보이고 있다. 민주당의 강력한 지지 기반인 흑인 유권자층을 자극할 수 있는 내용이 해킹돼 유출됐기 때문이다.
<시엔엔>(CNN) 방송 등은 31일 ‘구시퍼 2.0’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해커가 미국 민주당 하원 선거위원회(DCCC·하원 선거위)에서 빼낸 자료들을 공개했다며, 흑인 권리 향상 운동을 벌이고 있는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BLM) 단체를 경계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보도했다.
지난해 11월 작성된 이 메모는 “대선 후보들이 비엘엠의 전술에 대응하는 데 애를 먹고 있다”며 “이들이 하원의원 후보들에게는 아직 관여하지 않고 있지만, 선거 담당 직원들은 준비를 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메모는 구체적으로 비엘엠을 인종주의 종식을 목표로 하는 “급진적인 운동”으로 규정한 뒤, “이 단체 지역 활동가들이 접근하면 만나기는 하되, 모임에 참석하는 활동가 수를 최대한 제한하라”는 조언을 담고 있다. 메모는 이어 “그들의 우려를 경청하되, 구체적인 정책 입장에 대해선 지지하지 말라”며 선거 담당 직원들에게 행동 지침을 제시하기도 했다. 흑인 인권 향상을 주장해온 민주당이 이 단체와 거리를 두려 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드러낸 것이다.
이 단체는 해킹 내용이 공개된 뒤 성명을 통해 “흑인들은 실패한 인종주의적 정책들 때문에 생명을 위협받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며 “하원 선거위 쪽이 우리의 요구를 적당히 무마하려는 태도에 실망했다”고 밝혔다. 논란이 커질 조짐을 보이자, 하원 선거위는 성명을 통해 “비엘엠의 리더십을 높게 평가한다”며 진화에 나섰다.
2012년 결성된 비엘엠은 60개 인권단체가 참여하고 있으며, 2014년 미주리주 퍼거슨에서 백인 경찰에 의한 흑인 청년 피격 사건이 벌어진 뒤 대규모 시위를 이끌며 영향력을 급속도로 확대해왔고, 최근 경찰의 총격에 의한 흑인 사망 사건에 대해 미국 각지에서 항의 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다.
한편, ‘구시퍼 2.0’은 지난달 12일 전·현직 민주당 하원의원 193명의 개인 이메일과 전화번호가 담긴 파일을 공개한 개인 혹은 단체로, 러시아 정보기관과 연관돼 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워싱턴/이용인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