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일 엔리케 페냐 니에토(왼쪽) 멕시코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가 멕시코시티에서 만나 회동한 뒤 공동 기자회견을 하기 위해 회견장에 들어서고 있다. 멕시코시티/신화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공화당 후보가 불과 몇 시간 만에 자신의 이민 관련 정책을 180도 바꿨다. 트럼프와 측근들이 최근 몇주간 강경한 이민정책을 완화할 수도 있음을 내비쳤지만 결국 ‘도로 트럼프’로 돌아온 것이다.
트럼프가 31일 밤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에서 발표한 이민정책은, 그동안 그의 초강경 이민 관련 발언만을 모아 백화점처럼 나열했다. 반면, 불과 몇 시간 전인 같은 날 오후 엔리케 페냐 니에토 멕시코 대통령과 회동한 뒤 열린 기자회견에서의 이민정책 관련 발언은 지극히 외교적 수사로 포장돼 있었다. ‘오후’와 ‘밤’ 사이에 극과 극을 달린 셈이다.
그동안 최대 관심사였던 1100만명의 불법이민자 강제 추방과 관련해 트럼프는 이날 밤 “불법 이민에 대한 사면은 없다. 불법으로 미국에 입국한 사람은 누구나 추방당할 것”이라며 “불법 이민자들은 고국으로 돌아가 재입국 심사를 거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트럼프와 측근들이 최근 불법이민자들에 대해 ‘공정하고 엄격하며 인도주의적인’ 고려를 할 수도 있음을 시사한 탓에 미국 언론들이 이날 트럼프의 ‘정책 전환’을 예상했지만, 원점으로 회귀한 것이다. 트럼프가 니에토 대통령과 회동한 뒤 “(불법이민은) 인도주의적 재앙이므로 해결돼야 한다”며 강제추방할 뜻이 없는 것처럼 얘기했다는 점에서 놀라운 순간 변신이다.
멕시코 불법이민을 막기 위해 미국과의 국경에 장벽을 설치하는 문제와 관련해서도 트럼프는 애리조나에선 “멕시코와의 접경지역에 대장벽을 설치하고, 첨단기술을 동원해 지상과 지하에서 불법이민자들을 솎아낼 것”이라며 “대장벽 건설 비용은 멕시코가 부담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니에토 대통령과 만난 뒤에는 국경 장벽을 설치해야 한다면서도 “누가 돈을 댈지는 논의하지 않았다”고 밝힌 바 있다. 니에토 대통령이 트위터를 통해 “비용 지불에 대해 멕시코가 지불하지 않을 것임을 명확하게 얘기했다”고 폭로하기는 했지만, 멕시코 현지에선 상당히 입조심을 한 셈이다.
연설 태도도 상반됐다. 애리조나에선 경선 때와 마찬가지로 목청을 돋우며 격정적인 제스처로 발언했다. 반면, 멕시코에선 차분한 어조로 텔레프롬프터를 읽었고, 상대국 지도자와 외교 협상에 나선 대통령 같은 태도를 보이려 애썼다.
트럼프는 이밖에도 이날 애리조나에서 지난달 초 발표한 대테러 정책 가운데 이민심사 과정에서 미국의 가치를 존중하는지 여부를 가리는 ‘사상 검증’ 실시 시리아·리비아 난민 입국 금지 생체 입출국 추적 시스템 구축 등을 거듭 발표했다.
트럼프의 애리조나 연설은 선거전략을 ‘인종차별주의’에 거부감을 갖고 있는 부동층으로 외연을 확장하기보다 집토끼에 해당하는 백인층 지지를 확고히 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음을 뜻한다. 그러나 백인 표만으론 11월 대선에서 이기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이런 이유로 어느 시점에서 다시 이민정책 전환을 시도할 가능성은 있지만, 등 돌린 히스패닉 유권자의 마음을 되돌리기는 어려워 보인다.
워싱턴/이용인 특파원
yy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