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6일(현지시각) 콜롬비아 카르타헤나에서 후안 마누엘 산토스 콜롬비아 대통령(왼쪽)과 좌파 반군 세력인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 지도자 로드리고 론도뇨(오른쪽)가 52년간의 내전을 종식시키는 평화협정에 서명한 뒤 서로 손을 맞잡고 있다. 사진 가운데는 평화협정을 중재한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이다. 카르타헤나/AFP 연합뉴스
콜롬비아 평화협상을 추진한 노력으로 올해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후안 마누엘 산토스(65) 콜롬비아 대통령은 처음에는 평화 협상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콜롬비아 유력 일간지 <엘 티엠포>를 소유한 부유한 정치 가문에서 태어난 산토스는 미국 하버드 케네디스쿨을 졸업한 뒤 출세 가도를 달려온 전형적 남미 엘리트였다. 미국 유학 전 해군 복무 경험이 있는 그는 알바로 우리베 대통령 시절인 2006년 국방부 장관에 임명돼, 반군인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 진압에 앞장섰다. 2008년 에콰도르 국경 지대에 있는 콜롬비아무장혁명군 기지에 공습을 가했던 게 대표적이다. 콜롬비아군은 이와 병행한 인질 구출작전에서 6년동안 콜롬비아무장혁명군에 잡혀 있었던 잉그리드 베탕쿠르 전 대통령 후보와 미국인 3명 등 인질 15명을 구출하는 성과도 냈다. 산토스가 국방장관으로 재직하던 시절, 콜롬비아군이 콜롬비아무장혁명군 사살 숫자를 부풀려 포상금을 타기 위해 엉뚱한 사람을 죽였다는 대형 스캔들도 터졌다. 장군들이 사임하고 60명 이상의 군인이 기소됐다. 콜롬비아군이 반군이 아닌 사람까지 죽여가면서 실적을 부풀린 데는 정부의 실적 압박이 있었다는 비판이 터져나왔다. 2009년 유엔(UN) 특별보고관이 이 사건을 조사하기도 했다.
산토스는 2009년 국방장관에서 사임한 뒤 이듬해 대선 경쟁에 뛰어들어 대통령에 당선됐다. 대통령 당선 뒤 산토스는 이전까지와는 달리 콜롬비아무장혁명군과의 평화협상 체결 노력을 시작했다. 그러나 1964년부터 공산주의 혁명 세력과 토착 농민들이 무장조직을 결성해 우파 정부들과 무력충돌을 이어온 콜롬비아가 내전에서 탈출하기는 쉽지 않았다. 콜롬비아 내전은 세계 최장기 내전으로 약 22만명의 희생자가 발생하고 4만여명이 실종됐으며, 680만명의 전쟁 난민을 낳은 참혹한 내전이다. 콜롬비아 정부와 반군은 1982년 첫 평화협상을 시작으로 이후 2002년까지 세 차례나 평화협상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결렬됐다.
산토스가 2012년 쿠바 아바나에서 콜롬비아무장혁명군과 협상을 재개한다고 선언하면서 협상은 다시 활기를 띄었다. 산토스는 여러 비판에도 불구하고 평화협상을 계속 추진해 지난 26일 콜롬비아무장혁명군 지도자 로드리고 론도뇨와 평화협정에 서명했다. 최종 합의문에는 반군의 무장해제와 사회복귀, 피납자 석방, 중범죄자가 아닌 반군의 사면·감형과 정치참여, 농지개혁, 마약밀매 근절 등의 내용이 포함됐다.
그러나 이렇게 해피엔딩으로 끝날 듯 하던 평화협상은 국민투표에서 어긋났다. 지난 2일 평화협정에 대한 국민투표가 ‘찬성 49.78%, 반대 50.21%’로 부결됐다. 콜롬비아무장혁명군에 가족을 잃거나 가족이 인질로 끌려갔던 이들은 협상 내용이 반군에 지나치게 관대하다는 이유로 반발했다. 산토스는 국민투표 부결 뒤 콜롬비아 평화회복을 위한 국민대화를 열고 있다. 국민투표 부결에도 불구하고, 산토스와 콜롬비아무장혁명군 지도자 론도뇨 모두 평화협상 완성을 위해 휴전을 이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도 7일 노벨평화상 수상을 발표하면서 “노벨상 수여를 통해 산토스 대통령에게 성공할 힘을 주려한다”고 말했다. 노벨평화상 시상식은 12월10일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리며, 상금은 800만 크로나(약 11억원)다. 올해 노벨평화상은 역대 최다인 376명(개인 228명, 단체 148곳)이 후보로 추천돼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시리아 내전에서 인명구조 활동을 펼친 시리아 민방위대 하얀헬멧, 이란 핵합의 주역, 파리 기후변화협정 공로자, 난민들을 보살핀 그리스 섬 주민 등이 유력 후보로 거론됐다.
조기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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