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선후보의 강제 성관계 시도와 저속한 여성비하 발언이 담긴 비디오 공개는 미국 대선을 딱 한달 앞둔 시점에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 가능성을 더욱 멀어지게 할 뿐 아니라 공화당을 사분오열시킬 파괴력을 갖고 있다.
당장 공화당 안에서 비판과 지지철회, 사퇴 압박 움직임이 고조되고 있다. 제일 곤혹스러운 처지에 빠진 건 트럼프의 러닝메이트인 마이크 펜스 부통령 후보다. 펜스는 8일(현지시각) 성명을 통해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어제 공개된 11년 전 비디오에서 트럼프가 묘사한 발언과 행동에 상처를 받았다”며 “그의 말을 용납할 수도, 방어할 수도 없다”고 밝혔다. 러닝메이트가 같은 당 대통령 후보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건 이전엔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다. 다만, 펜스는 “2차 텔레비전 토론 이전에 트럼프가 진심으로 그가 누구인가 보여줄 기회를 갖기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떠날 수도, 옹호할 수도 없는 고민이 묻어난다.
다른 공화당 주류들의 비판은 직설적이다. 당 권력서열 1위인 폴 라이언 하원의장은 자신의 지역구인 위스콘신주에서 트럼프와 함께 하기로 한 공동유세를 즉각 취소한 뒤 트럼프의 행동이 “구역질 난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2008년 당 대선후보였던 존 매케인 상원의원은 트럼프에 대한 지지를 공식적으로 철회했다. 당 권력서열 3위인 존 순 상원 상무위원장은 “지금 당장 트럼프는 후보 사퇴하고 (부통령 후보인) 펜스가 후보가 돼야 한다”며 ‘선수 교체’를 요구했다.
미국 정치전문 매체 <폴리티코>는 공화당 전국위원회(RNC)가 현재 ‘후보 교체’라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 관련 규정인 ‘규약 9조’까지 검토 중이라며 ‘대선승리 홍보 우편’ 발송업자에게 모든 작업을 일시 중단할 것을 지시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후보 교체는 어렵다. 공화당 규약 9조는 후보 지명자가 “사망이나 자진 사퇴, 기타”의 이유로 공석이 생길 경우, 전국위가 이를 메울 권한을 갖고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트럼프는 “사퇴는 없다”며 버틴다. 당내에선 트럼프를 강제적으로 축출할 수는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현실적으로도 당 주류가 트럼프를 축출하기는 쉽지 않다. 또 트럼프 지지자들은 거의 광적이어서 엄청난 반발에 부딪힐 수 있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이날 뉴욕 트럼프타워 앞에서 “사퇴하지 말라”며 트럼프를 ‘응원’했다. 트럼프를 교체하더라도, 펜스 부통령 후보 등이 성공한다는 보장은 거의 없고, 당 분열이 재기불가능 수준으로 빠지는 건 분명하다. 또 조기투표가 진행돼 현재까지 18개 주에서 40만명이 투표를 이미 끝냈다.
이런 이유로 당 주류는 대선과 같은 날 치러지는 상·하원, 주지사 선거 등에 미칠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트럼프 축출’ 대신 ‘거리두기 전략’을 택할 것으로 예상된다. 사실상 이번 대선은 포기하고, 상·하원 선거에 집중하면서 4년 뒤를 기약하는 장기전인 셈이다.
엄청난 대반전이 일어나지 않는 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이 더욱 힘들어진 것도 분명하다. 최근 잇단 여성 비하 발언으로 가뜩이나 트럼프 지지를 주저하고 있는 공화당 성향의 백인 여성들을 비롯해 여성 유권자들의 이탈이 가속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보수적 가치관을 지닌 공화당 지지층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의 트럼프에 대한 충성도도 더욱 낮아질 수 있다. 지지층을 확장해도 모자랄 판에, 전통적 집토끼마저 흔들린다면 트럼프가 헤어날 방법은 거의 없다.
트럼프는 대선 출마 이후 처음으로 ‘사과한다’(apologize)는 말을 사용하면서도, 언론 인터뷰에서 ”사퇴 가능성은 0”라거나 “인생에서 물러나 본 적이 없다”며 완주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9일 2차 텔레비전 토론에서 트럼프는 빌 클린턴의 여성 스캔들을 물고 늘어지면서 ‘진흙탕 물귀신 작전’으로 수세 국면 탈출을 시도할 가능성이 예상된다.
저속한 속어를 동원해 여성을 비하하는 발언이 공개돼 비판을 받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가 8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동영상에서 자신의 발언에 대해서 사과하고 있다. 페이스북
워싱턴/이용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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