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통령 선거가 열렸던 8일 텍사스주 아네타 도로에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는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선 후보의 선거 구호가 적힌 팻말이 걸려 있다. 아네타/AFP 연합뉴스
미국 정치사에서 가장 큰 이변 중 하나로 기록될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은 워싱턴 정치와 주류 언론에 환멸을 느끼는 저학력 중하층 백인 남성의 반란이었다. 일부에서는 새로운 ‘화이트 포퓰리즘’의 등장이라고 분석한다.
8일(현지시각) 실시된 전국선거합동조사단의 미국 대통령 선거 출구조사 결과를 보면, 트럼프는 고졸 이하 저학력 백인 유권자들로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 계층에서 트럼프는 힐러리 클린턴(28%) 민주당 후보의 2배 이상인 67%의 지지를 얻어냈다. 트럼프를 향한 지지는 기존 공화당 텃밭인 남서부 지역의 극보수층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북부의 쇠락한 공업지대 러스트벨트와 히스패닉이 몰린 미국 남단에서도 트럼프의 승리를 다지는 투표 행렬이 이어졌다.
트럼프는 이에 더해 2012년 대선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 몰렸던 유권자들의 표도 상당수 가져간 것으로 보인다. 실제 출구조사에서 트럼프를 지지한다고 밝힌 유권자 가운데 12%가 오바마 대통령을 지지한다고 답했으며, 후보자의 가장 중요한 자질로 ‘변화 실현’을 꼽은 유권자의 83%가 트럼프의 손을 들어줬다. 오바마 대통령이 ‘변화’를 앞세워 당선됐던 것에 비춰 보면 현재 미국 사회의 변화를 요구하는 계층이 대부분 트럼프의 편에 선 셈이다.
<뉴욕 타임스>는 특히, 트럼프가 백인 중산층에서 두터운 지지를 확보한 것이 가장 놀라운 점이라고 전했다. 이런 투표 성향은 투표율에서도 드러났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오바마 대통령의 당선을 이끌었던 중서부 지역의 흑인 투표율이 이번 선거에서는 다소 떨어진 반면, 트럼프의 승리를 추동한 소도시들과 펜실베이니아, 플로리다, 미시간의 투표율은 올랐다고 9일 전했다. 10일 현재 미국 대선의 최종 투표율은 나오지 않은 상태다.
트럼프의 승리 요인을 성별로 따져보면 트럼프는 남성 유권자들로부터 클린턴에 견줘 9%포인트 높은 지지를 얻었는데 이는 4년 전 밋 롬니 당시 공화당 후보가 오바마 대통령에게 앞섰던 7%포인트보다 큰 격차다.
선거 과정에서 성차별, 인종차별적 발언을 일삼아 소수인종 유권자로부터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트럼프는 흑인과 히스패닉, 여성 유권자들로부터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전체 유권자의 12%를 차지한 흑인 유권자의 압도적 다수(88%)는 물론 클린턴의 손을 들어줬지만, 트럼프는 히스패닉 유권자와 아시아계 유권자로부터 각각 29%의 지지를 얻었다. 더욱이 트럼프는 여성 유권자 10명 중 4명의 지지를 얻는 데도 성공했다. 여성혐오적 표현을 구사하고 각종 성추문에 휩싸이며 지지율이 추락했던 선거 기간을 돌아보면 트럼프는 확실히 선전한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의 당선을 두고 새로운 ‘화이트 포퓰리즘’이 급부상한 결과라는 분석도 나온다. <뉴욕 타임스>는 백인들의 이같은 포퓰리즘이 미국 대선뿐 아니라 지난 6월 영국의 ‘브렉시트’ 투표, 유럽에서 떠오르고 있는 극우정당과 반이민자주의에서도 엿볼 수 있다고 짚었다.
신문은 전문가들을 인용해 이 현상들은 다문화 다인종 사회로의 변화에 대한 두려움과 테러를 비롯한 물리적 위협에 대한 공포에서 기인한다고 전했다. 동시에 기존 서구 사회에서 주류로서의 입지가 흔들리며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고 있는 백인 집단의 붕괴 역시 이 새로운 형태의 포퓰리즘을 낳고 있다고 분석했다.
김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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