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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중동·아프리카

미군과 맞붙어 패주했다 재집권…더 강해진 ‘탈레반의 귀환'

등록 2021-08-15 20:58수정 2021-08-19 19:09

[정의길의 세계만사]
결성·급부상·집권·몰락 이어
부활·재집권까지 ‘영욕의 세월'
14일(현지시각) 아프가니스탄 칸다하르에서 전날 이 지역을 점령한 탈레반의 무장대원들이 모여 있다.  칸다하르/EPA 연합뉴스
14일(현지시각) 아프가니스탄 칸다하르에서 전날 이 지역을 점령한 탈레반의 무장대원들이 모여 있다. 칸다하르/EPA 연합뉴스
“하나는 신의 약속이고, 하나는 부시의 약속이다. 신의 약속은…신의 길로 여정을 시작하면 이 땅 어디에서도 보호받는다는 것이다…부시의 약속은 이 땅 위에서 숨을 곳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두 개의 약속 중 무엇이 실현될지 볼 것이다.”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이 임박한 2001년 9월26일, 탈레반 지도자 무하마드 오마르는 기자회견에서 자신들은 미국의 침공을 격퇴하고 살아남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20년이 지난 지금, 오마르의 말대로 탈레반은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더욱 강해져 귀환했다. 오마르가 ‘알라의 계시’를 받고 민병대를 결성한 1994년부터, 집권과 파국, 회생을 거쳐 미군이 떠난 자리로 다시 화려하게 진격 중인 2021년 현재까지 탈레반이 지나온 영욕의 세월을 훑었다.

‘이슬람 통치’ 꿈꾸던 민병대 50명

‘학생’ 혹은 ‘지식의 추구자’라는 뜻을 지닌 ‘탈레반’은 아프간 남부 파슈툰족 마을에서 이슬람 의례를 집전하며 먹고사는 하위 성직자였다. 칸다하르 인근 마을에서 성직자 탈레반으로 일하던 오마르는 1994년부터 “알라가 당신을 도울 테니 내전의 혼란을 끝내라”고 부탁하는 여인의 꿈을 자주 꿨다고 한다. ‘알라의 계시’로 생각한 그는 그해 봄 이슬람 학교인 마드라사 동료 50명과 함께 민병대를 결성했다. 이 조직은 탈레반으로 불렸다.

탈레반 대원 대부분은 아프간 최대 종족인 파슈툰족 청년들이었다. 특히 소련의 아프간 침공 때 파키스탄 국경 지역에 세워진 마드라사 출신으로 채워졌다. 당시 파키스탄정보부(ISI)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자금 지원을 받아, 이 마드라사에서 아프간 청년들에게 근본주의적인 이슬람 신앙을 심어줬다. 이들 마드라스 출신들은 무자헤딘 투쟁에 참가했고, 탈레반의 근간이 됐다.

오마르는 1980년대 소련의 아프간 점령 때 무자헤딘 투쟁에 참가해, 칸다하르 지역 군벌의 부사령관까지 지낸 경험이 있었다. 오마르와 동료들은 풍부한 전투 경험에다, 내란으로 도탄에 빠진 아프간에 순수한 이슬람 통치를 구현하려는 기강과 이념을 가졌다는 점에서 기존 군벌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탈레반은 소련군 철군 뒤 벌어진 내란에서 군벌들의 횡포에 시달리는 칸다하르 지역 상인들의 호소를 듣고, 이 지역의 소규모 군벌을 척결하는 과감한 공격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파키스탄이 무자헤딘에 제공하던 무기 인수해 급부상

1994년 10월 파키스탄의 서부 접경 도시 퀘타에서 직물을 가득 실은 트럭 대열이 아프간의 칸다하르를 향해 출발해 중앙아시아 투르크메니스탄으로 가는 도정에 나섰다. 베나지르 부토 당시 파키스탄 총리의 측근인 나세룰라 바바르가 이끄는 수송대였다. 아프간 내란으로 마비된 중동과 중앙아시아로 가는 교역로를 정비하려는 의도였다. 카슈미르 일대에서 인도와 분쟁 중인 파키스탄은 접경 아프간에서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고, 같은 수니파인 탈레반을 지원하는 것은 이슬람 교리에도 부합되는 일이었다.

수송대가 접경 통과 지역인 아프간의 스핀볼다크에 도착하자, 탈레반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바르는 탈레반을 이끌고 인근의 무기 집하장으로 안내했다. 파키스탄정보부가 소련의 아프간 침공 때 무자헤딘에게 제공하던 무기를 은닉했던 곳이다. 이곳에는 1만8천정의 AK-47 소총과 120대의 대포 등 수만명의 병사를 무장시킬 무기가 있었다. 탈레반은 포장도 뜯지 않은 이 무기들을 그대로 인계받고 순식간에 수십배 병력으로 증강된 막강한 무력집단으로 변했다. 탈레반은 파키스탄 수송대에 앞장서서, 주요 도로를 장악한 군벌들을 간단히 제압했다. 곧 칸다하르 도심까지 진격했고, 병력 2500명을 갖춘 나키불라 군벌은 저항도 못하고 도시를 넘겨줬다.

탈레반의 칸다하르 장악은 아프간 안팎에서 그들의 ‘부상’을 알렸다. 몇달이 지난 1995년 초 탈레반은 아프간 34개주 중 9~12개의 서·남부 주들을 장악한 세력으로 성장했다. 무장조직과 군벌의 하나가 아니라, 아프간의 미래를 결정할 세력으로 떠올랐다. 아프간 최대 민족인 파슈툰족 민족주의, 이슬람주의, 파키스탄의 지원이라는 ‘삼박자’가 어우러진 산물이었다.

탈레반은 ‘빈한하고 고지식한 촌사람들’이었으나, 상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들의 주도로 끌고 가는 ‘단호한 투사들’이기도 했다. 아프간의 현실에 천착한, 노련하고 교활하기까지 한 집단이었다. 그들은 도시와 도시들을 잇는 간선도로 지역을 먼저 점령하려 했던 과거 소련군과 군벌들과는 달랐다. 농촌과 황야의 마을과 부족들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장악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무력을 쓸 필요가 없었다. 이슬람 통치를 구현하겠다고 협력을 요청하는 것 만으로도 충분했다. 아프간 인구 중 약 25%를 차지하는 이란 혈통 타지크족이 주축인 임시정부가 통치하는 카불을 회복하겠다고 제안하며, 파슈툰족 민족주의를 자극했다.

아프간 이슬람 토후국 선포

1996년 4월 탈레반 지도자 오마르는 칸다하르의 가장 높은 건물 옥상에 올라, 이슬람 선지자 무함마드가 입었다는 전설의 외투를 걸치고 카불 진공 작전을 공표했다. 6개월쯤 뒤인 9월27일 탈레반은 카불에 입성했다. 카불을 점령했던 임시정부의 수장인 아마드 샤 마수드는 북부 판지시르 계곡 지역으로 철수해, 북부동맹이라는 군벌로 돌아갔다. 1989년 소련군 철군 이후 7년 동안 계속된 아프간 내전은 종료되고,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을 선포했다.

카불에 설치된 탈레반 종교 경찰의 청사에는 “이성은 개들에 던져줘라”라는 구호가 나붙었다. 아프간에서 사회주의 건설 시도 등 인간의 이성에 기댄 시도들이 참혹한 실패로 끝난 뒤, 신의 섭리와 의지로 회귀하려는 극단적 반동화였다. 탈레반의 집권과 함께 소녀들의 등교가 금지되고, 여성 공무원들이 해고되는 등 여성의 삶을 옥죄는 극단적인 보수 이슬람화가 진행됐다. 심지어 선지자 무함마드가 식물 뿌리를 사용해 이를 닦았다며, 현대적 치약도 금지되는 실정이었다.

미국 등 대부분 국가는 머리를 긁적이며 탈레반 정권을 바라보기만 했다. 파키스탄,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만이 탈레반 정부를 승인했다. 하지만 탈레반은 집권과 동시에 최대 후원자였던 이들 세 나라에 큰 골칫거리가 되기 시작했다.

알카에다와의 밀착과 고립

탈레반이 카불로 진공하던 1996년 봄 알카에다 수장 오사마 빈라덴이 아프간을 찾아와 망명처를 구했다. 고국 사우디에서 쫓겨나 외국을 전전하던 빈라덴은 아프간에서도 사우디 왕가를 비난하는 언행을 계속했다. 오마르는 빈라덴에게 호감을 느꼈고, 손님으로 온 그를 보호해주는 것이 자신들의 자존심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알카에다는 1998년 8월7일 케냐 나이로비와 탄자니아 다르에스살람의 미국 대사관에서 동시에 폭탄테러를 저질렀다. 이로 인해 200명 이상이 숨지고, 4천명 이상이 다쳤다. 미국은 8월20일 아프간에 은신한 빈라덴을 겨냥해 크루즈 미사일 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빈라덴은 살아남았고, 오히려 이슬람 세계에서 ‘반미영웅’으로 부상했다. 이 공격은 탈레반을 강경한 반미로 돌아서게 했고, 알카에다와 더욱 밀착하는 계기가 됐다. 사우디의 총정보국 수장 투르키 왕자가 아프간을 직접 방문해 오마르에게 빈라덴 송환을 요구했으나, 모욕적으로 거부당했다. 이후 탈레반은 완전히 고립되기 시작했다.

9·11 테러와 정권 붕괴

2001년 9월9일 아프간에 마지막 남은 군벌인 아마드 샤 마수드의 판지시르 계곡에 벨기에 기자들이 찾아왔다. 기자회견을 촬영하려던 카메라가 켜지자 폭탄이 폭발해 마수드가 사망했다. 이틀 뒤인 9월11일 미국 뉴욕과 워싱턴에서 전대미문의 여객기 테러를 감행한 알카에다가 탈레반에게 미리 준 선물이었다. 9·11 이후에도 관계를 돈독히 유지하자는 의미였다.

이틀 뒤 9·11 테러가 발생하자, 조지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은 “테러를 저지른 자들이나, 그들을 숨겨준 이들을 구분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10월7일 마침내 아프간에 대한 미군의 공습이 시작됐다. 미국은 300명의 지상군 병력 및 110명의 중앙정보국(CIA) 군사요원만을 파견하고, 현지의 반탈레반 북부동맹군을 앞세워 카불로 진격했다. 미 공군력의 정밀 지원도 가세했다. 탈레반 병력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나갔고, 11월13일 카불이 함락됐다. 탈레반 정권은 붕괴됐고, 지도부는 파키스탄 접경 지역으로 도주했다.

황야와 사막에서 게릴라로 환생

탈레반의 패주는 당연했다. 게릴라인 탈레반이 정부군으로 변하면서 막강한 화력과 공군력을 갖춘 미군에 맞서 정규전을 펼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탈레반이 아프간의 막막한 황야와 거친 산악으로 돌아가자, 다시 가공할 게릴라로 환생하기 시작했다.

9·11 테러 직후부터 이라크 침공에 눈독을 들였던 미국은 아프간 침공의 목적인 알카에다와 빈라덴 제거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카불 입성 한달 뒤인 12월초 미군은 파키스탄 접경지역인 토라보라에서 빈라덴을 코앞까지 추격했다가 놓쳤다. 토라보라 전투를 지속하려면 추가 병력 투입이 필요했으나, 미국 지도부는 관심이 없었다. 이라크 전쟁 준비에 정신이 팔려, 아프간에 병력이 더 묶여있기를 원치 않았다.

탈레반 붕괴 이후 아프간 주둔 미군은 6천명으로 축소되는 등 전쟁 자원은 이라크로 몰렸다. 무엇보다도 소련 침공과 내전 등으로 20년 이상 전쟁에 지친 아프간 주민에 대한 지원은 1인당 연평균 60달러 정도였다. 이마저도 40%는 원조 공여국의 현지 사무실 비용이었다.

아프간 농민들은 전쟁 때 주 수입원이던 양귀비 재배에 다시 기댔고, 미국과 아프간 정부는 이를 박멸하려 했다. 양귀비 재배를 주 수입원으로 하는 탈레반이 돌아올 최적의 여건이 마련된 셈이다. 탈레반은 아프간 동남부와 접경한 파키스탄의 연방부족 자치지역, 북서 변경주, 발루치스탄 지역에 은거하면서, 국경을 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파키스탄이 아프간에서의 영향력 확보 지렛대로 탈레반의 소멸을 원하지 않았고, 탈레반을 단속할 능력도 없었다. 2004년 총선을 거쳐 하미드 카르자이 정권이 출범하자, 미군의 장악력 약화와 정권의 취약성이 결합해 탈레반 귀환의 토대를 제공했다. 2005년을 지나면서 “도로가 끝나는 곳에서 탈레반은 시작된다”는 말이 다시 현실화됐다.

탈레반의 귀환

“당신들은 시계를 갖고 있으나, 우리는 시간을 갖고 있다.” 2006년 2월 로널드 뉴먼 당시 카불 주재 미국 대사는 본국에 보내는 비밀 외교전문에서 탈레반 지도자의 경고를 전하며 탈레반이 귀환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워싱턴 지도부는 탈레반의 부활을 믿지 않았고, 믿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대사의 경고대로 2006년 탈레반을 중심으로 한 아프간 반군들의 자살 테러는 123건으로 늘어, 전년의 17건에 비해 7배가 넘었다. 사제폭탄 공격은 두 배로, 연합군에 대한 공격은 세 배로 늘어 사망자는 100명에 달했다. 2007년 2월27일 아프간 주둔 미군의 상징인 바그람 기지에서 차량 폭탄테러가 발생했다. 이날 비밀리에 아프간을 방문해 이 기지에 머물다가 카르자이 대통령을 만나려고 나가던 딕 체니 당시 부통령을 겨냥한 테러였다. 탈레반이 바그람 기지를 포함해 아프간의 모든 사정을 손바닥처럼 들여다보고 있다는 신호였다. 그해 7월 한국의 기독교 단기선교단 23명이 탈레반에게 납치돼 2명이 숨지고 나머지는 43일이나 억류됐다가 풀려났다. 탈레반은 연합국의 일원인 한국과 공식 협상을 벌이며 자신들의 귀환을 공식화했다.

미국과의 협상과 세력 확장

2009년 취임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공약인 아프간전 승리를 위해 그해 12월 병력 증강을 발표했다. 2007년 이후 늘어나 이미 7만명에 이르는 미군 병력을 10만명 이상으로 증강하는 발표였으나, 초점은 오히려 2013년 철군을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철군을 위한 조건을 조성하려는 병력 증강이었다. 이는 탈레반과의 협상을 의미했다.

미군 등 연합군의 증강에도 탈레반의 세력 확장은 계속됐다. 탈레반은 2012년 9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연합군의 최대 기지 중 하나인 헬만드주의 배스티언 기지를 직접 공격할 정도로 군사력을 과시했다. 2013년이 되자 탈레반은 카타르에 대표부 개설을 발표했다. 미국이나 탈레반이나 평화협상을 시작하겠다는 신호였다. 협상은 지지부진했다. 무엇보다도 탈레반은 아프간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아프간 정부는 탈레반과의 협상을 반대했다.

탈레반이 평화협상에 나선 것은 지도자 오마르의 사망에 따른 지도부 교체와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나중에 밝혀졌다. 당시 오마르는 병원에서 사망했는데, 탈레반은 2년 뒤인 2015년에야 발표했다. 후계자였던 아흐타르 만수르도 2016년 5월 미군의 드론 공격으로 사망해, 하이바툴라 아쿤자다가 지도자 지위를 승계했다. 지도부 교체 과정에서 탈레반은 평화협상보다는 세력 확장에 매진하며 내부 단속에 집중했다. 탈레반은 북부의 거점 도시이자 주도인 쿤두즈를 함락하기도 했다.

20년 만의 재집권

2020년 2월29일 미국과 탈레반이 카타르 도하에서 평화협정을 타결했다. 미군 등 외국군을 아프간에서 14개월 이내로 완전 철군하고, 탈레반은 아프간을 알카에다 등의 기지로 활용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 뼈대였다. 탈레반과 아프간 정부 사이의 추가 협상도 규정됐으나, 그 후부터 사실상 백지화됐다. 철군 일정은 지켜지지 않았고, 탈레반은 전의를 상실하고 떠나기만을 기다리는 미군을 무시하고 공세를 확장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결국 지난 4월14일 아프간에서 미군 철군을 9월11일 이전에 완료한다(이후 8월31일로 앞당김)고 못박았다. 지난 7월2일 미군은 아프간 최대 기지인 바그람 기지에서 야반도주하듯 철수했다.

탈레반의 공세가 예상보다 거세자,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10일(현지시각) 백악관 기자회견에서 단호하게 “아프간 철군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지난 20년간 1조달러를 썼고, 30만명 이상의 아프간 병력을 훈련시키고 현대적 장비를 갖추게 했다”며 이제 “그들이 스스로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미국이 아프간군에 쏟아부은 천문학적인 예산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던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아프간 정부군의 규모는 30만명으로, 20만명으로 추산되는 탈레반에 앞선다. 하지만 임금을 타기 위한 허위 등록 등 허수가 많아, 실제 정부군 규모는 6분의 1 수준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또 탈레반은 미군이 철수한 공간을 차지하기 위해 똘똘 뭉쳐 싸우는 반면, 정부군은 미군이 떠나기 시작한 이후 급격히 사기가 떨어졌다. 탈레반은 미군의 철수가 마무리되기도 전인 15일, 수도 카불 교외에 입성했다. 불과 몇 시간 뒤 아프간 정부군은 “탈레반에 평화로운 정권 이양”을 발표하며 항복을 선언했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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