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 입성한 15일(현지시각), 고요하고 평화롭기까지 하다고 현지인이 송첫눈송이씨에게 보내온 사진.
[아프간은 지금 ①] 송첫눈송이씨는 2015년부터 2019년까지 유네스코 아프가니스탄 사무소 직원으로 근무했다. 지금도 현지인들과 실시간으로 연락을 주고받는 송씨가 <한겨레>를 통해 탈레반이 재집권한 아프간의 긴박한 상황을 전하고, 유네스코 근무 당시 경험한 아프간의 현실을 소개하는 연재를 시작한다.
8월12일 목요일(현지시각), 아프가니스탄 3대 도시인 헤라트가 함락되었다는 뉴스를 보고 마음을 추스를 수 없었다. 이제 아프간 정부에 남은 교역로는 수도 카불과 마자르이샤리프뿐이었다. 불안했다. 유네스코 아프간 사무소의 바미안지부에서 함께 일하던 현지인 직원 굴람 레자 모하마디에게 지금 당장 바미안을 떠나야 한다고 연락했다. 레자는 마침 유네스코 사무소장이 8월10~12일 일정으로 바미안을 방문 중이라 의전을 하고 있다 답했다. 그리고 이날 오후, 안전상의 이유로 함께 카불로 떠나고 싶다고 말하는 레자에게 유네스코 사무소장은 “아직 상황이 그렇게 나쁘지 않으니 바미안에서의 유네스코 존재를 유지해야 한다”고 명하고는 카불로 돌아갔다. 레자는 바미안에 남았다. 이날부터 나는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밥을 넘기지 못했다.
8월13일 금요일 저녁, 레자에게서 전화를 한통 받았다. 숨이 가쁜 목소리였다. 결국 유엔 차원에서 바미안에 상주한 모든 직원을 카불로 긴급 대피시키기로 결정했고, 지금 급히 짐을 싸고 있다고 했다. 이날 오후 탈레반이 바미안 지방정부에 ‘도시를 떠나라’는 협박 편지를 보냈고, 그러지 않을 경우 군사적 충돌이 있을 것임을 암시했다고 부연했다. 레자도 나도 울음을 삼켰다. 우리로서는 탈레반이 점령한 바미안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찬란하던 헤라트마저도 탈레반의 손아귀에 넘어가지 않았나. 아프간의 그 어떤 지역도 더 이상 안전할 수 없었다.
통화를 마친 후 나와, 내 전 상사로서 함께 아프간에서 일했던 이란인 사라 노샤디, 그리고 레자로 구성된 “카불 떠나기”라는 단체 와츠앱 방을 만들었다. 현 사무소장의 판단력을 보아하니 현지 직원의 안전을 마냥 유네스코에 맡길 수 없었다. 내 판단으로 레자의 목숨은 경각에 달려 있었다. 우리는 매년 바미안에서 돔브라(아프간 전통 악기) 축제와 감자꽃 축제를 열었고, 여성들을 위한 스포츠 대회를 열었으며, 사진작가들을 육성했다. 바미안의 문화 활동은 종종 지역의 가장 보수적인 종교 지도자들에게 강도 높은 비난을 받았다. 탈레반 점령을 눈앞에 둔 지금, 우리와 함께 일했던 문화 기획자들은 탈레반의 첫번째 타깃이 될 터였다. 그렇게 나와 사라는 밤낮으로 다양한 난민 신청 방안을 찾았다. 연줄을 끌어모아 각국 국회의원들에게 이메일을 보내고, 외교부에 전화를 돌리고, 난민 지원서를 작성했다.
페이스북에선 아프간에서 오랜 시간 일했던 외국인 유엔 직원, 비정부단체(NGO) 직원, 대사관 직원들이 주축이 되어 비밀 그룹이 하나 만들어졌다. 우리는 더 나은 국가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하나만으로, 목숨을 걸고 자유와 인권의 회복을 위해 일했던 아프간 현지 직원들의 대피 방안에 대해 논의하고 또 정보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2015년 아프가니스탄 바미안에서 탈레반이 2001년 폭파시킨 55m 불상이 있던 자리가 보인다. 바미안의 주민들은 이 대불을 아버지 부처라 하여 살살 붓다(Salsal Buddha)라 부른다.
2016년 아프가니스탄 바미안 불상이 있던 절벽 위에 올라서 내려다본 바미안시.
민간인 집까지 폭파·방화…더이상 안전지대는 없다
탈레반의 아프간 장악은 사실 며칠 사이에 갑자기 이뤄진 것이 아니다. 이미 6월부터 현지에서는 사태를 충분히 예견할 만한 조짐들이 나타났다.
6월10일 목요일, 레자와 또다른 현지 직원 하메드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레자의 어머니를 카불의 병원에 모셔다드리고 바미안주로 돌아오는 길에 탈레반에 붙잡혀 꼬박 하루 동안 폭행을 당하다 천만다행으로 풀려났다는, 끔찍한 이야기였다. 레자는 파슈토어를 사용하는 파슈툰족 하메드의 부인이 전화상으로 탈레반을 설득한 끝에 풀려날 수 있었다. 아프간에서는 다리어와 파슈토어가 공용어인데, 파슈토어는 아프간 지배 민족이며 탈레반의 주축을 이루는 파슈툰족 사이에서 주로 쓰인다.
내가 근무할 당시만 해도 카불에서 바미안으로 가는 경로 중엔 가끔 외국인들도 이용하던 꽤 안전한 도로가 있었다. 이날을 기점으로 그 도로는 현지 직원들도 위험해서 이용하기 어려운 경로가 되었다. 레자는 오래전부터 독일의 문화유산 관련 석사 과정을 밟고 싶어 했다. 나와 사라가 함께 지원서 준비를 돕고 있었는데, 독일 대학의 행정이 매우 더디었다. 우리는 단계마다 독일로 전화를 걸어서라도 진행을 더 빠르게 돕자는 의견을 나누었다.
7월7일 수요일, 레자가 동영상을 하나 보내주었다. 바미안과 아주 가까운 다이쿤디주 대부분의 지역이 탈레반에 점령되었다는 소식과 함께였다. 영상 속 탈레반은 지역 사람들 중 하자라족의 집을 색출해 폭파시키고 정원에 불을 지르고 있었다. 하자라족은 칭기즈칸의 침략 당시 생겨나 ‘침략자의 후예’라는 불명예스러운 별칭 아래, 아프간에서 꾸준히 차별받아온 민족이다. 바미안 주민 대부분은 하자라족으로, 이슬람 수니파인 아프간 대다수와는 달리 시아파이기도 하다.
레자는 지난달 바미안으로 통하는 모든 도로가 탈레반에 점령된 이후, 고립된 바미안의 음식과 연료 값이 3배 이상 뛰었다고 덧붙였다. 바미안으로 운항하던 모든 민간 항공사들 역시 운항을 멈추었고, 값이 비싼 유엔 경비행기만 운항을 유지하고 있었다. 민간 항공기를 이용할 경우 바미안∼카불 운항은 왕복 100달러 선이지만, 유엔 경비행기는 310달러다. 레자는 가지고 있는 돈을 최대한 긁어모아 가족들을 카불로 대피시키기 위한 유엔 비행기 티켓을 샀다. 그렇게 레자는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게 되었다.
이날 밤, 나는 악몽에 시달렸다. 4년여간 아프간에서 일하면서 가장 애정을 가지고 임했던 바미안문화센터 프로젝트를 떠올렸다. 갖은 우여곡절 끝에 바미안 사람들과 함께 힘겹게 문화센터를 일구었고, 내가 아프간을 떠나던 때쯤엔 마침내 거의 완공한 상태였다. 꿈에서 탈레반은 바미안을 점령하고, 하자라 사람들을 꿇어앉혔으며, 본보기로 각종 축제와 문화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문화센터에 불을 질렀다.
2018년 아프가니스탄 바미안 음악 축제 당시 관중인데, 히잡을 쓴 여성이 대부분이다.
2017년 아프가니스탄 바미안에서 만난 초등학생들.
값 3배인 유엔비행기 표 샀지만, 비행기는 오지 않고 연락은 두절
8월15일 일요일
, 레자로부터 탈레반의 바미안 점령 소식을 들은 지 두달 만에 탈레반이 카불시 바로 바깥에 도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도시 안은 묘한 긴장감으로 고요하고, 한편으론 평화롭게 느껴진다고도 했다.
오전엔 대통령궁에서 일하는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궁 출입 기자들은 모두 철수한 상태이고, 필수 직원들만 평상복 차림으로 출근해 있다고 했다. 모두들 문서를 파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는 하루 종일 <알자지라> 생방송을 틀어두었다. 내가 살던 카불의 중심가 샤르이나우 지역에서 작은 교전이 일어나는 모습을 보았고, 그 이외엔 미군 헬기가 끊임없이 미국 대사관과 공항을 오가며 미국인들을 수송하는 영상만 이어질 뿐이었다.
아프간 시간으로 오후 2시쯤 탈레반 대변인은 <알자지라> 앵커와 한 전화통화에서 목소리를 높여 “평화로운 권력 이양”을 위해 아프간 정부와 세부 내용을 협의 중이라 했다. 그리고 몇시간 만에 아슈라프 가니 아프간 대통령이 떠남으로써 탈레반은 공식적으로 카불을 점령했다. 가니 대통령은 20년간 쌓아온 모두의 노력을 허망할 정도로 간단하게 포기했다.
레자는 이날 종일 연락이 되지 않았다. 아마 카불의 가족과 만나 많이 바쁠 것이라 짐작할 뿐이었다.
8월16일 월요일 새벽 4시, 낭보가 있었다. 아프간에 주둔한 프랑스 기자단이 이 주 주말에 떠나는 긴급 대피 비행기가 있는데 그 짐칸에 레자와 레자의 가족들이 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금요일 자정 이후로 레자에게 연락이 닿지 않고 있었다는 점이다. 순간 불길한 생각에 사로잡혀 사무실 시큐리티에 확인을 요청했다. 그리고 이들은 곧 청천벽력 같은 답변을 보내왔다. 토요일 오전 일찍 바미안에 파견되기로 약속되어 있던 유엔 비행기 중 일부가 도달하지 못했고, 레자의 티켓은 운항되지 못한 비행기편의 티켓이었다. 레자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것은 토요일 오전, 오지 않는 비행기를 기다리다 못해 급히 산중으로 대피했을 때였다. 월요일 오전까지 만 이틀간 레자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월요일 낮,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마음을 태우고 있는 와중에, 레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레자는 지난 이틀간 바미안에서부터 카불까지 산길을 따라 쉬지 않고 걸었다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했다. 바미안에서 카불은 180㎞ 거리이고, 산길이 매우 험하다. 포장 도로는 탈레반에 잡힐 위험이 있으니 이용하지 않았다고 했다. 지금 막 가족들과 만났고, 안전하다 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중 6·25가 발발하자 고향인 울진까지 걸어갔다 하셨던 우리 외할아버지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종교가 없는 나는 아는 신 모두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레자와 그 가족은 이번주 주말에 카불을 떠나는 긴급 대피 비행기편의 탑승자 명단에 들어간 상태이다. 미국은 이달 말까지 탈출을 진행할 예정이고, 탈레반도 공항까지의 길을 열어주겠다고 18일 발표했다.
레자가 떠난 바미안에는 우리와 함께 가깝게 일을 했던 전 문화부 장관이자 현 바미안 주지사인 타히르 주하이르가 끝까지 남아 있었다. 바미안 출장 시 인사하러 갈 때면 내게 사프란 티 한잔을 건네며 사탕 한알 꼭 같이 내어주던, 내가 아프간을 떠나기로 결정하고 마지막으로 바미안을 방문했을 때 오랜 인연이 멀어짐을 아쉬워하며 직접 준비한 나마드 카펫을 선물해주던, 주하이르 주지사는 18일 현재 탈레반에 구금되어 소식이 닿지 않는다. 글·사진/송첫눈송이
(*본 연재의 원고료는 탈레반에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는 아프간 기자, 예술가, 여성 인권 운동가들의 대피를 위해 기부될 예정입니다.)
송첫눈송이 전 유네스코 아프가니스탄 사무소 직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