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레반 대원들이 지난 18일(현지시각)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서 총을 들고 걷고 있다. 카불/AP 연합뉴스
탈레반이 예상을 깨고 카불에 조기 입성한 것은 아슈라프 가니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이 잘못된 정보를 입수하고 국외로 도주했기 때문인 것으로 드러났다. 또, 탈레반은 가니 대통령의 도주 이후 미국에게 카불을 통제해달라고 요청했다가 거절당하자, 카불에 입성한 것으로 나타났다.
<워싱턴 포스트>는 지난 15일 카불이 탈레반에 의해 함락되던 상황과 배경에 대해 미국과 아프간의 관리들을 인터뷰해 상세히 보도했다. 이를 통해 허위 정보에 의한 가니 대통령의 도주로 인해 모든 상황이 급변했다고 전했다.
탈레반이 지난 6일부터 님루즈주 주도 자란즈를 장악하는 등 주도 및 주요 도시를 장악하기 시작했지만, 미국과 아프간 정부는 탈레반의 카불 입성 이틀 전까지도 카불에는 아직 시간이 많다고 생각했다. 미국은 8월 들어서도 탈레반이 카불에는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가니 대통령은 경제의 디지털화에 대해 얘기했고, 하루 전까지도 참모들에게 경제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미국 국무부와 국방부, 백악관의 관련 관리들도 주말이 시작되던 13일에는 여름 휴가를 떠나기 시작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일찍 캠프데이비드 별장으로 갔고,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도 이미 롱아일랜드의 휴양지인 햄튼즈에 있었다.
하지만, 토요일인 14일이 되자 상황은 급변했다. 1990년대 탈레반과 군벌 세력 사이의 치열한 교전지였던 북부의 주요 도시 마자르이샤리프에 탈레반이 무혈 입성했다. 이미 남부의 칸다하르, 서부의 헤라트가 전투로 함락된데 이어, 북부 최대 주요 도시 마자르까지 무혈로 탈레반 수중에 들어가자 나머지 주요 도시들도 탈레반에게 무혈 입성의 길을 열어주는 상황으로 급변했다.
바이든 대통령과 안보 참모들이 긴급 화상회의를 열었고,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은 카불 주재 미국 대사관 직원들을 카불 공항으로 긴급히 이송하라고 지시했다. 그날 저녁 블링컨 국무장관은 가니 아프간 대통령과 통화했다. 가니가 물러나고 임시정부가 출범하면, 탈레반이 카불에 진공하지 않고 외곽에 남아있도록 하겠다는 협상을 탈레반 쪽과 진행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가니는 마지못해 동의했다.
일요일인 15일 아침이 되자, 카불에서 100㎞ 서부의 주요 도시 잘랄라바드에 탈레반이 입성했다. 카불은 이제 고립됐다. 외곽에는 벌써 탈레반 대원들이 출몰하기 시작했다.
가니의 대통령궁에도 공포가 닥쳤지만, 가니가 전날 밤 블링컨 미 국무장관과 한 협상으로 최악의 경우라도 미군이 철군하는 시한인 31일까지는 카불이 안전하리라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정오가 되자, 이상한 소문들이 나돌기 시작했다. 일부 참모들이 도망가는 가운데 한 수석 보좌관이 가니에게 “탈레반 대원들이 대통령궁으로 들어와 그를 찾으려고 방마다 뒤지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 보고는 사실이 아니었다. 탈레반은 대원들이 카불의 주요 검문소를 통과해 도심 주변에 있고, 폭력적으로 도시를 장악할 의사는 없다고 발표했다. 탈레반은 전날 미국과 평화적 이양에 대한 합의를 했고, 이를 준수할 의사였다.
탈레반의 이런 의사는 가니에게 전달되지 않았고, 이미 공포에 질린 참모들은 대통령에게 “여기에 머물면, 경비병이나 탈레반에 의해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 탈레반은 지난 1996년 카불에 입성해서는 이미 은퇴했던 사회주의 정권의 대통령 모하마드 나지불라를 때려 죽인 뒤 길거리에 매달아 놓았다. 가니는 집으로 가서 소지품을 챙기려 했으나, 시간이 없다는 참모들의 재촉에 부인과 몇몇 수석 참모들과 함께 막바로 헬기를 타고 떠났다. 동승한 참모는 헬기가 힌두쿠시 산맥 위를 날고 있다는 것을 보고 비로소 자신들이 막바로 국외로 탈출한다는 것을 알았다. 헬기는 우즈베키스탄에 착륙했고, 거기서 소형 비행기로 갈아타고는 아랍에미리트로 향했다.
가니는 부통령 2명을 포함해 정부의 주요 고위 인사들에게조차 자신의 국외 탈출을 알리지 않았다. 고위 관리들은 급박한 상황에 대한 도움을 대통령궁에 요청했으나, 아무런 회신을 받지 못했다. 눈치빠른 관리들은 공항으로 달아났고, 곳곳에서 정부 붕괴의 움직임이 시작됐다. 의회 의장 등은 파키스탄으로 달아났고, 비스밀라 칸 모하마디 국방장관은 군용기에 타고는 아랍에미리트로 떠났다. 사르와르 다니시 제2부통령, 아마드 지아 사라지 정보국 국장도 대열에 합류했다.
오후부터 카불 공항으로 인파가 몰려들면서, 카불의 치안이 곤두박질하기 시작했다. 미국이 누구보다도 놀랐다. 가니의 도주로 임시정부로의 평화적인 이양 가능성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카타르 도하에서 협상중이던 미-탈레반 대표단들이 다시 나섰다. 케네스 매켄지 중부군 사령관 등 미군 지도자들은 탈레반 대표인 압불 가니 바라다르와의 직접적인 대면 회의를 했다.
바라다르는 “우리에게 문제가 생겼다”며 카불의 권력 및 치안 공백 상황을 지적했다. 그는 “두 가지 방안이 있다”며 “당신들이 카불의 안전을 책임지던가, 우리가 책임을 질 수 있도록 허락하라”고 촉구했다. 아프간 정부의 붕괴도 ‘아프간에서 모든 병력을 철수한다’는 바이든 대통령의 결정은 바꾸지는 못했다. 맥켄지 사령관은 바라다르에게 미국의 임무는 위기에 처한 미국 시민과 협조자들을 소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를 위해 “미국에 공항(통제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자리에서 합의가 이뤄졌다. 미국은 31일까지 카불 공항을 사용하고, 탈레반은 카불을 통제하기로 했다. 곧 탈레반의 사령관인 무함마드 나시르 하카니의 전화에 “시내로 진입해 추가적인 무질서를 막고, 혼란으로부터 공중의 재산과 공무를 보호하라”는 지시가 전해졌다. 1시간 내로 하카니와 그의 무장병력들 시내 중심가에 진입해 대통령궁까지 들어갔다.
하카니와 대원들은 혼자 남은 경비병의 안내로 대통령 집무실까지 돌아보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가 눈물을 흘리는 동안 카불 시내 곳곳에서는 절망과 공포가 급속히 퍼져나갔고, 공항으로 가는 아비규환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정의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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