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을 태운 마지막 비행기가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 하미드 카르자이 공항에서 떠난 다음날인 31일(현지시각) 탈레반의 자비훌라 무자히드 대변인(가운데)이 공항 활주로에 서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그는 “승리는 우리의 것”이라며 탈레반의 승리는 “다른 침략자에게도 교훈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우리는 미국 그리고 세계와 좋은 관계를 원한다”고도 말했다. s카불/AFP 연합뉴스
‘영원한 전쟁’, ‘가장 긴 전쟁’, ‘유령의 전쟁’이 종료됐다.
1978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사회주의 정권 성립 이후 43년간이나 계속되던 전쟁이 30일 11시59분(현지시각) 미군 철군 완료로 종료가 선언됐다. 고립되고 빈한한 아프간에는 소련을 시작으로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회원국 및 동맹국 등이 군홧발을 디뎠고, 파키스탄·사우디아라비아 등 이슬람국가들이 개입했다. 이슬람 세계의 무슬림들이 ‘지하드’(성전)를 수행하려고 찾아왔다. 한국도 군을 파견했고, 그 여파로 2007년에 한국의 기독교 선교단이 40여일이나 납치돼 2명이 사망했다.
아프간 전쟁 43년은 미·소 제국들의 지정학적 욕망과 오판, 이를 합리화하려는 서방식 가치의 ‘레짐 체인지’(체제 전환) 강요, 이에 저항하는 아프간 주민과 무슬림들의 투쟁, 주변 국가들의 정략적 개입이 뒤섞여, 지독한 모순과 반전으로 점철됐다.
첫째, 강대국들의 제국적 욕망과 오판이다.
‘제국의 무덤’이라는 아프간의 별칭은 19세기 영국과 러시아가 유라시아 대륙의 패권을 겨룬 ‘그레이트 게임’에서 연유했다. 영국은 당시 유라시아 대륙에서 급속히 팽창하던 러시아제국이 인도양으로 남하해, 인도까지 위협할 수 있다는 ‘러시아 공포증’에 시달렸다. 영국은 길목인 아프간을 1839년 선제적으로 침공해 점령했으나, 3년 뒤 현지 부족 세력들의 봉기에 1만7천여명의 군인과 민간인 중 1명만이 생환하는 대재앙을 겪었다. 영국은 두차례나 더 아프간을 침공했다. 애초부터 러시아는 인도를 위협할 의지와 역량이 없었는데도, 영국은 제국적 욕망에 따른 오판으로 아프간을 침공했고, 이에 러시아 역시 주변 지역을 위협하는 치킨게임을 벌였다. 결국 러시아제국이 붕괴한 뒤인 1919년이 되어서야 영국은 아프간을 중립국으로 하는 독립을 허용했다.
아프간은 러시아를 계승한 소련의 제국적 욕망과 오판으로 다시 전쟁의 늪에 빠져들었다. 소련은 자신들의 지원으로 성립한 사회주의 정권이 붕괴되면, 자국령 중앙아시아로까지 영향이 파급될 것을 우려해 군사적 개입을 단행했다.
다음 차례는 미국이었다. 서방 해양 세력들은 아프간에 전략적 이해관계가 크지 않았음에도 단지 러시아를 막기 위해 영국이 아프간을 침공한 것처럼 미국도 소련을 괴롭혀 늪에 빠뜨리려 했다. 사우디아라비아 및 파키스탄과 손잡고 아프간 주민뿐만 아니라 이슬람 세계의 무슬림들을 동원해, ‘지하드’를 수행하는 무자헤딘 운동을 기획했다. 이는 소련의 철군을 이끌기는 했으나, 미국을 겨누는 이슬람주의 운동을 본격적으로 배태시켰다.
알카에다 결성 및 9·11 테러로 이어졌고, 미국이 아프간을 침공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조성했다. 미국은 이때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 붕괴 등 중동 질서의 재편까지 도모하는 무리수를 뒀다. 탈레반 정권을 붕괴시키자마자 이라크 전쟁으로 자원을 돌려서 아프간의 재건을 내팽개치고 탈레반의 부활을 불렀다.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의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에서 30일(현지시각) 밤 크리스토퍼 도너휴 미국 육군 82공수사단장이 아프간에서 마지막으로 철수하는 미군으로 C-17 수송기에 오르고 있다. 미 중부사령부 제공
둘째, 서방식 가치에 입각한 ‘레짐 체인지’의 실패다.
아프간 전쟁은 사실 사회주의 정권의 급진적 개혁에 대한 반발로 촉발됐다. 탈레반의 재집권 이후 국제사회에서 가장 문제 되는 여성인권 문제도 사회주의 정권이 현지의 부족적 질서의 타파를 시도하면서 시작됐다. 사회주의 정권은 여성 문맹을 타파하려고 여성의 의무교육, 신부지참금 폐지, 혼인의 자유를 선포했고, 토지개혁까지 단행했다. 이는 아프간의 부족적 질서의 기득권자뿐만 아니라 비도시 지역의 일반 주민들까지 봉기하게 만들었다.
아프간은 지금도 인구의 70%가 비도시 지역의 부족사회적 질서에서 사는 사회다. 소련과 미국의 점령을 거치면서 이들이 내세웠던 현대적 개혁은 도시와 비도시 사이의 분리와 격차를 더욱 키웠다. 강대국들이 개혁의 지원을 도시에 집중했고, 저항이 심한 비도시 지역에는 공습과 드론 공격으로 무고한 민간인들의 피해가 가중됐다. 이는 탈레반이 귀환해 재집권하는 배경이 됐다. 또 그동안 현대화의 혜택을 향유했던 도시 지역 중산층, 특히 고학력 여성들이 탈레반의 귀환에 공포를 느끼고 국외로 탈출하는 분열과 비극을 낳은 배경이었다.
셋째, 국제질서의 변화다. 전쟁의 문을 연 소련은 그 과정에서 붕괴돼 냉전이 종식됐다. 미국의 일극적 질서가 한때 성립되는 듯했으나, 미국은 아프간 전쟁에서 지원했던 이슬람주의 세력의 성장으로 중동전쟁의 수렁에 아직 빠져 있다. 이는 중국의 부상을 불렀고, 격렬한 미-중 대결로 진입하고 있다.
그동안 미국은 아프간에서 2조3100억달러(약 2679조원)를 썼고, 참전한 나토 회원국들의 비용, 소련의 비용까지 합치면, 현 물가로 환산한 미국의 2차대전 비용인 4조1천억달러에 육박한다. 막대한 돈을 쏟아부었으나, 아프간의 국내총생산(GDP)은 2020년에 그 전비의 0.5%에 불과한 200억달러, 1인당 소득은 500달러 남짓한 빈곤과 기아에 시달린다. 미국의 20년 아프간 전쟁 기간에만 미군과 아프간 민간인 등 17만여명이 숨지고 난민 260여만명이 발생했다. 소련 점령 때부터 모두 200만여명이 숨지고 1천여만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결국 결과는 탈레반의 재집권이었다.
미국 합참의장의 전략담당 특별보좌관이었던 카터 맬케이지언은 <아프간에서 미국의 전쟁>에서 이렇게 묻는다. “탈레반은 결코 좋지 않다. 여성을 억압했고, 교육을 황폐화했고, 표현의 자유를 침묵시켰다. 우리의 개입은 이런 측면에서 숭고한 일을 했다. 그러나 그런 선행이 폭력, 죽음 등을 상쇄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개입이 없었다면, 아프간 주민들은 못살고 억압받았을 것이나,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아프간 주민들을 해방시켰나, 아니면 억압했는가?”
그래서 우리도 물어야 한다. 아프간은 ‘제국의 무덤’인가, ‘제국의 질주에 치여나간 희생물’인가를.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