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임하는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앞쪽)가 13일 이스라엘 의회에서 개의를 기다리며, 후임 총리로 지명된 나프탈리 베네트(뒤쪽) 앞줄에 앉아 마스크를 고쳐 매고 있다. 예루살렘/AP 연합뉴스
13일 물러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네차례 선거에서 승리하고 다섯 차례 총리직을 수행하는 등 모두 15년 동안(12년 연속 포함) 집권한 이스라엘의 최장수 총리였다.
그가 정치적으로 승승장구한 것은 스스로 아랍계 적대세력에 둘러싸인 이스라엘의 안보를 가장 잘 지킬 수 있는 인물로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비비시>(BBC)가 분석했다.
그는 팔레스타인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견지한 보수 정치인이다. 이란 핵 개발과 관련해서도 타협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강경한 태도로 일관해, 협상을 추진한 미국 버락 오바마 행정부와 갈등을 겪었다.
네타냐후는 1949년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1963년 역사학자이자 시온주의 활동가인 아버지 벤지온이 미국 대학의 교수가 되자 미국으로 이주했다. 18살 때 이스라엘로 돌아가 5년간 특수부대 장교로 복무하며 1968년 베이루트 공항 공습과 1973년 중동전쟁에 참전했고, 이후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학업을 마쳤다.
그의 형 요나탄은 1976년 우간다 엔테베 공항에서 팔레스타인 조직에 피납된 항공기 구출 작전에 투입됐다가 숨졌다.
네타냐후는 1982년 주미 이스라엘 대사관의 외교관으로 공직을 시작했으며, 1984년엔 유엔 주재 대사가 됐다. 1988년 리쿠드당 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했으며, 1993년 당대표가 됐다. 그는 오슬로 평화협정을 추진한 이츠하크 라빈 총리가 극우파에 암살당하자 1996년 43살의 나이에 역대 최연소 총리가 됐다.
그는 애초 팔레스타인의 자치와 이스라엘군의 추가 철수 등을 담은 오슬로 평화협정에 반대했으나, 막상 총리가 된 뒤엔 미국의 압력에 따라 협정을 받아들였다.
1999년 선거 패배로 노동당에 정권을 넘겨준 뒤엔 정계를 은퇴했다. 그러나 2001년 리쿠드당의 선거 승리로 아리엘 샤론 총리가 집권하자, 정계에 복귀해 외교부 장관과 재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그는 2005년 이스라엘군의 가자지구 철수에 항의하며 사임한 뒤 리쿠드당의 대표가 되어 치른 2009년 선거에서 승리해 두번째 총리가 됐다.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13일 이스라엘 의회에서 후임 총리로 지명된 나프탈리 베네트와 악수하고 있다. 예루살렘/UPI 연합뉴스 2021-06-14
네타냐후는 총리 취임 직후 평화협상 재개 의사를 밝혔다. 그는 팔레스타인이 비무장 상태로 남고 이스라엘을 유대국가로 공식 인정하면 팔레스타인 국가를 인정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팔레스타인의 거부로 협상은 진척을 보지 못했다. 그의 재임 기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2012년, 2014년, 2021년 대규모 무력 충돌을 벌였다.
그는 오바마 대통령과 불편한 관계였지만 2017년 취임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는 ‘찰떡궁합’을 과시했다. 트럼프가 팔레스타인의 반대를 무릅쓰고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고 이란 핵합의에서 탈퇴하자, 전폭적인 지지를 표명했다.
2016년 이후엔 부패 스캔들에 휘말렸다. 기업인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로 수사를 받아오다 2019년 11월 기소됐고, 지난해 5월 현직 총리로는 처음으로 법정에 출두했다. 그럼에도 2년 동안 잇따라 열린 네차례 총선에서 살아남는 ‘불굴의 생존력’을 보였지만, ‘무지개 연정’ 출범으로 결국 장기집권에 마침표를 찍었다.
박병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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