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전 카자흐스탄 대통령의 초상화가 카자흐 전역에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있었던 지난 1월10일 알마티 중앙 광장에 찢긴 채 놓여 있다. 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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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최대 산유국인 카자흐스탄에서 새해 벽두부터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는 카자흐스탄 정부가 액화석유가스(LPG) 보조금 지급과 가격상한제를 폐지하면서 발생했다. 2021년 1리터당 평균 50텡게(약 145원)를 유지하던 액화석유가스 가격은 정부 조처 때문에 120텡게(약 350원)까지 치솟았다. 최저임금이 월 4만2500텡게(약 12만원)인 상황에서 두 배 이상 폭등한 액화석유가스 가격은 주민들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더군다나 시위의 진원지인 자나오젠은 시민의 90%가 액화석유가스 차량을 이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타격이 더 컸다. 자나오젠에서 시작된 시위는 전국으로 급속히 확산되면서 유혈사태로 격화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 “엘피지 가격 인상 반대”를 외치던 시위대의 구호가 ‘늙은이는 물러가라’는 뜻인 “샬, 켓”(Shal, Ket)으로 변한 것이다. 시위대가 불만을 품은 ‘늙은이’는 바로 30년간 카자흐스탄 대통령으로 군림했던 초대 대통령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시위대는 초대 대통령 관저에 불을 지르고, 전국에 서 있는 나자르바예프의 동상을 끌어내리며 그에 대한 불만을 표출했다. 대체 나자르바예프가 누구이기에 카자흐 시민들은 이토록 분노했던 것일까?
나자르바예프는 1940년 소비에트연방(소련) 시절이던 카자흐스탄 알마티주의 체몰간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목동의 아들로 태어났다. 카라간다 야금기술대학교에서 야금학을 전공한 그는 카라간다 제철소에서 노동자로 경력을 시작했다. 철강 노동자였던 그는 1968년 중공업과 건설업을 총괄하는 테미르타우시 공산당 위원회 제2서기로 취임하면서 정치에 발을 들이게 된다. 지방 공산당 당원이었던 그가 중앙 정치무대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계기는 소련에서 ‘페레스트로이카’(개혁·개방)를 추진한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소련 공산당 서기장 취임과 관련돼 있다.
당시 카자흐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SSR, Soviet Socialist Republic) 서기장은 딘무하메드 쿠나예프로, ‘브레즈네프 독트린’으로 유명한 보수온건파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의 사람이었다. 소련에서 두번째로 큰 영토를 지닌 카자흐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의 서기장이 고르바초프와 반대되는 보수온건적 성향을 지녔다는 점에서 쿠나예프는 고르바초프의 우선 제거 대상으로 떠올랐다 . 이때 페레스트로이카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젊고 유능한 카자흐인 나자르바예프가 쿠나예프의 대체자로 떠올랐다. 그런데 고르바초프가 쿠나예프를 해임하고 후임으로 임명한 사람은 슬라브계 러시아인 겐나디 콜빈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콜빈의 카자흐 에스에스아르 서기장 취임은 나자르바예프가 카자흐스탄에서 장기 집권하게 하는 발판으로 작용했다.
카자흐인으로서 최초로 서기장에 올랐던 쿠나예프를 슬라브계 콜빈으로 경질한 소련 중앙정부의 결정은 당시 카자흐 에스에스아르 수도 알마아타(‘알마티’의 소련 시절 이름)에서 즉각적인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젤톡산’(Jeltoqsan, 카자흐말로 ‘12월’)이라는 대규모 반러시아·반정부 시위는 200여명의 사상자를 내는 유혈충돌로 번지며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에 결국 소련 중앙정부는 콜빈을 해임하고 고르바초프의 신임을 받던 젊은 카자흐인 나자르바예프를 카자흐 에스에스아르 서기장으로 임명하게 된다.
나자르바예프는 소련 붕괴 뒤 처음 치른 1991년 대통령 선거에 단독 출마하여 98%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압도적인 득표율로 나자르바예프가 당선되었는데도 보수 세력이 의회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경제개혁안을 둘러싸고 입법부와 격렬하게 대치했다. 나자르바예프는 이 같은 갈등 상황을 어떻게 해결하고 30년간 카자흐스탄에서 집권할 수 있었을까.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가운데)이 카자흐스탄 최대 정당인 누르오탄 정치위원회 화상 회의에 참여하고 있다. 타스 연합뉴스
나자르바예프가 택한 방법은 헌법을 통해 제도적으로 대통령 권한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나자르바예프는 헌법재판소의 의회 구성에 관한 위헌 결정을 이용해 1993년과 1995년 의회를 해산했다. 그리고 1995년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 권한을 대폭 확대한 신헌법을 채택하는데, 이 헌법은 소위 ‘나자르바예프 헌법’이라 불리며 입법부에 대한 대통령의 막강한 권력을 보장하는 도구로 기능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의회가 내각을 불신임하거나, 수상(총리) 임명 동의를 두차례 이상 거부할 경우 대통령이 의회를 해산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된다. 반면 입법부는 대통령이 질병으로 직무를 수행할 수 없거나, 반역죄가 있는 경우에 한하여 양원 합동총회 대의원의 4분의 3 이상 찬성을 요건으로 할 때만 대통령을 해임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나자르바예프는 대통령에게 제왕적 권한을 부여하는 도구로 신헌법을 사용한 것이었다. 게다가 나자르바예프는 ‘초대 대통령’법을 제정하여 자신을 국부(國父)에 해당하는 ‘엘바시’(Elbasy, 민족지도자)로 칭하고 종신토록 명예를 보장하도록 했으며, 심지어 초대 대통령과 그 가족에 대해서도 불기소 특권과 면책 특권까지 부여했다. 또한 2007년 헌법을 개정하여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대통령의 연임 제한 규정을 예외적으로 허용하면서 영원히 카자흐스탄을 지배하고자 했다.
2016년 9월 카자흐스탄의 옆 나라 우즈베키스탄에서 25년 넘게 장기 집권해온 이슬람 카리모프 대통령이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숨졌다. 카리모프와 같이 장기 독재를 해온 독재자이자 동년배인 나자르바예프에게 카리모프의 죽음은 남의 일이 아니었다. 나자르바예프는 이에 대한 대비책이자 자신과 가족들, 그리고 주변 정치 엘리트들의 영구적인 정치 생존을 위해서 ‘상왕 정치’를 택하게 된다.
나자르바예프는 2019년 3월19일 대통령을 공식적으로 사임하고, 당시 상원의장이었던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를 대통령으로 지명했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나자르바예프는 정보기관인 국가안보위원회(NSC), 집권 여당 누르오탄(현재의 아마나트), 민족회의, 헌법위원회의 의장·위원장 자리에 올랐다. 문제는 그가 맡은 지위들이 가히 ‘상왕 정치’를 가능하게 만드는 권력을 갖고 있다는 점이었다.
나자르바예프는 토카예프가 헌법을 이용해서 권력을 강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했다. 그는 헌법을 개정하며 모든 헌법 수정안에 대해 헌법위원회의 검토 필요성을 명시했다. 또한 카자흐스탄의 국방과 관련된 모든 사항의 결정권을 국가안보위원회에 부여했다. 가장 문제가 되는 직책은 입법부 인사권을 지닌 민족회의와 집권 여당의 대표직이었다. 카자흐스탄의 하원은 총 107석인데, 이 중 민족회의에서 9명을 임명한다. 나머지 98석은 비례대표로 선출하는데, 카자흐스탄 역대 선거 결과를 살펴보면 집권 여당인 누르오탄당이 절대다수의 의석을 차지해왔다. 즉, 집권 여당 당대표와 민족회의 종신 의장직은 그에게 의회를 구성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안정적인 경제발전을 바탕으로 권력을 유지해온 나자르바예프 정권은 2020년 코로나 팬데믹의 영향으로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나자르바예프의 권력은 2022년 1월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카자흐스탄 시위 사태를 계기로 토카예프는 국가안보위원회 의장직을 넘겨받았고, 이어 집권 여당의 대표직에 올랐으며, 나자르바예프의 민족회의 종신 의장직을 박탈했다. 주요 공기업의 회장직을 맡고 있었던 나자르바예프의 가족도 연이어 자리에서 물러났다. 나자르바예프 권력의 시대가 끝난 것이다.
2022년 3월, 토카예프 대통령은 국정연설에서 제왕적 대통령 권한을 국회에 이양하고, 헌법재판소를 신설하는 내용의 헌법 개정안을 제안했다. 그는 또한 ‘제2공화국’을 표방하며 대통령의 국회의원 임명권을 줄이고, 선거제도를 비례대표제와 다수대표제를 혼합한 방식으로 전환할 것을 제시했다. 카자흐스탄은 이런 정치 개혁안을 두고 다음달 5일 국민투표를 치른다.
최근 카자흐스탄은 우크라이나의 영토 보전을 지지하고, 러시아 침공을 지지하는 ‘Z’ 표시를 단속하는 등 우크라이나 사태를 둘러싸고 러시아와 불협화음을 내고 있다. 강대국 간 세력권이 충돌하고 있는 현재, 러시아 세력권 아래 있었던 카자흐스탄이 제2공화국으로 전환을 순조롭게 진행하게 될 것인가? 카자흐스탄처럼 강대국에 끼인 국가인 한국은 카자흐스탄 사례를 주의 깊게 살펴보며 신냉전 시대 전략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정선미 한신대학교 유라시아연구소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