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25일 샵카트 미르지요예프 우즈베키스탄 대통령이 하루 전 총선에서 80.1%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한 뒤, 지지자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타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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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는 유목민들의 땅이다. 과거 유목민들은 많은 민족과 교류하면서 이동의 자유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국가와 민족의 경계를 초월한 문물 교환이 가능했다.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중앙아시아는 동쪽으로는 중국, 서쪽으로는 터키, 남쪽으로는 이란 및 아프가니스탄, 북쪽으로는 러시아와 접해 있다. 중앙아시아 5개국은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으로 구성돼 있다. 이 가운데 우즈베키스탄은 유목과 정주가 교차했던 지역으로 실크로드 상인의 본거지였다. 실크로드의 동쪽 종착지이자 서쪽으로의 출발지였던 한반도와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문명과 교역의 중심지였던 우즈베키스탄
우즈베키스탄은 과거 문명의 중심이었다. 14세기 후반 티무르 제국의 거점이기도 했고, 기원전 4세기께 정복길에 오른 알렉산더 대왕이 머물며 결혼까지 했던 곳이다. 찬란한 이슬람 문명을 생생히 전하는 고대 도시 부하라, 히바, 사마르칸트는 그들의 자부심이다. 중세부터 융성했던 교육과 수학, 천문학, 의학, 문학은 다른 지역의 학문 발달에 자극제가 되었다.
문명 결합을 선도한 조상들의 유전자를 계승할 것인가. 우즈베키스탄은 1991년 소련 해체로 독립한 이후 고립정책에서 벗어나 최근 역동적으로 세계와 재결합하고 있다. 러시아, 중국은 물론 그동안 소원했던 역내 중앙아시아 국가들과의 협력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또한 2017년 외환 자유화에 이어 항공·철도 연결을 통해 과거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교통의 중심지로서 부활을 꿈꾸고 있다. 올해 1월에도 샵카트 미르지요예프 대통령은 주변국들에 실크로드 경제 회랑과 플랫폼 구축을 제안하며 과거의 협력벨트 복원을 주도하려는 모습이다.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약 3500만 인구는 우즈베키스탄의 가장 큰 잠재력이다. 이 가운데 한국에 거주하는 약 7만명의 우즈베키스탄인들은 유학생, 사업가, 노동자로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의 다문화사회 형성에 주역을 담당하고 있다. 고대 고구려 벽화에 나오는 실크로드 상인들처럼 다시 한반도에 나타난 이들은 이번엔 한국의 문화, 과학기술, 비즈니스 노하우를 배워 중앙아시아에 전파하기를 원한다.
근면하고 예의 바른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은 성공한 한국을 닮고 싶어 한다. 고인이 된 이슬람 카리모프 전 대통령은 임기 중 한국과 가장 많은 정상회담을 했던 국가수반이다. 그는 2011년 수르길 가스전 개발 사업을 한국 기업과 체결하면서 특별한 우정을 강조했다고 전해진다. 우즈베키스탄이 어려울 때 한국 자동차 기업이 진출해준 것에 대한 감사와 정서적 유대감을 표현한 것이다. 현재도 양국은 다양한 비즈니스와 인적 교류, 교육과 직업훈련 분야에서 협력하고 있다. 세계인이 즐기는 한류는 현지 청년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자 외부와 소통하는 21세기 문화 통로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실크로드의 후예는 다시 문명의
플랫폼을 개척할 수 있을까.
주변 강대국도 어려워하는 파트너
2016년 집권한 미르지요예프 대통령은 전임자의 강권통치에서 벗어나 개혁에 나서고 있다. 예를 들어 인권 문제를 제기했다는 이유로 전임자가 추방했던 유럽부흥개발은행(EBRD)을 복귀시키고 언론 자유도 확대하고 있다. 이전 정권에서 만연했던 면화산업 강제노동과 고문을 금지하고, 구금되었던 인권운동가와 정치범의 석방 조처는 국제사회의 지지를 받고 있다.
외국인 관광객과 투자 유치를 위한 출입국 간소화, 세금 면제 등을 통해 개방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또한 특수학교를 세워 엘리트 양성 교육에 힘을 쏟고 있다. 이들은 유학파와 함께 우즈베키스탄의 미래에 많은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아직 제한적이긴 하지만 이런 시도들이 성공한다면 이 나라는 유라시아의 대표적인 중견국가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주변 강대국과 협력은 확대하지만 종속되지 않는 절묘한 우즈베키스탄의 외교는 한국에 연구 대상이다.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능숙한 등거리 외교로 중국과 러시아를 관리해왔다. 특히 우즈베키스탄은 중국, 러시아와 군사동맹은 물론 간섭도 거부해왔다. 중앙아시아에서 중립국 투르크메니스탄을 제외하고 러시아 군대가 파견되지 않은 나라는 우즈베키스탄뿐이다. 제국 복원을 꿈꾸며 블라디미르 푸틴이 주도하는 군사·경제기구인 집단안보조약기구(CSTO), 유라시아 경제연합(EAEU)에도 가입하지 않고 있다. 2022년 러시아군의 카자흐스탄 파병과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하며 푸틴과 거리를 두고 있다.
중국의 급격한 성장은 중앙아시아에 기회이자 위협이다. 중국은 경제협력과 물류망 연결을 추진하며 이 지역에 공을 들여왔다. 그러나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중국과 협력은 원하지만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다.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중국의 일대일로가 현대판 서역 정벌이 될 가능성을 걱정하고 있다. 우즈베키스탄 역시 중국에 까다로운 태도를 보이고 있다.
유라시아 협력벨트 재건 필요한 이유
한국과 중앙아시아의 미래는 개별 국가의 국내 안정과 경제 성장, 주변 강대국과의 관계, 역내 평화와 협력에 달려 있다. 특히 강대국에 둘러싸인 양 지역은 우크라이나 전쟁 결과에 따라 많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만약 우크라이나 전쟁이 푸틴의 의도대로 끝난다면 다음 목표는 중앙아시아가 될 수 있다. 거세지는 러시아의 압력과 간섭으로부터 주권을 지키려는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고민은 깊어질 것이다. 한국 역시 더 강해질 미-중 대립의 파고를 마주할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우크라이나 전쟁이 러시아에 불리하게 전개된다면 중견국들의 입지는 상대적으로 강화될 수 있다.
현재 중국과 러시아는 역사상 유례없는 밀월 관계이지만 국익에 따라 경쟁 관계이기도 하다. 러시아의 반대로 20년 동안 답보 상태에 있던 중국-우즈베키스탄 철도 연결이 최근에야 착공 합의된 것은 중-러의 이해 충돌을 보여주는 사례다. 철도가 완공되면 중국의 영향력이 중앙아시아 내부로 확산될 것이라는 러시아의 우려가 작용했다. 그래서 향후 중-러 관계에 균열이 생기면 중앙아시아 국제정세는 위기가 예상된다. 하나의 유목문화로 엮여 있던 중앙아시아는 과거나 지금이나 공동운명체일 수밖에 없다.
향후 요동칠 국제 질서와 공급망 재편은 한국과 중앙아시아에 위기와 기회라는 두개의 창을 동시에 열어줄 것이다. 강대국의 영역 다툼에서 생존하는 길은 다양한 협력 루트를 개척해서 독자적인 자생력을 기르는 것이다. 한국과 중앙아시아는 서로에게 중요한 경제·물류·공급망 협력의 거점이 될 수 있다. 과거 조상들이 구축했던 유라시아 협력벨트를 재건하여 혼란과 위기의 시대를 극복하는 거대한 전략을 함께 그려보는 것은 어떨까.
박상남 한신대 글로벌 인재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