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사람] 국회의원 아들에 살해당한 제시카 롤
1999년 4월30일 인도 뉴델리의 고급 레스토랑 타마린코트에서 둔탁한 총성이 울렸다. 바텐더로 일하던 전직 패션 모델 제시카 롤(34)은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그대로 쓰러졌다. 인도 전 대통령의 조카이자, 국회의원의 아들이며, 제분업체 상속자인 마누 샤르마의 손엔 권총이 들려 있었다.
지난 14일 수백명의 인도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제시카! 제시카!“를 외쳤다. 사람들의 얼굴엔 한결같이 분노가 잔뜩 스며 있었다. 한 시민은 “우리는 아버지가 유력한 정치인이면 살인을 해도 괜찮은 나라에 살고 있다”며 분통을 떠뜨렸다. 샤르마에게 무죄가 선고된 날이었다.
인도가 ‘제시카의 죽음’을 놓고 들끓고 있다. “증거가 불충분하다”며 샤르마에게 무죄를 선고한 법원을 규탄하는 시위가 곳곳에서 벌어지고, 텔레비전에선 인도 사법체계의 실상을 고발하는 프로그램이 연달아 방영되고 있다. 시사지 <더위크〉는 “부자들은 얼마나 살인을 저지르기 좋은가!”라며 인도 특권층의 부도덕성을 질타하고 나섰다.
인도의 사법체계는 흔히 ‘거미줄’에 비유된다. 인도의 법망이 힘없는 날파리만 잡고, 사나운 장수말벌은 찢어질까 두려워 건들지조차 않는 현실을 비꼰 것이다. 제시카의 죽음과 샤르마의 무죄 선고는 그런 부조리한 현실을 다시 한번 인도 사람들에게 적나라하게 보여줬다고 영국 <비비시(BBC)>는 지적했다.
“증거 부족” 살해범 무죄…특권층 규탄 시위
문제의 총성이 울리던 날, 샤르마는 이미 많이 취해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레스토랑을 찾은 그는 제시카에게 칵테일을 주문했다. 그러나 제시카는 문을 닫을 시간이 됐다며 정중히 주문을 거절했다. 더욱이 그 레스토랑은 술을 팔 수 없는 곳이었다. 그게 제시카의 마지막 모습이 될 줄은 누구도 몰랐다.
목격자들은 처음엔 “샤르마가 권총으로 제시카를 쏘았다”고 증언했다. 샤르마 일당들이 황급히 현장을 청소하고 증거물을 없앴다는 것까지 또렷하게 기억해냈다. 그러나 이들은 얼마 뒤 이런 진술을 모두 번복했다. 경찰은 어쩐 일인지 수사에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인도 사람들은 제시카의 불행이 자신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고 두려워한다. 디비아 프라카시(19)는 “이런 일은 인도에선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며 “제시카는 나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말비카 싱(27)은 “인도 정치인들은 미친듯이 행패를 부린다”며 “이들에게 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인도 사법부가 권력자의 힘보다 시민의 분노를 더 두려워하는 날은 올 것인가? 사회학자 디팡카르 굽타는 “시민들의 분노는 부도덕한 인도 상류사회에 대한 저항의식의 표출”이라며 “파리들도 뭉치면 거미집을 찢을 수 있다”고 말했다. 최은주 기자 flowerpig@hani.co.kr
인도 사법부가 권력자의 힘보다 시민의 분노를 더 두려워하는 날은 올 것인가? 사회학자 디팡카르 굽타는 “시민들의 분노는 부도덕한 인도 상류사회에 대한 저항의식의 표출”이라며 “파리들도 뭉치면 거미집을 찢을 수 있다”고 말했다. 최은주 기자 flowerpi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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