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질의 거의 마지막 단계이다. 깨끗한 물에 헹군 다음 줄에 널면 끝이다. 빨래질이나(?) 한다고 연민어린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 그는 자신의 일을 통해 가족과 자신을 보호하고 그안에 충실할 따름이다. 그가 흘리는 땀과 그늘에 가려진 맑은 미소가 그렇게 전해준다.
하루밤 210달러 사치를 강요하는 ‘인도의 상하이’ 드디어 길 끝에 섰다. 비다르바 지역 농촌의 하루 5천원짜리 여인숙을 뒤로 하고 도착한 뭄바이, 인도의 뉴욕이자 상하이인 이곳에선 인도양이 내려다보이는 호텔방에 짐을 풀었다. 하루밤 호텔값 210달러, 숨막히는 가격이다. 인도 경제붐을 상징하는 뭄바이로 몰려드는 인파 때문에 이 돈으로도 얻을 수 있는 방이 많지 않다. ‘강요된 사치’를 즐기기로 마음 먹고 아침밥을 먹으러 내려가니 미술관처럼 꾸며놓은 식당엔 사업가로 보이는 서양인들이 자리를 메우고 있다. 미국이나 유럽에 와 있는 듯하다. 1640만 인구의 뭄바이는 인도 최대 도시이자 경제 중심지이며, ‘발리우드’(뭄바이의 옛 이름인 봄베이와 할리우드의 합성어)의 본산이다. 인도중앙은행과 대기업 본사들은 물론 석유화학 산업단지들까지 줄줄이 이 도시에 몰려 있다. 심지어 인도 최대의 유전지대도 뭄바이 앞바다에 있는데 석유관련 시설과 산업시설이 들어찬 뭄바이 앞 인도양은 배를 타고 한 시간을 가도 시커먼 바닷물이 끝없이 이어진다. 배에서 바라본 뭄바이 해변은 상하이의 전경을 보는 듯한데 냄새는 유전지대에 와 있는 느낌이다. 주변 농촌의 빈민들 또한 이곳으로 끝없이 밀려들어 두개의 세계를 만들어간다. 아시아 최대의 빈민가와 고층빌딩들이 즐비한 인도의 맨해튼, 해변가 호텔들과 식민지 시대의 장엄한 건물이 공존하는 이 도시는 두발을 서로 다른 시대에 딛고 서 있다.
육체의 향연이다. 온몸을 휘둘러 세탁물을 내지른다. 옷의 절은 때는 떨어져 나가고 덩달아 빨래군들의 땀도 사방으로 튄다.
남자 5천여명이 한꺼번에 빨래하는 도비가트 도착한 다음날 아침, 초대형 집단 빨래터로 유명한 도비가트에 갔다. 뭄바이 전역에서 모인 빨래감을 5천여명의 남자들이 노천의 빨래터에서 힘껏 빨고 넌다. 도비가트 입구에서 막아서는 동네 청년들과의 흥정 끝에 우린 안으로 들어갔다. 빨래에 열중하던 아저씨들은 처음에는 경계를 하는 듯 우리를 흘끔 바라보았지만 곧 눈빛에서 경계심이 사라진다.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거대한 물통에 들어가 빨래를 힘껏 밟고 치는 아빠 옆에서 작은 손으로 일을 돕던 아이들은 몸이 더워지면 이내 물통 속으로 들어가 수영을 하다가 환한 얼굴로 나온다. (나는 사실 세제가 녹아 있는 그 물에서 아이들이 헤엄치는 것이 걱정되기도 했다.) 가끔씩 셔츠 한두개를 빠는 손빨래를 하고서도 허리가 아프다고 엄살을 떠는 나로서는 그들의 고된 노동을 제대로 짐작하지 못하겠지만, 온 정신을 집중한 채 빨래를 치고 부비는 그들의 표정과 땀, 노동을 끝낸 뒤 물통에 들어가 시원하게 씻고 있는 모습, 곁에서 마냥 신이 난 아이들의 얼굴에서 정직한 노동의 힘이 묻어났다. 빡빡 때를 빼고 나온 빨래들은 작은 탈수통에 들어갔다 나온 뒤 다시 지붕 위 빨래줄에 줄줄이 널려 시원하게 휘날린다. 처음 낯선 곳에 불청객으로 들어갈 때 겁을 먹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언제나 그렇듯 결국 그런 걱정과 편견이 사람 사는 곳에서는 ‘기우’임을 확인한다.
빨래터 전경.
오전내내 온몸을 휘둘러 빨래를 한 청년이 세제가 그대로 녹아있는 빨랫물에 몸을 담구고는 목욕을 하고 있다. 문명의 잣대로 놓고 보면 비위생적이다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나 꼭 그렇게 볼 필요는 없다. 그는 자신의 노동을 통해 가족을 부양할 것이고 잠시 쉬면서 자신의 땀을 닦아내는 것일 뿐이다.
무슬림-포르투갈-영국으로 이어지는 점령자들의 족적 현재의 뭄바이는 식민통치의 유산이다. 7개의 섬으로 이루어졌지만 이제는 모두 다리로 연결돼 있는 이 도시엔 기원전부터 어부들이 살고 있었다. 6세기부터 힌두왕조들이 통치했으나 14세기에 이슬람 교도들의 침략을 받았고 1534년에는 무슬림 왕조의 술탄이 포르투갈에 현재의 뭄바이 지역을 넘겨줬다. 1661년 포르투갈 공주 캐서린이 영국의 찰스2세와 결혼할 때 신부의 지참금으로 이 섬들의 통치권은 다시 영국에 넘어갔다. 영국 정부로부터 헐값에 이 곳을 임대한 영국동인도회사는 뭄바이(당시 이름은 봄베이)를 무역항으로 개발하기 시작했고, 도시에는 거대한 빌딩숲이 들어섰다. 인도 곳곳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뭄바이는 인도인들의 독립투쟁에서도 중요한 무대가 됐다. 1885년에는 독립운동의 신호탄이 된 첫 인도국민회의가 이곳에서 열렸다. 뭄바이가 속해 있는 마하라슈트라주는 무슬림 국가인 무굴제국에 맞서 싸웠던 힌두 민족주의의 영웅인 시바지(1627~1680)와 그가 세운 마라티 왕국이 있었던 곳이다. 최근 마라티 민족주의가 강해지면서 1992년 식민지시절 봄베이였던 도시 이름을 뭄바이로 바꿨다. 뭄바이는 이 지역 어부들이 숭배하던 여신 뭄바의 이름에서 비롯된 마라티어다.
뭄바이 콜라바시장은 오래된 재래시장이다. 맨땅위에 그대로 좌판을 벌인 이들과 이곳을 찾는 이들 모두에게 삶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허름한 외형이 주는 안쓰러움이 아니라 끈끈한 숨소리가 들려오는 공간에 대한 깊이를 말함이다.
세계문화유산 엘레판타사원의 풍만한 힌두 신상들 인도 최대 재벌 타타그룹이 운영하는 호화로운 타지마할 호텔을 지나 해변가에 서 있는 ‘게이트웨이 오브 인디아’ 앞에서 배를 탔다. 취재일정이 없었던 그날, 엘레판타섬에 가보라는 누군가의 말에 거기에 뭐가 있는지도 모른 채 별 생각 없이 길을 나섰다. 1시간 넘게 꾸벅꾸벅 졸다가 배에서 내리니 ‘유네스코 문화유산 엘레판타 사원’이라는 낡은 표지판이 보인다. 시커먼 갯벌에 버려진 쓸쓸해 보이는 나무배 위로 부서지는 햇살을 지나쳐 산길을 걸어 올라갔다. 뭄바이 남동쪽 엘레판타섬에 있는 엘레판타 사원은 섬 위의 산봉우리 하나를 통째로 깎아 조성한 오래된 힌두교 사원이었다. 배를 타고 한참을 와야하기 때문인지 다른 인도 관광지들과 달리 관광객으로 붐비지 않는 사원 안엔 거대한 힌두교 신상들이 부조로 조각돼 있었다. 6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는 사원의 중심에 삼면 시바 신상이 있다. 중앙에 명상에 잠겨 있는 창조의 신 브라흐마, 오른쪽에 미소를 짓고 있는 현생의 신 비슈누, 왼쪽에 찡그린 듯한 파괴와 재생의 신 시바라고 한다. 또는 가운데 명상에 잠겨있는 브라흐마는 불변을, 오른쪽 미소를 짓고 있는 여성의 얼굴은 우주를, 왼쪽 남성의 얼굴은 우주의 파괴를 상징한다고 한다. 사람이란 외적 존재만도 아니고 내적 존재만도 아닌 둘 다이며, 이 둘을 초월한 존재라는 의미라는 해석도 있다. 이런 깊은 뜻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얼핏 하나의 존재가 다양한 모습으로 공존하는 것을 상징한 것으로 느껴졌다.
한 여성이 빨래터를 이은 낡은 건물 옥상에 올라가 세탁물을 널고 있다. 한두컷의 셔터를 눌렀지만 여성을 찍으면 안된다는 나름의 불문율이 있다길래 이내 그만 두었다.
엘레판타섬의 힌두교석굴사원 앞 숲이 터전인 한 원숭이 가족이 관광객이 준 구운 옥수수를 먹고 있다.
빨래터는 오랜 시간 동안 노인의 일터였을 것이다. 젊은 빨랫군들이 뜨거운 뙤약볕 아래 아무런 상관없이 일에 몰두 하는 사이 노인은 한구석 그늘진 곳에 자리를 잡고 익숙한 솜씨로 빨래를 했다. 그의 팔 위로 태양이 건네주는 빛이 모였다.
별 도움도 되지 않아 보이는 어린 아이는 아마도 아빠를 따라 나온듯 싶다. 어른들이 잠시 쉬는 사이 빨랫물에 몸을 적셔 더위를 달랜다. 물이 더럽지않냐고? 위생적이지 못하다고? 허허 꼭 그렇게만 볼 일은 아니다. 문명이 항상 선한 것만은 아니라는 걸 대부분 알지 않는가...^^
뭄바이/글 박민희, 사진 임종진 기자 minggu@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