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6일(현지시각) 자신에 대해 욕설을 퍼부은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돌연 취소했다. 두테르테는 5일 라오스로 출발하기에 앞서 기자들에게 “나는 미국의 꼭두각시가 아니다”라며 “(오바마가 마약과의 전쟁을 언급한다면) ‘개XX'라고 욕을 해줄 것”이라고 말해 논란을 일으켰다(오른쪽 사진). 왼쪽 사진은 5일 중국 항저우의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 후 오바마가 기자회견하는 모습. 항저우(중국)·다바오(필리핀) AFP 연합뉴스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의 욕설이 중국해의 파고를 다시 출렁이게 하고 있다.
두테르테는 5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 “개자식”이라고 욕설을 퍼붓었고, 미국은 양국 정상회담을 취소했다. 두테르테는 이날 마닐라에서 아세안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라오스로 떠나기 전에 기자들과 만나, 인권침해 논란을 빚는 자신의 마약 단속을 오바마가 거론한다면 “‘개자식’이라고 욕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오바마는 자신에게 무례하지 말아야 한다며 “만약 내게 그런다면 우리는 진흙탕에서 돼지처럼 뒹굴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어 그는 미국의 필리핀 식민지배를 거론하며 미국에 대해 ‘감정’ 섞인 강도높은 비판을 쏟아냈다.
“나는 미국의 허수아비가 아니다. 나는 주권국가의 대통령이고, 필리핀 국민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필리핀은 속국이 아니다. 우리는 오래 전에 미국 식민지에서 벗어났다. 사실, 우리는 미국으로부터 이것(민다나오 섬 내란 사태)을 물려받았다. 왜? 그들이 우리나라를 침략해서 우리를 그들의 예속민으로 만들었다.” 그는 미국이 식민지배 동안 민다나오에서 모로 무슬림들을 학살했다며, “남부가 계속 분리주의 반군들로 들끓는 이유”라고 비난했다.
그는 또 미국 경찰의 흑인 인권 침해를 거론하며 자신의 마약거래 단속을 옹호했다. “왜 범죄와의 싸움을 문제삼는가? 미국의 인권을 봐라. 그들이 이주민들을 다루는 방식을 보라.” 그는 “마약 단속은 계속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죽을 것이고, 마지막 밀매자가 거리에서 사라질 때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갈 것”이라며 인권침해 논란도 아랑곳 하지 않고 마약 밀매 근절을 위해 지금같은 무차별적 단속을 계속 할 것이라고 거침없이 말했다.
두테르테가 오바마를 향해 내뱉은 욕설은 필리핀 현지어로 ‘푸탕 이나’라는 말로, ‘매춘부의 자식’ 혹은 ‘개자식’이란 뜻이다. 두테르테는 이 말을 지난 5월 프란치스코 교황에게도 했고, 필립 골드버그 필리핀 주재 미국대사에게도 “매춘부의 게이 자식”이라는 욕설을 했다.
네드 프라이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대변인은 이날 워싱턴 백악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오바마 대통령은 (6일 예정됐던)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과의 양자 회담을 갖지 않을 것”이라며 “대신 박근혜 한국 대통령과 만난다”고 밝혔다. 오바마 대통령은 두테르테를 “기상천외한 사람”이라며 “우리가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대화를 가질 수 있는지 알아보라”고 보좌진에게 말해, 정상회담 재고를 시사하기도 했다.
파문이 커지자 두테르테는 6일 라오스 비엔티안에 도착해 유감을 표명하는 등 꼬리를 내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대변인이 대독한 성명을 통해 “기자의 특정한 질문에 대한 ‘강한 언급들’이 우려와 고통을 유발했다. 미국 대통령에 대한 개인적 공격으로 이해된 것에 유감이다”라고 완곡한 어조로 말했다. 두테르테가 취임 이후 처음 유감을 표명한 것이지만, 사과라 보긴 힘든 표현이다.
그의 험담은 갑자기 튀어나온 게 아니라, 오랫동안 새겨진 깊은 반미인식을 드러낸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이 ‘아시아로의 회귀’ 정책 표명 이후 아시아태평양 정책에서 핵심 동맹으로 떠오른 필리핀과의 관계가 크게 흔들릴 것으로 보인다. 두테르테는 베그니노 아키노 전임 대통령 정부가 체결한 미국과의 방위협력확대협정(EDCA) 등 양국의 군사접근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는 선거 기간 중 자신을 비난한 미국 대사를 놓고 “당선되면 미국과 단교하겠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또 당선 뒤 필리핀이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로 제소한 헤이그 국제상설중재재판소에서 승소판결이 나오자, “영유권 문제가 아니라 배타적 경제수역 문제”라며 중국과의 양자협상을 벌이는 등 오히려 대중 관계개선에 나섰다.
두테르테의 미국 때리기는 필리핀의 전통적 과두 지배집단인 올리가키와의 권력투쟁 일환이기도 하다. 필리핀 최대민족이지만, 비주류인 비사야 족 출신인 두테르테는 필리핀을 장악해온 루손 출신의 중국계 등으로 구성된 친미적인 명문 부호가문들의 권력을 약화시키려고, 범죄와의 전쟁 등을 통해 권력기관 장악을 시도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은 두테르테의 이런 입장을 이전부터 우려했다. 필리핀은 미국이 현재 중국과의 대결에서 고리로 삼는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 등 미국의 대중 봉쇄에서 지정학적으로 핵심 역할을 한다. 미국은 필리핀에 1980년대 말까지 해외 군사기지 중 최대 규모인 수빅 해군기지와 클라크 공군기지를 운영했다. 이 기지들은 필리핀이 1987년 피플스파워 혁명으로 마르코스 독재정권을 타도한 뒤 필리핀의 요구로 철수됐다. 미국은 필리핀 기지 철수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핵심 기지를 미국령인 괌으로 후퇴시켰다. 2010년대 이후 미국은 중국과의 대결이 본격화되자, 지난 2014년 필리핀과 방위협력확대협정(EDCA)을 맺고, 미군의 필리핀에서 군사기지 접근권과 이용권을 다시 허용받았다. 미국은 이를 기반으로 대중 봉쇄망을 중국 대륙에 다시 근접시키는 중이었는데, ‘두테르테’라는 거대한 암초를 만난 셈이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