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첨밀밀>은 단순한 사랑 이야기를 뛰어넘어 당시 홍콩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사료이기도 하다. 당시 영화사에서 제공한 포스터로 추정된다. 주인공인 두명의 중국인 이주노동자들은 홍콩이라는 사회에 정착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한다. 그 와중에 홍콩의 주식 붐, 영어 열풍, 이주노동자들의 열악했던 삶, 그리고 무엇보다 1990년대 홍콩의 거리풍경이 끊임없이 펼쳐진다.
1984년 영·중 공동선언, 혹은 홍콩 반환 협정이라 하는 조약이 맺어졌다. 1842년 이래 영국 땅이었던 홍콩섬과 카오룽반도, 그리고 1898년 이래 99년간 조차지였던 신계 지역이 1997년 7월1일을 기해 중국에 반환된다는 뉴스가 타전됐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 소식을 〈한겨레〉를 통해 읽진 못했다. <한겨레〉는 이 사건으로부터 4년 뒤인 1988년 창간되었기 때문이다. 창간 이듬해인 1989년부터 이번 시간의극장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한겨레〉 아카이브에서 홍콩에 대한 한국인의 기억을 살펴봤다. 해설 전명윤
천안문 사건서 예고된 홍콩 미래
국가보안법이 통과되었다
‘우리들의 홍콩’은 사라졌다
‘첨밀밀’로 기억되던 그 카페
영화 속 어긋난 사랑처럼
홍콩-대륙인 융화되지 못해
영화 <첨밀밀> 이야기로 시작해보자. 지금이야 홍콩 자본이 중국에서 푼돈이 되었지만, 1989년만 해도 광둥성 제조업의 기반은 홍콩 자본 그리고 홍콩을 경유하는 화교 자본이었다. 중국이 홍콩과 인접한 선전, 마카오와 인접한 주하이를 경제특구로 지정한 이유도 홍콩과 마카오의 제조업 기반을 임금이 싼 선전과 주하이로 돌리고자 함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강세를 보였던 홍콩의 제조업은 1980년대 후반부터 광둥성으로 옮겨가기 시작한다. 1990년대 후반 홍콩 내 제조업은 명맥만 유지하는 수준이 된다. 이로 인해 홍콩의 산업은 금융서비스업으로 재편된다. 광둥성엔 일거리가 넘쳐났다. 많은 중국인이 광둥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이 시기 광둥성 사람들에게도 친지 방문 등의 이유로 홍콩행 기차를 탈 수 있는 길이 열린다.
타지의 중국인이 광둥성으로 몰리는 동안 광둥성의 중국인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홍콩으로 갈 방법을 찾았다. 1996년작인 영화 <첨밀밀>은 1980년대 말 기차를 타고 홍콩으로 온 광둥 출신 이방인이 낯선 홍콩에 적응해가며, 이런저런 이유로 어긋나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중국의 대도시에 얼마나 많은 이주노동자가 있는지 알기 위해선 명절 기간 기차역에 가보면 된다. 중국의 호적제는 도시 거주민과 농촌 거주민을 구분하는데, 도시 호적이 없는 이주노동자들은 도시가 제공하는 복지 혜택을 받지 못한다. 중국 경제 발전의 역군이지만, 사회적 대우는 형편없다. 당시 〈한겨레21〉 지면 이미지다.
1984년 홍콩 반환이 결정되고 홍콩 사회는 크게 술렁였다. 일시적으로 홍콩의 주식 지표인 항셍지수가 폭락하고, 슈퍼마켓의 물건이 동이나는 혼란이 벌어졌다. 홍콩을 떠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절대다수는 일단 상황을 관망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러던 중 중국에서 끔찍한 뉴스가 날아들었다.
1989년 4월 후야오방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베이징 천안문광장에 학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저 추모집회로 시작된 이 사태는 그해 6월4일 벌어졌다. 인민해방군이 그들이 지켜야 할 인민의 가슴에 방아쇠를 당기며 마침표를 찍었다. 1980년 광주의 기억이 있는 한국인들에게 계엄군의 총격으로 무고한 시민이 죽었다는 기사는 충격적이었다. 바로 전해 광주 청문회로 전국이 들끓던 중이었다.
학살 다음날인 6월5일 월요일, 〈한겨레〉는 국제 이슈로는 드물게 2면짜리 ‘호외’를 냈다. ‘중국계엄군 발포 5백명 사망’이라는 검은색 제호가 헤드라인을 장식했고, ‘호메이니 사망’ 기사를 제외하고는 1면 전체가 천안문 관련 내용이었다. 1989년 7월1일부로 중국의 일부가 되어야 하는 홍콩 시민들에게도 이 사건은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5월23일 〈한겨레〉를 보면 ‘홍콩, 중국시위 지지 1백만명 8시간’이라는 짧은 기사가 나온다. 학살 열흘 전 홍콩 시민들도 베이징의 시위대를 지지하기 위해 모였다. 앞으로 8년 뒤면 중국의 일부가 되어야 하는 홍콩 시민들에게 천안문 사태는 홍콩 자신의 일이기도 했다. 5월23일에 모인 1백만명의 인파는 홍콩의 절박함 그 자체였다. 그리고 이 절박함은 계속 표출된다.
천안문 시위 기간에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베이징 방문이 겹쳐 있었다. 시위대는 고르바초프의 베이징 방문을 지렛대로 중국 정부와 협상에 우위를 점하려 했지만 실패하고야 만다. 덩샤오핑은 이 사건을 계기로 강경 진압의 생각을 굳히게 된다. 〈한겨레〉는 호외까지 제작했다.
홍콩이 삶의 터전인 홍콩인들은 1989년 이후 극도의 불안감에 휩싸였지만, 한국인에게 홍콩은 관광지이기도 했다. 홍콩에서 비행기로 세 시간 반 거리에 있는 한국에서는 그해 해외여행이 전면 자유화됐다. 자유화 첫해인 1989년 해외여행객 100만명을 돌파하더니, 1992년 200만명, 2000년 500만명, 2005년 1000만명으로 해외여행객 수가 급성장했다. 해외여행 초창기에야 “나 홍콩 가봤어!”라는 말에도 “우와!”라는 감탄사가 나왔으나, 해외여행객이 많아지면서 “거기 가봤다” 정도로는 대화 상대가 되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
1996년 10월, 〈한겨레21〉은 ‘음식천국, 홍콩의 유혹 홍콩은 아시아요리의 심장부’라는 특집 기사를 냈다. 기사에서는 홍콩이야말로 가장 짧은 시간에 중국 전역의 요리를 모두 맛볼 수 있는 집합소라고 묘사했는데, 이 기사는 지금 봐도 부족함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중국 요리의 특징, 중국요리 테이블 매너를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기사는 시대를 반영한다. 이즈음부터 한국인의 홍콩 여행이 단순 방문이 아닌 체험 여행이 된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 수 있다.
고 장국영의 단골 식당이었던 예만방은 고급 딤섬과 완탕면 같은 홍콩 분식을 영업시간 내내 내는 집이다. 식당 안 방명록에는 장국영의 친필 사인이 있어 장국영 팬에게는 성지순례의 무대이기도 하다. 오랜 기간 여행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예만방은 2020년 코로나 사태를 이기지 못하고 폐업했다. 장국영의 친필 사인도 역사가 되어버렸다. 박미향 기자가 찍은 사진이다.
기사는 시대를 반영한다. 홍콩 미식은 이제 체험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1996년 10월31일자 〈한겨레21〉의 음식 기사 지면을 공개한다. 김보근 기자가 찍었다.
홍콩 반환의 해인 1997년 〈한겨레〉는 어느 때보다 많은 홍콩 관련 기사를 쏟아냈다. 홍콩에서 벌어지는 일 하나하나가 뉴스거리였다. 중국군이 홍콩에 진주를 할지 말지, 1995년 마지막 영국인 총독 패튼의 선거개혁안으로 만들어진 법을 중국이 인정할지 폐기할지, 무엇보다 홍콩의 미래는 어찌 될지.
홍콩 반환은 제국주의 구질서의 붕괴라는 관점에서는 환영할 일이었지만, 홍콩 시민들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무작정 역사의 순리라고 주장하기도 어려워 보였다. 1997년 6월27일, 홍콩 반환을 사흘 앞두고 〈한겨레〉는 ‘반환, 불안, 그리고 희망’과 ‘우리들의 홍콩 이소룡부터 왕가위까지 꿈의 공장’이라는 기사에서 다소 우울한 전망을 내비친다. ‘우리들의 홍콩’이라는 여섯자의 소제목 아래 ‘류더화가 아닌 유덕화이고, 초우엔팟이 아닌 주윤발’임을 선언하는 기사의 시작은 비장하다. 2020년 현재, 중국인이 아니라 홍콩인이라는 정체성을 지닌 홍콩의 스타들이 광둥어(캔토니즈)도 아닌 중국 표준어 발음 이름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이 기사는 지금 더 비장하게 느껴진다.
화려한 불꽃놀이로 수놓았지만 반환 당일 홍콩 사람들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불꽃놀이를 보는 사람들은 역사적인 밤을 맞이하려는 외국인 관광객이 대다수였다. 홍콩의 민주 세력들은 홍콩 반환식이 열리는 컨벤션센터 주변에서 천안문 학살의 진실과 홍콩 이양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곽윤섭 기자의 사진이다.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는 홍콩”이라 쓰인 선전역의 전광판에는 홍콩 반환까지 남은 날짜가 쓰여 있다. 1996년 7월 이혜정 기자가 찍었다.
반환 이후 홍콩과 대륙의 갈등은 계속 이어진다. 1997년 홍콩 반환 직후 홍콩은 밀려오는 중국인 이주자들로 인해 골머리를 앓게 된다. 1940년대 말의 이민과 다른 점이라면, 그때는 상하이 등지의 부유층 이민이 주를 이뤘는데 이번 이민 열풍은 일반 노동자들이 대거 밀려들었다는 점이다.
1999년 5월 〈한겨레〉는 ‘본토인 밀물 홍콩 비상/ 법원 이민판결따라 10년간 170만명 이주예상’이라는 기사를 낸다. 이 기사에 따르면 2007년까지 본토인 170만명가량이 홍콩으로 이주할 것으로 보인다는 홍콩 정부의 예측과 함께, 이들을 위한 기초적인 주택, 의료, 교육 인프라에만 900억달러의 돈이 추가로 투입돼야 한다는 우려가 나온다. 참고로 그전까지 홍콩은 중국인의 홍콩 거주권에 대한 수많은 제약을 뒀지만 이 제약은 곧 사라진다. 1999년 1월 홍콩 법원이 ‘부, 모 중 한쪽만 홍콩 거주권자면 그 부모의 자녀에게도 홍콩 거주권이 제공된다’고 판결하기 때문이다.
기존 홍콩 주민들과 중국 이주민 사이의 첫번째 갈등이 표면으로 분출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홍콩 사회에 반중국 정서가 다시 팽배해질 조짐을 보이자,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가 나서 홍콩 종심법원의 판결을 무효화시키며 ‘중국 본토인 홍콩 거주 권리 없다'는 결정을 내린다.
그러자 이번에는 홍콩 거주권을 무난히 얻을 것으로 안심했던 중국계 이주노동자들이 불만을 토로했다. 이 갈등은 결국 비극으로 끝을 맺는다. 2001년 8월 거주권을 요구해온 중국인들이 홍콩 출입국사무소에 불을 질렀다. 이날 방화로 7명이 중태에 빠졌고 며칠 후 중국인 이주노동자 한명과 홍콩 관료 한명이 사망하게 된다. 이 사건은 홍콩 시민과 중국 이주민 사이에 회복하기 어려운 첫번째 감정의 골을 만든다.
만약 중국의 전인대가 홍콩 종심법원의 판결을 뒤엎지 않았다면 이들은 불법 체류자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홍콩 반환 과정에서 홍콩인은 철저하게 배제된 채, 영국과 중국에 의해 그들의 운명이 결정됐다. 홍콩인은 자결권이 없었기에 분노했고, 중국인 노동자는 그저 이제부터 홍콩도 중국이라 해서 갔을 뿐이다. 세상의 부조리는 항상 가해자와 피해자가 철저하게 분리된 채 이뤄지고, 피해자들은 서로 싸우기에 급급하다. 2000년 8월4일 〈한겨레〉 지면.
홍콩과 대륙의 감정 골은 이어지고 깊어진다. 2003년 홍콩 영화계의 두 라이벌, 성룡과 주윤발 사이의 경쟁 관계를 보여주는 사건이 발생했다. 〈한겨레〉 2003년 7월3일자를 보자. ‘홍콩 배우 주윤발 ‘대기만성’ 삶 /홍콩 중학교 중국어 교재 실려’ 제목의 기사다. 홍콩 교과서에 연예인의 일대기가 실린 건 이때가 처음이다.
교과서에는 노점상 홀어머니와 살며 불량 학생으로 성장한 주윤발의 학창 시절과 연기자로 성공한 이후 할리우드에 진출하고 만학도가 돼 영어를 공부하는 그의 이야기가 감동적으로 실려 있다. 당시 주윤발이 교과서에 실린 일은 한국 언론에는 단신으로 소개됐다. 하지만 2014년 우산혁명 당시 학생 시위대를 지지한 주윤발과 시위대를 비난한 성룡의 태도가 엇갈리며, 주윤발은 과연 교과서에 실릴 만한 인물이었다고 새삼스럽게 소환돼 회자되는 중이다.
우산혁명 당시, 학생 시위대 지지를 선언한 그에게 중국에서의 출연이 끊어질 걸 우려하자 “그러면 돈 좀 그만 벌면 되지”라고 응수했다는 그의 이야기는 그가 왜 큰형을 뜻하는 ‘따거’(大哥)로 불리는지 알게해주는 대표적인 일화다.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사람이 그 말로 인해 어떤 불이익을 받는다면 그 사회는 나쁜 사회다. 최성열 기자 사진이다.
갈등은 이어졌다. 중국과 홍콩 사이에 첫번째 ‘대회전’이 벌어졌다. 50만명의 홍콩 시민이 거리로 나섰다. 2003년 7월4일 〈한겨레〉 보도 제목은 ‘언론, 홍콩 50만 시위 모르쇠’. 갈등의 원인은 홍콩의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홍콩 기본법 23조 조항을 홍콩 행정부가 개악하려 했기 때문이다. 홍콩 기본법 23조는 국가 안보에 관한 광범위한 금지 사항과 이에 대한 처벌이 명시된 항목을 갖고 있다. 문제는 이 개악된 조항에 ‘선동의 금지’ 같은 정부가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았다는 점이다.
결국 홍콩 반환 기념일인 2003년 7월1일을 기해 홍콩 반환 이후 최대 시위가 벌어졌다. 홍콩 시민들의 강력한 저항에 중국 정부는 깜짝 놀라 홍콩 기본법 23조의 개정을 없던 일로 되돌리게 된다. 재밌는 것은, 마카오도 같은 시기 마카오 기본법 23조의 개정을 추진했는데, 강력한 저항으로 철회된 홍콩과 달리 별다른 반대 없이 무사 통과. 중국의 지배에 대처하는 홍콩과 마카오의 입장은 이때부터 갈리기 시작한다.
〈한겨레〉 2003년 7월11일 치 7면 이미지. 애드미럴티에서 중국은행 본사로 가는 굽은 길에 시위 인파가 가득하다. 시민들이 들고 있는 손팻말에는 “둥젠화(홍콩 행정장관)는 필요 없다”라고 적혀 있다. 이때만 해도, 이때의 승리가 최소 2047년까지는 이어질 줄 알았다.
홍콩인들에게 한국인은 어떤 이미지일까? 여러 이미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전투적인 시위’도 있다. 나는 직업상 2008년 이후 매년 수차례 홍콩을 가곤 했다. 홍콩인들은 2005년 12월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 무산을 위해 홍콩으로 원정시위 온 한국 시위대에 대한 이야기를 내게 여러 번 했다. 그만큼 인상이 강렬했단 말이다. 1400명이 넘는 단일 국적의 외국인 시위대 자체도 홍콩인들에게는 낯설었지만, 그간 티브이를 통해 보던 전투적인 한국의 시위 방식에 대한 걱정도 많았다. 하지만 시위대가 초반에 벌인 삼보일배 시위는 홍콩인들에게 그간의 전투적 한국 시위의 이미지를 바꾸었다. 중국 언론 〈밍바오〉(明报)의 긴급 여론조사에도 홍콩 시민의 60%가 삼보일배 시위에 긍정적으로 답했을 정도.
이런 우호적인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결국 17일 저녁 시위대는 경찰 저지선을 돌파하려고 했고, 홍콩 경찰은 한국 시위대가 경험 못 해본 고무탄총을 들이댔다. 결국 양측은 대규모로 충돌했고, 한국 시위대만 700명이 연행되고 11명이 구속되기에 이른다. 급기야 당시 드라마 <대장금>으로 홍콩에서 인기를 누리던 이영애를 비롯해 안성기, 이병헌씨까지 홍콩 정부에 선처를 당부하는 탄원서를 쓰기에 이른다. 구속된 사람들은 해를 넘겨 1월13일 석방된다. 어쨌든 한국의 시위문화가 이후 오랫동안 홍콩인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시위가 벌어지던 록하트 로드에 가서 홍콩인 가게 주인에게 그때 이야기를 물으면 빙긋이 웃으며 “꽁이싸이무”(抗議世貿)라는 말을 알려준다. 세계 무역기구 반대라는 뜻의 홍콩말로 당시의 구호였다고. 당시 〈한겨레〉 장철규 기자가 찍은 한국 시위대의 연행 장면 비컷 사진을 처음으로 공개한다.
만약 이 글을 보는 독자 중에 후일 홍콩에 갈 일이 있다면, 주말마다 홍콩섬의 주요 거점을 점령하고 있는 동남아계 여성 노동자 군중에 주목해주시라. 홍콩 노동법상은 주말 근무를 금지하고 있는데, 이런 경우 비좁은 집에서 집주인과 가사노동자가 같이 머물기도 어정쩡해지는 상황이라 가사노동자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집 밖에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 낮선 풍경은 상황을 조금만 이해해도 좀더 잘 보이기 마련이다. 1996년 7월 이혜정 기자가 촬영한 홍콩의 필리핀 출신 가사노동자 모습.
다시 홍콩과 대륙의 갈등. 2012년 1월의 〈한겨레〉 기사를 보면 지하철에서 음식을 먹은 중국인과 이를 지적하는 홍콩인 사이에 벌어진 감정싸움을 상세히 보도하고 있다. 이게 기사까지 쓸 내용인가 싶을 수 있지만, 당시 홍콩-중국인 간의 감정싸움을 보면 그럴 만했다.
홍콩인들은 중국인들이 유입되며 작게는 거리 질서, 보따리상으로 인한 생필품 품귀, 크게는 부동산값 폭등으로 인한 주거비 인상까지 온갖 고초를 겪고 있었고, 반대로 대륙에서 온 중국인은 자신들을 멸시하는 홍콩인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런 류의 사건은 꾸준히 이어졌는데, 2014년에는 홍콩을 찾은 중국인 부부가 화장실을 찾지 못하자 아이를 대로변에서 노상방뇨시키며 다시 한번 불이 붙었다.
경제적으로 부유하지만 피지배자 정서가 있는 홍콩인의 감정과, 대륙에서는 용인 가능했던 행동 하나하나를 홍콩인이 꼬투리 잡는다고 느끼는 대륙인의 서운함은 홍콩과 중국 관계, 그리고 홍콩인 사이의 출신지에 따른 갈등을 계속 증폭시켰다.
갈등의 파국은 2019년 송환법 시위 도중에도 곳곳에서 목격됐다. 친중파라 불리는 일련의 시민들이 시위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홍콩 경찰의 수사는 지지부진하다. 그러니 루머는 더욱더 들끓는다. 시위대는 이들의 배후에 중국 정부 혹은 삼합회가 있다고 믿는다. 당시 〈한겨레〉는 누군가 홍콩 시위대를 공격하는 유튜브 영상 화면을 기사로 소개했다.
2014년, 홍콩인의 대륙에 대한 분노는 행정장관을 직선제로 선출하고 싶다는 지극히 기본적인 요구를 중국이 거부하면서 분출되기 시작했다. 중국 정부는 홍콩 시민들의 요구에 ‘후보 선정 위원회가 애국적인 인사 2~3명을 골라줄 테니, 그중에서 투표해서 뽑으라’라는 식으로 대했다. 홍콩인들은 ‘우리는 우리의 대표를 뽑고 싶을 뿐이지, 쇼 프로에서 1등을 뽑는 게 아니’라며 격렬히 반발했다. 홍콩 경찰은 대중들의 분노에 최루탄으로 답했고, 맨몸의 시위대는 최루탄을 우산으로 막았다. ‘우산혁명’이라는 조어는 이런 풍경 속에서 등장했다.
시민들은 2003년 국가안전법 사태와 2012년 국민교육 사태를 떠올리며 이번에도 뭉치면 이기리라 생각했지만, 중국도 이번만큼은 체제 수호의 문제라 여겼기 때문에 물러서지 않았다.
2016년 홍콩의 영화상인 ‘금상장’은 영화 <10년>을 최우수상으로 선정했다. 2016년으로부터 딱 10년 후인 2026년의 홍콩을 그린 이 영화는 홍콩의 미래를 바라보는 홍콩인의 우울함 총집합 같다.
영화 속에서 국가보안법을 무난히 통과시키기 위해 암살을 기획하고, 중국 표준어를 사용하지 못하는 택시기사가 고난을 겪으며, 홍콩산이라는 말이 금기어가 된 세상이 펼쳐진다. 당시에는 과격한 상상이라는 느낌을 주었을지 모르지만, 2020년 홍콩 의회를 건너뛰고 중국 전인대가 국가보안법을 통과시킨 현실을 보면 4년 전의 영화적 상상력도 이런 현실까지는 생각지 못했고, 삼권분립 같은 단어가 교과서에서 삭제되는 현실을 보면 오히려 영화 속 택시기사의 고충 또한 ‘그 정도면 나쁘지 않은 거 아닌가’라고 생각하게 만들 정도다. 영화 <10년>이 개봉되었을 때 “아무리 그래도 지나치다”라고 말했던 사람이 물정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우리의 ‘따거’ 주윤발조차 침묵하는 시대다. 〈한겨레〉는 1997년 6월27일 홍콩 반환을 사흘 앞두고 ‘우리들의 홍콩’이라는 표제의 기사를 냈다. 그 기사 제목처럼 나도 묻는다. 우리들의 홍콩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2014년 우산혁명 당시만 해도 고글은 시위대의 표준 장비가 아니었다. 김성광 기자가 2014년 찍은 이 사진은 마치 2019년 송환법 시위대의 모습과도 같다. 멀리 보이는 건물은 홍콩 정부청사. 저 안에 우리의 국회 격인 입법회도 있다. 홍콩의 공방전은 늘 이 일대에서 벌어진다.
▶ 해설자 전명윤 작가는 여행작가입니다. 자료조사 하고, 걷고, 사진 찍고 먹는 게 직업입니다. 인도, 홍콩, 오키나와, 베이징과 상하이를 주 무대로 삼아 다람쥐 챗바퀴 돌 듯 이 지역만 훑고 다닙니다. 〈환타지 없는 여행〉 등 지금까지 여행안내서 7권과 에세이 2권을 냈으며, 홍콩 민주화운동을 쫓아가는 책 〈Remember/홍콩〉을 쓰고 있습니다.
▶ 팩트스토리는 전문직·실화 소재의 웹소설, 웹툰 및 르포논픽션 기획사입니다. 저널리즘 바깥으로 확장하는 실화를 추구합니다.
〈한겨레〉가 지령 1만호를 맞아 ‘시간의 극장–한겨레 아카이브 프로젝트’를 선보입니다. 33년 기사와 사진 아카이브를 활용하여, 중요 사건과 인물을 현대사 콘텐츠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입니다. 해당 주제를 잘 아는 해설자가 ‘시의성 있는 과거’와 관련한 한겨레 사진과 기사를 선정하고 독자에게 해설합니다. 한번도 소개된 적 없는 비컷(B-cut)사진 필름도 발굴하여 공개합니다. 르포, 전문직 소재 웹소설 기획사 팩트스토리가 기획하고 한겨레와 공동으로 제작합니다. 주간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