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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중국

어제의 ‘인민영웅’ 오늘은 ‘조롱거리’

등록 2006-11-12 17:14수정 2006-11-12 17:48

문혁 당시 농촌으로 해방된 이들이 단체로 마오어록을 읽고 있는 모습. 이처럼 국민의 영웅이었던 마오에 대한 중국 대중들의 의식이 달라지고 있다. 연합뉴스
문혁 당시 농촌으로 해방된 이들이 단체로 마오어록을 읽고 있는 모습. 이처럼 국민의 영웅이었던 마오에 대한 중국 대중들의 의식이 달라지고 있다. 연합뉴스
레이펑·마오쩌둥 등 인터넷 패러디 유행
얼굴새긴 콘돔상자까지…대중 의식균열

레이펑(뢰봉)은 중국 사람들에게 가장 살가운 영웅이다. 인민해방군에 투신해 평생을 이웃에 봉사한 그는 중국 공산주의의 이상형으로 추앙받고 있다. 물로 배를 채우며 한푼두푼 모은 돈을 수재민들에게 보냈다거나, 몸이 아파 병원에 가던 도중 공사장에서 일손이 달리는 것을 보고 벽돌을 함께 날랐다는 일화는 지금도 회자한다. 그가 22살의 젊은 나이에 교통사고로 숨지자 마오쩌둥 주석은 친히 “레이펑을 따라 배우자”는 붓글씨를 바쳤다.

마오쩌둥, 레이펑 얼굴을 새긴 콘돔상자
마오쩌둥, 레이펑 얼굴을 새긴 콘돔상자
그런 그가 요즘 인터넷에선 ‘바보’가 됐다. “레이펑이 숨진 것은 사람들을 너무 돕다가 진이 빠졌기 때문이다”는 식의 레이펑 패러디가 한창이다. 그 속에서 그의 전설 같은 의협심과 선행은 어리석고 부질없는 기행으로 둔갑한다. 물로 배를 채운 것은 “밥보다 물을 좋아한 그의 괴상한 건강관리법”일 뿐이다. 마오쩌둥의 교시에 따라 학교와 직장, 군대에서 밤마다 레이펑 학습 열풍이 불었던 때가 무색하다.

레이펑만 당하는 게 아니다. 혁명과 전쟁의 와중에서 자기를 희생해 당과 인민을 구한 공로로 후대의 칭송을 받아온 중국의 인민영웅들이 도매금으로 패러디의 놀림감이 되고 있다. 누리꾼들의 손 끝을 타고 바이러스처럼 번져가는 이들 삐딱한 패러디는 마오쩌둥의 얼굴까지 콘돔상자에 새길 정도로 기세등등하다. 중국 공산주의의 권위를 상징하는 이들의 신화는 온데간데없다.

“황지광은 전쟁터에서 뛰어가다 넘어지는 바람에 얼떨결에 미군의 총구멍을 막았다.” 한국전쟁 때 미군 토치카의 총구멍을 몸으로 틀어막아 전우를 지킨 전쟁영웅 황지광은 어처구니 없는 실수로 목숨을 잃은 덜 떨어진 군인으로 묘사된다. 항일투쟁 당시 다리를 폭파시키려다 폭약을 받칠 데가 없자 손으로 폭약을 든 채 도화선에 불을 붙인 동춘레이는 “폭약을 묶은 테이프에 손이 들러붙어 몸을 피하지 못한 재수없는 군인”으로 전락했다.

꼬마영웅 판둥즈의 얘기를 다룬 영화 <빛나는 붉은별>을 노래자랑 출전기로 패러디한 화면. 영화 속 장면을 그대로 쓰면서 ‘아버지는 민족창법으로 하면 춘절 만회의 무대에 오를 수 있다고 하셨다’는 자막을 넣었다.
꼬마영웅 판둥즈의 얘기를 다룬 영화 <빛나는 붉은별>을 노래자랑 출전기로 패러디한 화면. 영화 속 장면을 그대로 쓰면서 ‘아버지는 민족창법으로 하면 춘절 만회의 무대에 오를 수 있다고 하셨다’는 자막을 넣었다.
영웅 깎아내리기 패러디는 최근 플래시로까지 발전했다. 어린 나이에 지주와 맞서 싸운 공로로 홍군이 된 판동즈의 얘기를 다룬 영화 <반짝이는 붉은 별>은 시골뜨기 꼬마의 노래자랑 플래시로 바뀌어 인터넷을 떠돈다. 영화 속 장면을 그대로 쓰면서 밑에 엉뚱한 자막을 넣은 이 플래시에서 판동즈는 하루 종일 스타가 되기를 꿈꾸는 철부지로 등장한다. 그가 철두철미하게 미워했던 지주는 그의 노래를 심사하는 채점관으로 출연한다. 계급적 적대관계가 이상하게 뒤집힌 것이다.

중국에서 영웅들의 얘기는 흔히 ‘홍색경전’(紅色經典)으로 불린다. 후세들에게 지금의 평화와 여유가 피로 얻어진 것임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영웅을 조롱하고, 모독하는 요즘 패러디는 이 홍색경전의 약발이 우수수 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중국의 개혁개방이 대중들의 의식에 균열을 일으키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중국 정부는 최근 이들 패러디가 공산주의 영웅들의 위엄을 훼손하고 있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얼마 뒤 저장성 닝보시 공상국은 마오쩌둥 주석의 얼굴을 새긴 콘돔상자를 판매한 사업자에게 가게를 폐쇄하고, 물건을 모두 거둬들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영웅들을 비트는 패러디는 지금도 인터넷을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베이징/유강문 특파원 m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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