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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중국

[특파원 칼럼] 베이징 구보씨의 하루 / 김외현

등록 2017-04-06 18:38수정 2017-04-06 22:55

김외현
베이징 특파원

아내는 남편이 구두 신는 소리를 들었다. “조심해요.”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일찍 오세요.” 역시 대답이 없었다. 요즘 들어 남편의 외출은 아내에게 온갖 종류의 걱정거리였다.

구보는 집을 나와 베이징 왕징역으로 가며 아내에게 대답하지 않은 것을 뉘우친다. 하기야 현관문을 닫으며 “응, 알았어” 소리를 목구멍까지 내어보았으나, 마침 문 앞에 중국 남자 셋이 웃고 떠들며 지나갔다. 봉변의 공포. 요즘 베이징 바닥에서 큰 소리로 한국말을 내뱉는 게 어디 쉽던가.

지하철에 탔다. 구보는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들여다봤다. 얼마 전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중국한테 패한 뒤 뉴스도 흥이 없다. 우리가 승리했다면 중국인들의 분노로 공포감은 가중됐겠으나 자존심은 남았을 것이었다. 이제 중국에 뭘 이길 수 있는가.

한숨을 쉬며 머리를 들었을 때, 구보는 주변 승객들이 충분히 자기 화면을 들여다볼 위치에 있음을 느꼈다. 중국인들과 시선이 마주칠까 긴장하며, 신랑이며 바이두며 평소 잘 보지도 않던 중국 뉴스 앱을 허둥지둥 누른다. 한글 화면을 띄우는 사람이란 남의 눈에 띄기 쉽다. 승객들은 분명히 나를 보았고, 나를 한국인으로 알았을 게다. 북한 사람인 척할까. 열차가 다음 정거장에 서자마자 구보는 냅다 튀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드니 후배가 다니는 엔터테인먼트 회사가 있는 곳이었다. 불과 1년 전 이 회사의 드라마가 중국에서 엄청 인기를 얻어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갔던 이였지만 ‘한한령’ 이후 몇달째 일감이 없어 놀고 있다고 전해들었다. 후배를 불러내니, 회사는 꾸준히 직원들을 정리했고 그도 곧 한국에 가서 새 일자리를 구한다고 했다. 그는 “지난 4~5년이 우리가 중국에 큰 영향을 주었던 유일한 시기 아니었을까요. 그때를 여기서 보냈으니 저는 운이 좋았죠”라며 작별했다.

문득 한국대사관 직원이 구보의 시야에 들어왔다. 구보가 “요즘 일하기 힘드시죠” 하니, 그는 “이곳의 우리 기업들은 한국이 결코 대국에 굴하지 않는 강소국이라는 강인한 이미지가 필요하다면서, 정부가 담담하게 대응해달라고 건의합니다”라고 했다. 구보가 의아해서 “중국의 우리 기업인들이 모두 사드 배치에 찬성하나 보죠?” 물으니, 그는 옆에 선 부하를 갑자기 툭 치며 “어이, 그런가?” 하고 묻는다. 부하는 굳은 표정으로 “그렇습니다”라고 했다. 구보는 두 외교관을 보고 웃음을 지으며 “오늘 행복을 비오” 하고 제 길을 걸었다. 아, 공허하고 또 암담한 사상이여.

큰길에서 택시를 불렀으나 100m 앞에서 누군가 잡아탔다. 낭패인가 싶더니, 그 택시가 구보 앞에 서고, 낯익은 이가 얼굴이 벌게져서 내렸다. 특파원으로 와 있는 신문기자였다. “한국 사람이냐길래 그렇다고 했더니 내리라잖아. 에잇!” 그는 발 앞의 돌멩이를 힘껏 찼다. 돌은 날아가 길가에 주차된 현대차에 힘없이 부딪쳤다. 이것은 불행인가 다행인가. 2012년 험악하던 시절 일본차였다면 뭇사람이 달려들어 다함께 때려부쉈을 것이다. 지금 중국인들은 ‘동포의 재산’이라며 그런 짓은 않는다. 기자와 구보는 황급히 자리를 떴다.

새벽 1시의 왕징. 여행업계에서 일하는 선배가 취해 비틀대고 있었다. “구보, 나는 오늘도 중국 업체들한테 가서 제발 좀 팔아달라고 굽신거렸네.” “그래 봤자 안 되는 것 아시면서 그러세요?” “그렇다고 손놓고 있을까. 빌기라도 해야지.” 선배는 며칠 전 인터넷에서 ‘호신용’이라며 구보와 함께 구매한, 중국어로 ‘사드 반대’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구보는 빠른 걸음으로 집을 향한다. 어쩌면 이젠 아내가 굳이 조심하라 하지 않아도 스스로 외출을 자제할지도 모른다.

osca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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