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이본영 | 워싱턴 특파원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는 카를 마르크스의 표현은 주어만 바꿔 자주 활용된다. 지금은 도널드 트럼프라는 유령이 세계를 떠돈다고 하면 딱 맞을 때다. 워싱턴의 엘리트들은 물론 각국 정부도 그의 백악관 재입성 가능성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집권 1기 때 한 일과 지금의 언동을 보면 충분히 그럴 만하다.
트럼프에 대한 공포로 가장 큰 반사이익을 보는 사람은 조 바이든 대통령이다. 바이든은 트럼프의 대선 출마를 자신이 또 나서야 하는 주요 명분으로 내세울 정도다.
그런데 바이든의 집권기를 냉정히 따져보자. 도처에서 갈등이 커지고 전쟁이 터졌다. 해결된 건 왜 이렇게 찾기 어려운지 신기할 정도다. 그가 이끄는 미국은 도자기 상점에 들어간 코끼리처럼 움직일 때마다 무언가를 망치기 일쑤다. 최악은 가자지구 전쟁이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하기 8일 전에 “중동 지역은 지난 20년간의 어느 때보다 조용하다”고 했다. 오래도록 비웃음을 살 말이다.
여러 분쟁은 당사자들에게 일차적 책임이 있다. 하지만 바이든 행정부는 사태의 조건 마련, 악화, 장기화에 기여하고 있다. 미국은 중동 문제를 한방에 해결하겠다며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의 관계 정상화를 밀어붙였다. 이게 하마스의 위기의식을 자극해 도발의 동기를 제공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가입을 추진한 것도 러시아에 빌미를 줬다. 미국은 같은 시기에 한쪽(우크라이나)에서는 침략을 당한 나라를 지원하고 다른 쪽(가자지구)에서는 공격자를 돕는 희한한 상황까지 연출하고 있다.
능력과 지략 부족만이 문제라면 동정의 여지라도 있다. 그 일관된 비정함과 기회주의는 반감을 사고 있다. 바이든의 전통적 지지층의 이탈이 그걸 말해준다. 미국은 가자지구 팔레스타인인들이 2만명 이상 이스라엘군의 폭탄에 죽어나가는 동안에도 국제사회의 휴전 요구에 동참하지 않았다.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입으로는 민간인 희생을 최소화하라면서 결국 그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이는 폭탄을 이스라엘에 대준다. 이스라엘 근해엔 대규모로 전함들을 배치해 다른 세력이 얼씬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스라엘군이 마음 놓고 가자지구를 초토화할 조건을 마련해준 셈이다. 국제 정치란 게 아무리 위선의 경연장이라지만 이건 너무 심하다.
바이든의 비정함은 꼭 새삼스럽지는 않다. 남베트남 패망 직전인 1975년 4월 미국에 협력한 현지인들을 함께 탈출시키는 문제를 논의한 백악관 회의 기록에서부터 일찌감치 확인된다. 32살 초선 상원의원이던 그는 “난 미국인들을 탈출시키는 데 돈이 얼마나 들든 찬성표를 던지겠으나 그걸 베트남인들을 빼내는 것에 쓰는 데는 반대한다”고 했다.
문제를 꼬이게 만드는 재주는 있지만 푸는 능력은 부족한 바이든 행정부가 한반도 문제에서는 다를까? 바이든의 집권기에 북한과의 긴장이 커진 것은 다른 지역들의 긴장 고조와 박자가 맞는다. 그 기초 원인이 북한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위반 때문이더라도 미국에 문제를 풀 적극적 의지와 능력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런 무능력이 남북 사이의 고조되는 적대감과 결합해 무슨 사고로 이어질지 암담해진다.
트럼프가 재선되지 않기를 기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