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에서 가장 규모가 큰 판자위안 골동품 시장의 헌책방 거리에선 문혁 시절의 선전화 등 이른바 ‘문혁 물품’들이 수집가들의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러나 문혁의 ‘전모’는 아직까지 예민한 영역으로 남아 있다.
[아시아아시아인] 40년전 홍위병은 무슨 일을 저질렀나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지난 6일 “‘4인방’의 마지막 생존자이던 야오원위안(요문원)이 지난해 12월23일 병으로 숨졌다”는 짧은 기사를 내보냈다. 그의 죽음은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 동안 중국 전역을 피로 적셨던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문혁)’의 어두운 그림자가 한꺼풀 엷어지는 걸 뜻했다. 마침 올해는 문혁이 터진 지 40돌, 끝난 지 30돌이 되는 해이다. 문혁 시절 마오쩌둥(모택동)과 공산당이 극좌 편향의 오류를 저질렀음을 시인한 ‘건국 이후 역사 문제에 관한 약간의 결의’(1981)가 채택된 지 25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문혁 시절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는 지, 문혁 때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는 지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홍위병 참회록> 등 단편적인 ‘회고’ 등이 있지만, 이런 자료들은 당시 벌어진 비극 가운데 빙산의 일각을 보여줄 뿐이다. ‘마오쩌둥의 붓’ 야오원위안 사망
그의 1000만자 기록 철통 보안
‘전모 공개’ 박물관 설립운동 활발 야오원위안은 문혁 시기 ‘마오쩌둥의 붓’이란 별명답게 4인방 가운데 가장 많은 기록을 남겼다. 15살 때부터 일기 쓰기 버릇을 들인 야오는 문혁 10년의 세월은 물론, 감옥에서 보낸 20년, 1996년 형 만기 석방 이후 사망할 때까지 10년 동안을 모두 꼼꼼한 일기로 남겼다. 출옥 뒤에는 회고록도 집필했다. 그의 일기는 1000만자, 회고록은 30만~40만자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으로 알려져 있다. 문혁 소용돌이의 한복판에 서 있었던 그의 기록은 중국 현대사의 진실을 들여다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1차 사료’다. 그러나 당국은 그의 모든 기록을 몰수한 뒤, 이 ‘판도라의 상자’가 바깥으로 흘러나가지 않도록 극심한 보안을 유지하고 있다. 야오의 일기와 회고록만 당국이 민감하게 여기고 있는 게 아니다. 베이징 하이뎬구에 있는 국가도서관에서 일반인의 대출과 열람이 금지되고 있는, 가장 민감한 구역은 바로 문혁 관련 자료가 모여 있는 곳이다. 이런 사정은 베이징대 도서관 등 대학도 마찬가지다. 인터넷의 문혁 관련 블로그들도 폐쇄당하거나, ‘비판투쟁’ ‘집단 처형’ 등 참상을 담은 사진들은 모두 삭제당하고 있다. 중국 당국이 아직도 문혁을 예민하게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혁 종결 30돌을 맞은 중국에서 이제는 문혁의 전모가 공개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터져나오고 있다. 이는 ‘문혁박물관’ 건립 운동으로 나타나고 있다. 문혁박물관 건립 운동은 지난해 101살의 나이로 세상을 뜬 작가 바진(파금)이 1986년 6월 처음 주창한 이래 많은 지지자들을 얻어왔다. 바진은 “나는 문혁박물관을 세워 자손들에게 이 시기의 역사를 정확하게 알려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다”며 “문혁박물관을 세우는 일은 중국인 모두의 책임”이라고 주장했다. 바진의 전기 작가 리후이는 “독일인들은 나치박물관을 지음으로써 역사를 제대로 평가하고 나치의 악몽에서 벗어났다”며 “자신의 추악함을 직시할 수 없는 민족은 희망이 없다”고 말했다. <신화통신> 시사평론가인 쉬쉐장은 최근 인터넷에 발표한 글을 통해 △문혁의 주인공들이 모두 역사의 인물이 됐고 △지금 자료를 수집해놓지 않으면 영원히 사라질 수 있다는 점 등을 들어 박물관 건립을 서둘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다. 중국사회과학원의 한 연구자는 “문혁의 참상을 날것 그대로 보여줄 경우 공산당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 나아가 사회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이 강화될 것이 우려된다”고 전했다. 한 누리꾼은 <봉황위성텔레비전> 인터넷 토론방에 올린 글에서 “문혁박물관을 세우면 공산당 정권의 합법성에 대한 타격이 클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문혁박물관 논쟁은 중국 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의 반영이라는 주장도 있다. 문혁 때 10년 동안 ‘노동개조’를 당했다는 궁즈웨이는 최근 <연합조보> 인터넷 토론방에 발표한 글을 통해 “오늘날 농민공 등 극빈층들은 ‘차라리 문혁 때가 좋았다’며 마오쩌둥을 추억하는 이들이 많다”며 “중국 사회의 심각한 빈부격차와 불평등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않으면 이런 사상적 혼란을 극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문혁은 30년 전 끝났지만 그에 대한 논쟁은 아직도 끊이지 않고 있다. 베이징/이상수 특파원 leess@hani.co.kr
국가가 안하면 우리가 한다 민간 박물관 2곳 반대 딛고 문열어
‘마오 어록’ ‘홍위병 참회록’ 등 전시
문혁 당시 ‘흑색분자’란 ‘죄명’이 쓰인 무거운 철판을 목에 걸고 ‘비투(비판투쟁)’를 당하고 있는 런중이. 중국 당국은 ‘비투’와 ‘공개 처형’ 등 잔인한 장면을 담은 문혁 당시 사진을 인터넷에서 모두 삭제하고 있다.
| |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