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군의 공격이 심했던 지난 3월, 드미트로의 가족과 이웃 주민들이 생활한 아파트 지하실의 모습. 부차/김혜윤 기자
2022년 2월24일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고 곧바로 수도인 키이우를 향해 진격했다. 러시아군의 수도 포위 계획이 성공하려면 키이우로 가는 길목인 작은 도시 ‘부차’(Bucha)를 지나야 했다. 3월3일 부차를 점령한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군의 반격으로 키이우 일대에서 물러나기까지 한달 가량 이 도시에 머물렀다. 러시아군이 퇴각하고 난 뒤 부차에서는 수백구의 시신이 한꺼번에 발견됐다. 러시아군이 ‘민간인 대학살’을 저질렀다는 비판이 잇따랐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전범’으로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세워야 한다는 여론도 거세졌다. <한겨레>는 이곳에서 발생한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 부차 시민들의 증언을 듣고 이를 기록한다. 첫번째 증언자는 부차 시청의 직원 드미트로 합첸코(44)다.
2022년 3월15일 낮 12시. 부차시청의 행정 담당 공무원인 드미트로 합첸코는 동료들과 함께 곧 마을로 들어올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닷새 전인 10일부터 인도 회랑이 열렸고, 그 길로 구호품을 실을 버스가 들어와 물건을 내리고 빈자리에 동네 사람들을 태우고 떠날 예정이었다. ‘버스가 언제 오나’ 생각하던 차였다. 러시아군 30여명이 시청 담을 넘었다. “거기, 당신!” 한 러시아군이 드미트로를 불러 세웠다. 머리에 총구를 겨눴다. “당신, 여기서 일하나?” 러시아군이 물었다.
13일(현지 시각) 취재진과 만난 드미트로는 언젠가 이런 순간이 올 줄 알았다고 했다. 러시아군이 정부나 군 관계자를 찾고 있었고, 확인되는 순간 쏴 죽이고, 실제로 많은 이들이 그렇게 죽었다는 걸 전해 들은 터였다. 그래서 시청 직원이냐는 물음에 아니라고 거짓말을 했다. 러시아군은 전화기와 신분증을 내놓으라고 했다. 드미트로는 러시아군들이 휴대폰을 검사하며 군인들 사진이나 군 동향 정보를 공유했는지 등을 확인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드미트로와 동료들은 이런 순간을 대비해 가지고 있던 스마트폰을 숨기거나 없애고, 연락만 주고받을 수 있는 구형 휴대전화를 쓰고 있었다. 스마트폰에는 사진과 메신저 메시지 등 정보가 너무 많았다. 대비를 잘했던 덕에 현장에 있던 군인들은 드미트로와 남성들의 정체를 밝혀내는 데 실패했다. 다만 미심쩍어하는 기색이었다.
부차 시청 직원 드미트로 합첸코.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러시아군은 현장에 있던 드미트로와 또 다른 직원, 시청 경비원 3명, 그리고 자원봉사자까지 6명의 남성을 시청 마당에 불러 모았다. 손을 뒤로 묶은 뒤 벽을 보고 서 있으라고 명령했다. 군인들은 건물을 샅샅이 뒤졌다. 얼마 지나자 러시아군 화물차가 들어왔다. 군인들은 시청에 보관하던 식빵·면 같은 구호품과 노트북·프린터 등 전자제품까지 손에 잡히는 대로 탈탈 털어 차에 실었다. 드미트로와 시청 직원들은 다행히 만일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구호품을 여기저기 분산해뒀다. 구호품 대부분은 인근 병원에 보관하고 있었다. 러시아군이 의외로 병원은 잘 건드리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러시아군은 부상을 당하면 병원에 찾아와 치료를 요청하거나 약을 달라고만 했다.
그렇게 한 시간쯤 서 있었을까. 수색을 마친 러시아군이 드미트로 일행에게 다가왔다. 쓰고 있던 털모자를 끌어내려 눈을 가리곤, 어디론가 데려갔다. 러시아군이 기지로 쓰던 한 아파트 단지였다. 군인들은 드미트로를 아파트 앞 벤치에 앉혔다. “우리 상사가 와서 너희들을 심문할 거다.” 늦은 밤까지 상사는 오지 않았다. 손발이 꽁꽁 얼었지만, 그땐 추운 줄도 몰랐다. 상사가 오지 않은 덕분인지 군인들은 드미트로와 남성들을 풀어줬다. “이제 가도 좋다.”
다행이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기엔 밤이 너무 늦었다. 위험했다. 러시아군은 길에서 사람을 만나면 그게 누구든 쏴 죽였다. 남성 여섯명이 밤늦게 길에 나타나면 ‘지역방어군’으로 의심을 받을 수 있었다. 마을 곳곳에 퍼져 있는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군인이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죽일 것이었다. 그즈음 러시아군은 길에 평범한 주민이 보여도 무조건 총을 겨누거나 쏴버리기 일쑤였다. ‘고맙게도’ 이 군인들은 드미트로에게 선택지를 줬다. 아파트 지하실에 있다가 날이 밝으면 가든지, 지금 가든지 마음대로 하라는 것이다. 여섯 남성은 그날 밤 지하실에 숨어 날이 밝기만을 기다렸다.
아침 9시, 러시아 탱크가 기지를 떠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지하실에서 나왔다. 눈에 보이는 가방을 주워 들쳐메고 옷을 걸쳤다. 음식을 구하러 다니는 동네 주민처럼 보이기 위해서였다. 러시아군과 마주칠 때를 대비해 이른 아침 길에 돌아다닐 이유를 만들어야 했다. 지하실에서 나온 뒤로는 큰길로 가는 대신 군인들 눈을 피할 수 있는 뒷길을 택했다. 집과 집 사이에서 숨바꼭질하며 움직였다. 보름 가까이 러시아군 눈을 피해 동네 사람들에게 구호품을 전달해온 터였다. 눈에 안 띄게 움직이는 데는 도가 텄다. 이른 아침 시청은 텅 비어 있었다. 드미트로와 남성들은 각자의 집으로 흩어졌다.
13일(현지시각) 오후 우크라이나 부차 시청 회의실에서 드미트로가 러시아군이 파괴한 부차 일대의 모습을 취재진에게 보여주고 있다. 부차/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2월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전쟁을 선포한 뒤 사흘만인 27일 러시아군은 벨라루스를 통해 내려와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로 향했다. 수도에서 30km 떨어진 북서쪽 소도시 부차는 그 길목에 있었다. 우크라이나군은 러시아군의 첫 번째 진입 시도를 잘 막아냈지만, 러시아군은 3월3일께 다시 부차의 북서쪽으로 밀고 내려왔다. 수도 포위작전의 일환이었다.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군에 밀려 키이우에서 철수한 3월 말까지 약 한 달 동안 부차시는 러시아군의 군홧발에 짓이겨졌다.
드미트로는 러시아군이 부차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든 한 달을 잊을 수 없다. 드미트로가 아는 동네 사람들 여럿이 목숨을 잃었다. 그중에 친구 루슬란이 있다. 드미트로가 러시아군에 납치됐던 3월15일 무렵에 루슬란은 열네살 된 아들 유라와 함께 먹을 것을 구하러 밖으로 나왔다. “당신들, 어디 가나?” 러시아군이 물었다. “빵을 찾으러 나왔어요.” 답은 소용없었다. 느닷없이 총알이 날아왔다. 탕. 탕. 아빠 루슬란은 그 자리에서 머리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아들 유라도 함께 쓰러졌다. 그런데 운이 정말 좋았다. 총알이 유라의 후드티를 맞추고 빗나갔다. 기절했던 유라가 정신을 차렸을 때 아빠는 옆에 쓰러져 있었다. 총알은 아빠를 정확히 맞혔다. 유라는 곧장 집으로 달려갔다. 유라가 엄마와 함께 아빠의 시신을 수습하러 갔지만, 러시아군은 허락하지 않았다. “길바닥에 시신을 널브러진 채 두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을 겁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드미트로가 말했다.
드미트로의 한 친구는 차를 타고 가다 러시아군의 총에 맞아 죽었고, 두 아이와 함께 차를 타고 가던 한 여성도 마찬가지로 죽임을 당했다. 러시아군은 이 여성의 차를 불태웠다. 어느 집의 차고에 주민들이 숨어 있었는데 러시아군이 찾아왔다. 군인들은 환기구로 수류탄을 던졌고, 불길은 사흘 동안 꺼지지 않았다. 차고 안엔 여섯 사람이 있었다. 이들의 시신은 형체를 알아보기 어렵게 타 버렸다. 부차시는 이처럼 처참하게 훼손된 시신의 신원을 확인하는 데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다.
개전부터 러시아군 퇴각까지 부차시 인구 5만명 중 대부분이 도시를 빠져나갔다. 마지막 순간엔 3000∼4000명 정도만 남았다. 아프거나 너무 나이가 많아서 움직일 수 없는 사람들, 돌봐야 할 가족이 있는 사람들, 마을을 떠나도 갈 곳이 없는 사람들, 그리고 전쟁이 너무 지겨워 ‘이젠 죽든 살든 상관없다’며 자포자기한 극소수의 사람들만 남았다. 러시아군은 3월 말 우크라이나군에 밀려 퇴각하는 순간까지도 이유 없이 사람들을 공격했다. 드미트로의 친구는 3월30일 마을에서 나가던 러시아군의 총에 다리를 맞았다. 총알이 다리를 통과했지만 다행히 목숨만은 건졌다. 러시아군은 무시무시한 흔적을 남기기도 했다. 어떤 집엔 아이의 침대 밑, 부엌 전자레인지 안, 주변 풀숲에 지뢰를 쳐놨다. 두달이 지난 요즘도 러시아군이 설치하고 간 지뢰나 불발탄이 터져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는 뉴스가 나온다.
러시아군이 모두 빠져나간 뒤인 4월1일. 드미트로는 동네 마트 앞에서만 길가에 버려진 시체 5구를 봤다. 어떤 중년 여성은 쇼핑몰 앞에 총에 맞은 채 쓰러져 있었다. 시신들은 3월 내내 차가운 바닥에 있었다. 6월15일 현재 부차에서는 최소 420구의 시신이 발견됐다. “평범한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죽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너무 간단하게.” 드미트로가 말했다.
13일(현지시각) 부차 시청 직원 드미트로가 지난 3월 한달동안 가족과 이웃이 숨어 지낸 부차의 한 아파트 지하실을 취재진에게 소개하고 있다. 지하실 철문에 빨간 글씨로 “아이들”이라고 적혀 있다. 부차/김혜윤 기자
부차 시청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드미트로의 아파트 지하실에는 3월 한달간 고통스러웠던 이 마을 사람들의 삶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아파트 입구 옆 계단을 내려가면 약 15평(50㎡) 남짓한 방이 3개 붙어있는 지하실이 나온다. 지하실 문을 열자마자 깜깜했다. 평소라면 경험하기 어려운 완벽한 어둠이다. 반소매를 입은 살갗에 금세 소름이 올라왔다. 쿰쿰한 먼지 냄새가 났다. 몇 걸음 더 나가자 지하방에서도 열 계단쯤을 더 내려갈 수 있는 더 시커먼 공간에서는 코를 찌르는 시큼한 냄새가 풍겼다. 가까이 다가가 ‘윙∼’ 파리가 끓었다. 문도 없고 칸막이도 없는 ‘화장실’이었다.
휴대전화에 달린 플래시를 켜고 미로찾기 하듯 몇 걸음을 내디뎠다. 손잡이가 없는 철문에는 빨간 글씨로 “아이들”이라고 적은 하얀 종이가 붙어있었다. 드미트로는 이러한 깜깜함이 익숙한 듯 성큼성큼 나아가 이 방, 저 방을 안내했다. “여기가 침실입니다.” 드미트로의 두 딸은 이 방에서 아파트 주민들 20여명과 함께 한 달을 보냈다. 한쪽 벽에 붙어있는 조금 높은 침대에는 아직도 이불과 베개가 겹겹이 쌓여있다. 드미트로의 큰딸이 쓰던 침대다. “언제 다시 여기로 돌아올지 모르니 일단 일부는 남겨뒀어요.” 드미트로가 설명했다.
작은 통로를 지나 다른 방으로 들어가자 간이 부엌이 나왔다. 선반에는 아직 포장을 뜯지 않은 과일잼과 피클, 절임 채소, 오트밀 병이 그대로다. 오색빛깔 마시멜로, 버터 등은 비닐봉지에 담겨 가지런히 놓였고, 10구짜리 달걀 상자엔 달걀이 3개 남아 있었다. 차, 커피, 여러 맛의 소스들, 그리고 도마 위에 썰다 만 바게트 조각까지 마치 누군가 오늘 아침 이 부엌에서 음식을 해먹은 것 같았다. 바닥에는 아이들의 것처럼 보이는 사탕과 과자가 한 박스 가득 담겨 있었다.
먼지가 자욱한 시멘트 바닥에는 뜯지 않은 음료수와 물, 먹다 남은 술병 10여병이 놓여 있었다. 갈증과 추위, 공포를 참아낼 수 있게 도와준 ‘연료’들이다. 책상 위에는 작은 가로 30cm, 15cm 정도 돼 보이는 작은 전동기, 쓰다 만 양초 몇 개가 놓여 있었다. 한쪽 벽에는 과녁 게임판과 시계가 걸렸다.
또 다른 벽에 플래시를 비추니 초록빛 풀과 나무가 가득한 그림, 그리고 그 앞엔 예수와 성모 마리아의 그림이 놓여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부차 사람들이 어둠의 시간을 견디게 해준 한 줄기 희망의 빛처럼 보였다.
부차/노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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