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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유럽

러시아군이 무너뜨린 일상…공습 경보 울리면 헤드폰을 쓴다

등록 2023-01-24 10:15수정 2023-01-24 22:18

우크라이나 3차 취재기
2022년 12월31일(현지시각) 오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거리 풍경. 지난 3월 러시아군이 키이우를 점령했을 당시 우크라이나군이 도시 곳곳에 설치한 방호벽(주황색)이 보인다. 도시에서는 전쟁을 떠올리게 하는 칙칙한 방호벽에 새로 색을 칠하는 등 장식을 더해 장난감 같은 모습으로 꾸며놨다. 키이우/ 노지원 특파원
2022년 12월31일(현지시각) 오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거리 풍경. 지난 3월 러시아군이 키이우를 점령했을 당시 우크라이나군이 도시 곳곳에 설치한 방호벽(주황색)이 보인다. 도시에서는 전쟁을 떠올리게 하는 칙칙한 방호벽에 새로 색을 칠하는 등 장식을 더해 장난감 같은 모습으로 꾸며놨다. 키이우/ 노지원 특파원

<한겨레>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한 직후인 지난해 3월 초 우크라이나와 맞닿은 폴란드 동부 국경 도시를 찾아 갔습니다. 전쟁을 피해 나라를 떠나는 난민들을 만났습니다. 세 달 뒤인 지난해 6월에는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취재했습니다. 지난해 3월 러시아군이 키이우를 점령하면서 ‘대학살’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난 부차와 이르핀·보로댠카 등 외곽도시를 취재하며 전쟁이 남긴 상흔을 보도했습니다. (▶관련기사: 노지원·김혜윤 기자 우크라이나를 가다)

<한겨레>는 지난해 말 서부 국경도시 르비우와 키이우를 다시 찾아가 키이우의 세밑 풍경을 취재했습니다. 지난해 10월 초부터 러시아군은 이란산 드론과 미사일을 동원해 우크라이나 전역의 주요 기반시설을 파괴하기 시작했습니다. 시민들은 그로 인해 시도 때도 없이 전기.난방.수도 등이 끊기는 삶을 견뎌내고 있었습니다. 무고한 시민들을 겨냥한 러시아군의 공격은 전쟁의 성격을 다시 한 번 뒤바꾸었습니다. <한겨레> 취재진도 앞선 두 차례와는 전혀 다른 경험을 했습니다.

러시아군 미사일이 중심가 호텔에 떨어지다

2022년의 마지막 날인 12월31일 .오후 1시(현지시각)를 10분 정도 남겨둔 때였습니다. 우크라이나 영토방위군 사령부에서 근무하는 군 관계자를 인터뷰하기 위해 키이우 도심 모처에 도착했을 때였습니다. 건물 앞에 닿자마자 사이렌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습니다. 공습경보를 알려주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에서도 알림이 왔습니다. 인터뷰 시간이 다 된 터라 사이렌 소리를 들으며 황급히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사이렌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인터뷰를 시작한 지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습니다. ‘쿠웅.’ 바로 옆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먼 곳도 아닌 어딘가에 무엇인가가 떨어져 폭발한 듯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떨어졌네요.” 인터뷰를 하던 군 관계자가 말했습니다. 그는 물론 통역을 도와주던 친구 역시 ‘올 게 왔다’는 듯 전혀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동요하지 않고 인터뷰를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쿵’ 또는 ‘펑’, ‘펑’ 터지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습니다. 군 관계자는 ‘쿵’ 소리는 러시아군 미사일이 지상에 떨어저 폭발하는 소리, ‘펑’ 소리는 상공에서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군 미사일을 요격하는 소리라고 알려줬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뉴스 속보가 떴습니다. 러시아군이 쏜 미사일이 한 민간인 주거지와 도심의 한 호텔에 떨어졌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날은 이번 전쟁을 바라보던 제 생각이 틀렸다는 것이 증명된 날이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우크라이나를 취재하면서 러시아군이 시내 한복판에 있는 호텔에 미사일을 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습니다. 키이우의 호텔에는 전쟁을 취재하는 외신기자를 비롯해 각 나라에서 파견된 자원봉사자, 국제기구 관계자 등 외국인이 많기 때문입니다. 러시아가 호텔을 잘못 공격했다가는 외교적으로 큰 곤경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러시아군이 목표물을 정확히 알고 공격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날 시내 중심 대형 호텔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곧장 달려간 현장은 아수라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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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 날 새벽에도 ‘펑’, ‘펑’ 미사일 터지는 소리

공격을 받은 호텔 현장 취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서울로 보낼 기사를 쓰던 밤이었습니다. 자정이 지나 지인에게서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메시지를 받은 지 30분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습니다. 2023년 1월1일 0시35분. 묵고 있던 도심의 한 호텔 11층 창밖으로 또 다시 ‘웽∼’ 사이렌 소리가 들렸습니다. 1분이 채 지나지 않아 ‘펑’, ‘펑’ 소리가 귓가를 때렸습니다.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군의 드론 또는 미사일을 요격하는 소리라는 것을 낮에 배워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낮과는 달리 한밤 중에 사이렌 소리와 미사일을 요격할 때 나는 ‘펑’, ‘펑’ 소리를 듣고 있자니 마음이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전날 낮 러시아군의 공습으로 숙소에서 불과 3㎞, 차로 채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자리한 호텔이 무너진 현장을 취재하고 온 터라 더 겁이 났습니다. 폭죽이 터지듯 한동안 ‘펑’ 소리가 이어지자 자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지하 대피소로 내려가야 하나. 기사 마감이 급한데….’ 위험을 피하기 위해선 내 일상을 포기해야 했고, 내 의지대로 삶을 통제하려면 위험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아니면 그냥 운이 좋길 바라야 했습니다. 무력감이 찾아왔습니다. 한밤 중 머리 위에서 이어지는 공습 앞에서 아무 힘도 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변 상황을 내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곧 무기력함에 빠지곤 합니다. ‘내 일상이 무너지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는 데에서 오는 무력감. 우크라이나 시민들이 자기 삶을 통제하기 위해 어떤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지, 삶에 대한 통제력을 내려놓아야 할 때 어떤 기분일지, 조금이나마 짐작해 볼 수 있었던 밤이었습니다.

새해 첫 날인 이튿 날 밤에도 같은 상황은 반복됐습니다. 현장에서 만난 여러 키이우 시민들이 “두려워하는 것 자체가 지겹다”라고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습니다.

전세계인이 희망 가득한 새해를 축하하는 그 시각, 우크라이나 시민들은 지하 방공호로 뛰어내려갔을 것입니다. 어둡고, 차갑고, 축축한 그곳에서 공습 경보가 끝날 때까지 수 시간을 마음 졸여야 합니다. 공습 경보는 짧게는 1∼2시간 안에 끝나기도 하지만 길어질 땐 4∼5시간씩 이어지기도 합니다. 피하지 않으면 언제 내 머리 위로 미사일이 떨어질 지 모르는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무감각’이 아닌 생존 본능

우크라이나에서 만난 친구 디마는 공습 경보가 울려도 더이상 지하 대피소로 내려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매일 사이렌이 울리는데 그때마다 대피소로 뛰어 내려가 몇 시간씩 시간을 보내기 싫어요.” 그냥 헤드폰을 쓰고 마치 아무일 없는 것처럼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것은 통제할 수 없는 삶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인 셈입니다. 대낮에 거리에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지는 속에서도 사람들이 굳이 걸음을 재촉하지 않고, 식당에서 먹던 음식을 계속 즐겼던 모습 역시도 내 삶을 지키려는, 오늘 하루를 ‘평범하게’ 마무리 하고자 하는 우크라이나 시민들의 마음 아니었을까요.

지겹도록 이어지는 잔인한 공격 앞에 무너지면 안 된다는 것을 러시아군이 바라는 것은 바로 그것이란 사실을 우크라이나 시민들은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저마다 각자 다양한 방식으로 어제를 견뎠고, 오늘을 견디며, 또 내일을 견디는 이유입니다.

저는 열흘 남짓한 우크라이나 취재를 마치고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취재기를 쓰는 이 순간(19일 오전), 모바일 앱 알림이 뜹니다. 우크라이나에 또 공습 경보가 발동됐다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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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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