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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국제일반

‘피의 깃발’ 옆에 ‘승리 희망’ 트리 세운 르비우

등록 2022-12-31 07:00수정 2022-12-31 10:20

[한겨레S] 스페셜스토리
르포 | 해 넘기는 우크라 전쟁 피란 현장

‘거대 피란처’ 접경지 르비우 가보니
전력난 힘겹지만 광장에 트리 세워
단순 명절용 아닌 ‘승리 의지’ 다져
한편에선 전사한 군인 장례 잇따라
29일(현지시각) 르비우 중심에서 3㎞쯤 떨어진 리차키우 공동묘지. 이번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르비우 출신 군인들의 주검은 고향으로 돌아와 이곳에 함께 묻혔다. 르비우/ 노지원 특파원 zone@hani.co.kr
29일(현지시각) 르비우 중심에서 3㎞쯤 떨어진 리차키우 공동묘지. 이번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르비우 출신 군인들의 주검은 고향으로 돌아와 이곳에 함께 묻혔다. 르비우/ 노지원 특파원 z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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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서부 도시 르비우의 중심부에 자리한 오페라하우스 앞 광장 앞에는 크리스마스트리가 우뚝 서 있다. 하지만 올해 연말 풍경은 예전과 비슷하면서 조금 달랐다. 평소라면 광장에 커다란 크리스마스 시장이 들어서 먹을거리, 볼거리가 가득했겠지만 올해는 소소한 풍선이나 장난감을 파는 이들이 조금 눈에 뜨일 뿐이었다.

르비우시가 이달 중순 세운 성탄절 트리는 소박했다. 트리 꼭대기에는 반짝이는 별 대신 러시아군의 전차를 막기 위한 철제 장애물을 본떠 만든 장식이 올려졌다.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의 에너지 기반 시설을 집중 공격해 ‘시도 때도 없이’ 전기가 끊기는 상황이라 전구는 오후 5시부터 10시까지만 켜진다. 하지만 28일(현지시각)엔 밤늦도록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레고리력으로 따지는 크리스마스(12월25일)는 이미 지났지만 트리는 내년 1월까지 이 자리에 서 있을 예정이다.

르비우 광장의 트리 꼭대기에는 ‘베들레헴의 별’ 대신 전쟁 승리의 염원을 담은 ‘전차 장애물’(tank trap)이 장식됐다. 르비우/ 노지원 특파원 zone@hani.co.kr
르비우 광장의 트리 꼭대기에는 ‘베들레헴의 별’ 대신 전쟁 승리의 염원을 담은 ‘전차 장애물’(tank trap)이 장식됐다. 르비우/ 노지원 특파원 zone@hani.co.kr

죽음과 희망이 뒤섞인 공간

앞서 르비우에선 올겨울 크리스마스트리 설치 문제를 두고 토론이 이뤄졌다. 나라가 전쟁 한가운데에 있는데 여느 때처럼 트리를 세워도 되느냐는 것이었다. 시는 이 문제를 두고 군, 자원봉사자, 국경 내 피란민, 정신건강센터 전문가들과 협의했다. 모든 이들이 세워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아이들에게 반짝이는 트리가 꼭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대신 트리는 원래 잘라내야 할 나무로 골랐다. 평소 17~20m였던 나무의 키를 14m로 줄었고, 지난해 사용했던 장식을 그대로 재활용했다. 장식에 쓰이는 전구의 전력 소모량은 시간당 1㎾로, 전기 주전자를 한번 끓일 때 사용되는 전력량(1.7~2.5㎾)보다 적다는 게 시의 설명이다. 시는 올해 트리는 단순한 명절 축하용이 아닌 ‘승리에 대한 희망’이라고 설명한다. 고향을 잃은 우크라이나 전역의 시민들이 몰려드는 르비우는 서부 국경의 한 도시가 아닌 ‘커다란 피난처’가 됐다.

르비우에선 다른 여러 도시에서처럼 전선에서 싸우다 숨진 우크라이나 장병들의 장례도 치러진다. 28일 오후 5시 짧은 겨울 해가 거의 다 질 무렵, 시내 중심에서 동남쪽으로 3㎞ 남짓 떨어진 리차키우 공동묘지를 방문했다. 묘지 한쪽 터에 우크라이나의 하늘(파랑)과 비옥한 땅(노랑)을 상징하는 국기와 함께 우크라이나군의 피(빨강)와 영토(검정)를 상징하는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조문객들이 놓고 간 꽃은 채 시들지 않은 채 살얼음이 끼어 있었다.

지난 2월24일 러시아의 전면 침공이 시작된 뒤 사망한 이들이 하나둘씩 이곳에 묻혔다. 앞쪽부터 늘어선 묘지 끝이 어디인지 한눈에 알아보긴 어려웠다. 낮게 경사진 언덕 가장 위쪽까지 가보고 나서야 대략 250명 가까이 되는 전사자들이 묻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러시아군과 우크라이나군 사이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동부 도네츠크주 바흐무트에서 싸우다 전사한 보리스 야코울레우(56)는 묘지 가장 뒤쪽에 있었다.

29일 오전 11시 르비우의 ‘성 베드로와 바울’ 교회에선 르비우 출신 우크라이나 군인 세 사람의 장례식이 진행됐다. 야코울레우는 르비우에서 태어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 최대 격전지인 도네츠크주 바흐무트에서 자랐다. 러시아군이 공세를 이어가고 있는 바흐무트에서는 하루 수십명에 이르는 군인들이 목숨을 잃어 ‘고기 분쇄기’라고 불린다.

르비우에서 태어난 야코울레우는 가족과 함께 바흐무트로 이사한 뒤 거기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이후 도네츠크 국립대에 입학해 경제학과 무역을 공부했다. 전쟁이 없던 시절엔 바흐무트시 세무조사관으로 일하다 부국장까지 승진했고, 퇴직 뒤 개인 사업을 했다. 평범한 시민이었던 야코울레우의 삶은 러시아가 2014년 3월 크림반도를 강제 병합한 뒤 크게 변했다. 그는 자원입대해 2015년부터 ‘아조우 연대’의 일원이 됐다. 바흐무트에 주둔한 제54 기계화보병 여단 ‘헤트만 이반 마제파’(‘지도자 이반 마제파’란 의미. 이반 마제파(1639~1709)는 우크라이나의 민족 영웅)에 소속돼 싸우다 크리스마스이브를 앞둔 23일 전사했다. 배우자와 두 아들, 그리고 손주들이 그의 가는 길을 배웅했다. 야코울레우 외에 철도회사에서 일하다 입대한 세르히 페도로우(47), 건축업에 종사하던 로만 레흐키(48)의 장례도 같은 날 치러졌다. 이들도 야코울레우와 함께 리차키우 묘지에 잠들었다. 이날 <한겨레>가 찾아간 묘지 맨 뒷줄에는 아직 주인이 없는 듯한 자리가 하나 만들어져 있었다. 몇시간 뒤 이 자리의 주인이 정해졌다. 이날 저녁 르비우시는 이튿날 서른한살 나이로 생을 마감한 흐리호리 도보시의 장례를 치를 예정이라고 했다. 그는 러시아 침공 직후 자원입대했고, 3월 우크라이나 남부 미콜라이우의 스니후리우카 인근에서 러시아군과 싸우다 숨졌다. 아홉달 전에 목숨을 잃었지만 11월 우크라이나군이 이 지역을 수복한 뒤에야 그의 주검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29일(현지시각) 르비우 중심에서 3㎞쯤 떨어진 리차키우 공동묘지. 이번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르비우 출신 군인들의 주검은 고향으로 돌아와 이곳에 함께 묻혔다. 르비우/ 노지원 특파원 zone@hani.co.kr
29일(현지시각) 르비우 중심에서 3㎞쯤 떨어진 리차키우 공동묘지. 이번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르비우 출신 군인들의 주검은 고향으로 돌아와 이곳에 함께 묻혔다. 르비우/ 노지원 특파원 zone@hani.co.kr

29일(현지시각) 르비우 중심에서 3㎞쯤 떨어진 리차키우 공동묘지. 이번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르비우 출신 군인들의 주검은 고향으로 돌아와 이곳에 함께 묻혔다. 묘지 맨 뒷줄에 다음날 이곳 묘지로 들어올 전사자를 위한 빈 자리가 보인다. 르비우/ 노지원 특파원 zone@hani.co.kr
29일(현지시각) 르비우 중심에서 3㎞쯤 떨어진 리차키우 공동묘지. 이번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르비우 출신 군인들의 주검은 고향으로 돌아와 이곳에 함께 묻혔다. 묘지 맨 뒷줄에 다음날 이곳 묘지로 들어올 전사자를 위한 빈 자리가 보인다. 르비우/ 노지원 특파원 zone@hani.co.kr

전쟁 멈출 협상은 언제쯤

희생이 잇따르지만, 전쟁을 멈추는 외교 협상이 조만간 시작될 가능성은 극히 낮다. 드미트로 쿨레바 우크라이나 외교장관은 26일 <에이피>(AP)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의 중재 아래 두달 안에 ‘평화 정상회의’를 열고 싶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평화 협상을 위해선 영토 보전, 러시아군의 철수, 핵 안전 등이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자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은 같은 날 <타스> 통신에 “적(우크라이나 정부)은 도네츠크인민공화국(DNR), 루한스크인민공화국(LNR), 헤르손, 자포리자 등 러시아의 ‘새로운 영토’에서 안보 위협을 제거하자는 우리의 제안을 잘 알고 있다”면서 우크라이나에 “점령지 네곳을 ‘비나치화’하고 ‘비무장화’하는 러시아의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맞받아쳤다. 자신들이 10월 초 일방적으로 합병 절차를 끝낸 동남부 4개 주를 러시아 영토로 인정하라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한 것이다.

르비우/노지원 특파원

z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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