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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유럽

병든 아빠, 미사일 31발 떨어진 새해 첫날 새벽 하늘로…

등록 2023-01-02 10:29수정 2023-01-02 20:48

[현장] 러 공습 경보와 함께 온 2023년, 우크라의 기도
1일(현지시각) 오전 키이우 도심에 있는 우크라이나 정교회 성 볼로디미르 대성당을 찾은 한 시민이 기도하고 있다. 이날 대성당에는 새해 첫날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모여든 시민들로 북적였다. 키이우/ 노지원 특파원 zone@hani.co.kr
1일(현지시각) 오전 키이우 도심에 있는 우크라이나 정교회 성 볼로디미르 대성당을 찾은 한 시민이 기도하고 있다. 이날 대성당에는 새해 첫날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모여든 시민들로 북적였다. 키이우/ 노지원 특파원 zone@hani.co.kr

1일(현지시각) 오전, 밤새 지속됐던 공습경보가 훑고 지나간 거리는 한산했다. 바깥 공기는 10℃ 안팎으로 포근했지만, 거리에선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버스도 승객 없이 달렸다.

러시아의 공격으로 잔뜩 웅크렸던 도시는 날이 밝으며 조금씩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오전 10시 키이우 도심에 있는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성 볼로디미르 대성당은 새해 첫날 미사에 참석하려 모여든 시민들로 북적였다. 사제가 의식을 진행하는 중에도 사람들이 속속 몰려들었다.

1월 1일  카운트다운 직후, 사이렌이 울렸다

시민들은 신 앞에 머리를 숙이고, 두 손을 모으고, 여러 차례 성호를 그었다. 노랗고 기다란 초에 불을 밝혔다. 대성당 안에는 성가대의 노랫소리, 사제들이 복음을 읊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민들은 모두 숨을 죽인 채 기도를 했다. 어떤 이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오래도록 하늘을 쳐다봤다.

1일(현지시각) 오전 키이우 도심에 있는 우크라이나 정교회 성 볼로디미르 대성당. 시민들이 새해 첫날 예배에 참석하고 있다. 키이우/ 노지원 특파원 zone@hani.co.kr
1일(현지시각) 오전 키이우 도심에 있는 우크라이나 정교회 성 볼로디미르 대성당. 시민들이 새해 첫날 예배에 참석하고 있다. 키이우/ 노지원 특파원 zone@hani.co.kr

이날 키이우 외곽에서 대성당을 찾아온 빅토리아 쉐브치쉰(54)의 아버지는 러시아의 공습이 이어지던 이날 새벽 세상을 떠났다. “원래 새해 소원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우크라이나의 승리를 보고 가셨으면 하는 거였어요.” 병이 든 아버지가 생을 마감하면서 더는 이 소원을 빌 수 없게 됐다.

우크라이나의 새해는 러시아군의 미사일 공습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와 함께 찾아왔다. 1일 0시35분께 수도 키이우를 비롯한 우크라이나 전역에 공습 경보가 발령됐다. 러시아는 미사일 31발과 이란산 샤헤드-135 무인기 등을 동원해 공습을 감행했다. 경보는 4시간 뒤인 새벽 4시50분이 돼서야 끝났다. 쉬이 잠들기 어려운 밤이었다. 우크라이나군은 러시아가 31일 밤~1일 새벽에 무인기를 동원한 공격을 했고, 자신들이 총 45기를 요격했다고 발표했다.

빅토리아는 지난밤 아파트 발코니에서 하늘을 나는 러시아군 미사일을 한눈에 올려다볼 수 있었다. 그는 지난해 2월 말 러시아군의 침공이 시작된 뒤, 남편과 계속 도시에 남아 있었다. “지난 열 달 동안 이런 미사일 공습은 수도 없이 봐 왔어요. 특히 3월에는 정말 무서웠는데, 물론 지금도 두렵긴 하지만 그때만큼은 아니에요. 그냥 조금 더 차분하게 받아들이는 거죠.”

빅토리아는 이날 교회를 찾아 아버지의 명복을 빌고 조국의 승리를 위해 기도했다. “올해엔 꼭 우리가 전쟁에서 이기고, 도시를 다시 지어 올렸으면 좋겠어요.”

성 소피아 대성당 앞 광장서 친구들과 함께 트리를 구경하던 빅토리아 마라호우스카(54)가 <한겨레> 취재진에게 지난 2021년 연말연시 대성당 광장 앞에서 친구들과 함께 찍었던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휴대전화 사진 속 1년 전 광장에는 화려한 불빛과 커다란 크리스마스 마켓이 들어서 있다. 키이우/ 노지원 특파원 zone@hani.co.kr
성 소피아 대성당 앞 광장서 친구들과 함께 트리를 구경하던 빅토리아 마라호우스카(54)가 <한겨레> 취재진에게 지난 2021년 연말연시 대성당 광장 앞에서 친구들과 함께 찍었던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휴대전화 사진 속 1년 전 광장에는 화려한 불빛과 커다란 크리스마스 마켓이 들어서 있다. 키이우/ 노지원 특파원 zone@hani.co.kr

이날 성당에서 예배를 마치고 나온 루드밀라(47)와 파블로(47) 샤를로비치 부부는 우크라이나인들의 “새해 소원은 다 똑같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의 승리와 평화.”

인형 가게를 운영하는 부부는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맞아 부부는 바쁜 일상을 보냈다. “산타는 누구에게나 오잖아요. 아이들에게 새해 선물을 사주려는 사람들로 가장 바쁜 날이에요.” 1일 새벽 공습경보가 울렸을 땐 가족끼리 저녁을 먹고 새해를 기다리며 조용히 시간을 보내던 중이었다. 부부는 아파트 지하로 대피하는 대신 함께 시간을 보내며 두려움을 달랬다. “누구든지 자기가 한 행동에 책임을 지게 돼 있어요. 언젠가 러시아가 책임을 져야 할 날이 올 겁니다.” 

오직, 평화

오후가 되자 더 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몰려나왔다. 전쟁이 터지기 전 키이우에선 12월부터 1월 말까지 연말연시를 즐기는 시민들을 위해 도심에 크리스마스트리 등 각종 조명 장식을 하고 그 부근에 따듯한 보르시(우크라이나 수프)와 데운 와인 등을 파는 장터를 열어왔다. 하지만, 올해는 성 소피아 대성당 앞에 소박한 트리 하나만 세웠다. 전쟁 중 축제를 열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키이우 도심 성 소피아 대성당 앞 광장에 설치된 ‘무적의 트리’ 앞에서 시민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키이우/ 노지원 특파원 zone@hani.co.kr
키이우 도심 성 소피아 대성당 앞 광장에 설치된 ‘무적의 트리’ 앞에서 시민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키이우/ 노지원 특파원 zone@hani.co.kr

겨울의 키이우엔 오후 4시만 되면 어둠이 내려앉는다. 이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 ‘무적의 트리’라는 이름이 붙은 올해 크리스마스트리가 저녁 5시부터 9시까지 4시간 동안 불을 밝힌다. 키이우 시민들은 오후 5시가 되기도 전에 대성당 앞 광장 앞에 모여들었다. 한눈에 봐도 200명은 넘는 듯한 수의 시민들이 북적였다.

트리에 우크라이나 국기를 상징하는 노란색, 파란색 불이 들어오자 시민들이 ‘와∼’ 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가족, 친구, 연인과 함께 사진을 찍고 트리를 배경 삼아 포즈를 취했다. 드넓은 광장 트리 바로 옆에는 발전기가 돌고 있고, 트리 바로 옆에 자리한 보흐단 흐멜니츠키(1595~1657·우크라이나의 역사적 인물) 기념비는 여전히 방벽에 둘러싸여 있었다. 지난 3월 러시아가 수도 키이우 포위작전을 시작하자, 키이우는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해 각종 역사 기념물에 외벽을 만들어 보호하고 있다.

세르히 샤포바로우(58)는 무적의 트리를 배경으로 배우자인 스비틀라나(58)의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다. “전쟁 중이지만 키이우에 트리가 생겨서 정말 다행이에요. 독일에 있는 손주들에게 트리를 보여주려고 사진을 찍고 있었어요.” 올해 연말연시는 부부의 9살, 11살 손주와 함께 할 수 없다. 딸이 개전 초인 지난 3월 아이들을 데리고 독일로 피난을 떠났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어 하지만 아직은 안 됩니다. 아시잖아요? 위험해요.” 러시아군은 새해 마지막 날, 그리고 새해 첫날에도 우크라이나 전역에 대규모 공습을 감행했다.

세르히 역시 곧 전장으로 떠난다. 최근 우크라이나군 동원 대상자에 포함돼 절차를 밟고 있다. 어디로 갈지는 아직 모른다. 부인 스비틀라나의 얼굴에 걱정이 스쳤다. “저는 괜찮을 겁니다.” 무적의 트리가 부부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묻자 부부는 “전쟁”이라고 말했다. 이 부부의 새해 소원도 “오직 평화, 우크라이나의 승리”다.

키이우/노지원 특파원 z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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