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 수도, 난방이 모두 끊긴 우크라이나 남부 헤르손에서 지난해 11월27일(현지시각) 한 노인이 보행 보조 장치에 의존한 채 암흑으로 바뀐 도시를 빠져나가고 있다. 헤르손/AP 연합뉴스
[특파원 칼럼] 노지원
베를린 특파원
내 친구 디마는 우크라이나 시민이다. 키이우에 산다. 케이팝과 온라인 게임을 즐기는 평범한 20대 청년이다. 한국이 좋아 대학에서 한국어를 전공했고, 서울의 한 대학으로 여섯달 공부하러 온 적도 있다. 서부 흐멜니츠키 출신인 그는 현재 키이우에서 10년 가까이 살며 한국어를 가르친다. 방탄소년단(BTS)의 전세계적 인기 덕인지, 우크라이나 전역에 한국어를 배우려는 이들이 많아졌단다. 수업 요청이 많아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며 행복한 고민에 빠지곤 했다.
“고향 할머니 댁으로 돌아가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 중이에요.” 지난달 취재차 우크라이나에 들어가 여섯달 만에 다시 만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난해 10월부터 러시아군은 이란산 드론 등을 동원해 우크라이나 주요 에너지 기반시설을 집중 공격 중이다. 도시에 수도, 난방과 함께 전기가 끊기는 상황이 반복됐다. 추운 겨울을 앞두고 디마가 사는 키이우시는 전력 소비량을 줄이려 지역별로 정전 시간을 정해 공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두달여 전부터 이들 민간 시설에 대한 러시아군의 공세가 거세지며 시간표는 무의미해졌다. 몇시간씩 전기가 끊기고 다시 들어오곤 했던 나름의 ‘규칙적인’ 일상마저 마비된 것이다. 언제 전기가 끊길지, 언제 다시 들어올지 모른 채, 예측을 하기 어려운 삶이 이어진다. 특히 지난달 19일(현지시각) 새벽 러시아군이 드론 공습을 퍼부은 날 이후 디마의 아파트에는 사흘 내내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벌이는 크게 줄었다. 디마는 주로 온라인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전기가 끊기면 그의 데스크톱 컴퓨터는 먹통이 된다. 예정된 수업을 미룰 수밖에 없다. 새로 일정을 잡아도 또 전기가 끊겨 소용없어지는 경우가 잦았다. 석달 과정이던 수업 일정이 차일피일 길어졌다. 꽤 안정적이라 생각했던 직업이었지만 수입은 변변치 못하게 됐다. 통장 잔고는 비어갔다. 매달 꼬박꼬박 나가는 집세 30만원이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때부터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계속 이런 상황이 이어진다면 도리가 없다.
디마의 이야기는 또한 수많은 우크라이나 시민들의 이야기다. 발전기를 미처 구하지 못한 영세업체는 전기가 나가면 카드 결제를 할 수 없다. 식당은 메뉴판에 적힌 음식을 제공할 수 없어 손님을 돌려보낼 수밖에 없다. 불 꺼진 상점이 영업을 안 하는 줄로만 알고 손님이 먼저 발길을 돌리는 경우도 눈에 띄었다. 연말연시 우크라이나 서부 르비우와 수도 키이우에서 취재하며 목격한 풍경이다.
지난해 10월 우크라이나 경제부는 2월 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연말까지 실업률이 30%까지 치솟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 11월엔 침공 이래 최소 500만명이 일자리를 잃었다고 발표했다. 전쟁 발발 전인 2021년 우크라이나 실업률은 8.9%였다. 지난해 유럽연합 27개국 평균 실업률은 6%, 그중 실업률이 가장 높은 스페인조차 12.4%다. 미국 경제정책연구센터(CEPR)가 11월 펴낸 보고서를 보면, 우크라이나에서 1∼10월 실질임금이 11% 하락했고, 지난 한달 동안 18%나 감소했다. 지난해 우크라이나의 국내총생산(GDP)은 전년 대비 30.4% 줄었다.
무너져가는 것은 포격을 당한 건물과 기반시설뿐이 아니다. 러시아가 시작한 전쟁, 그리고 현재 계속되는 공격은 평범한 시민의 삶과 생계를 겨냥하고 있다.
베를린/노지원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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