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19일(현지시각) 오전 우크라이나 키이우의 ‘성 미하일 황금돔 수도원’ 앞에 전시된 러시아군 무기와 전차 등을 한 어린이가 둘러보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지 어느덧 4개월이 됐다. 그동안 숨진 민간인만 최대 3만명인 것으로 추정된다. 유엔난민기구(UNHCR)는 러시아 침략 이후 우크라이나에서 빠져나간 난민이 680만명, 우크라이나 국내 피란민은 700만명이 넘을 것으로 집계했다. <한겨레> 노지원, 김혜윤 기자는 2022년 3월 우크라이나 접경지대를 취재한 데 이어, 6월13일부터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중심으로 현지에서 취재 중이다. 러시아 군대가 할퀴고 간 우크라이나의 모습을 전한다. _편집자
2022년 2월24일.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곧바로 수도 키이우로 진격했다. 수도 포위 계획이 성공하려면 키이우로 가는 길목인 작은 도시 부차를 지나야 했다. 부차는 이번 전쟁의 최대 비극으로 꼽히는 ‘부차 대학살’이 벌어진 곳이다.
3월3일 부차를 점령한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군의 반격으로 키이우 일대에서 물러나기까지 한 달가량 이 도시에 머물렀다. 러시아군이 퇴각한 뒤 부차에서 주검 수백구가 한꺼번에 발견됐다. 6월 중순까지 부차에서 발견된 주검만 460여구다. 러시아군은 이곳에서 ‘민간인 대학살’을 저질렀다.
“거기, 당신!”
부차에 사는 드미트로 합첸코(44)는 러시아 병사가 자신을 날카롭게 불러 세우던 ‘그날’의 순간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3월15일 낮 12시, 우크라이나 키이우주 부차시청의 행정공무원인 합첸코는 동료들과 곧 마을로 들어올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시에 머물던 민간인이 피란을 떠나는 통로인 ‘인도 회랑’이 3월10일부터 열렸다. 구호품을 실은 버스가 회랑에 들어와 물건을 내리고, 물건을 내린 빈자리에 동네 사람들을 태워 떠날 예정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러시아군 30여명이 시청 담을 넘어와 합첸코를 불러 세우고 머리에 총구를 겨눴다. “당신, 여기서 일하나?”
살아남은 사람들 “운이 좋았다”
6월13일(현지시각) 취재진과 만난 합첸코는 러시아군이 도시를 점령하던 한 달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러시아군은 길에서 만나는 사람은 누구든지 쏴 죽였다. 합첸코는 러시아군에 납치됐다가 풀려났는데, 말 그대로 ‘운이 좋았다’.
동네 지인 여럿이 목숨을 잃었다. 그중엔 친구 루슬란도 있었다. 합첸코가 납치되던 3월15일, 루슬란은 14살 아들 유라와 먹을 것을 구하러 밖으로 나왔다. “당신들, 어디 가나?” 러시아군이 물었다. “빵을 찾으러 나왔어요.” 느닷없이 총알이 날아왔다. 루슬란은 머리에 총을 맞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유라는 운이 좋았다. 총알은 유라의 후드티셔츠를 맞히고 빗나갔다. 기절한 유라가 정신을 차렸을 때 아빠는 옆에 쓰러져 있었다. 엄마와 함께 아빠의 주검을 수습하러 갔지만, 러시아군은 허락하지 않았다. 합첸코는 “러시아군이 길바닥에 주검을 널브러진 채 두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을 겁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합첸코의 또 다른 친구는 차를 타고 가다 러시아군 총에 맞아 숨졌다. 두 아이와 함께 차를 타고 가던 다른 여성도 마찬가지로 세상을 떠났다. 러시아군은 여성의 차를 불태웠다. 어느 집 차고에 주민들이 숨어 있었는데 러시아군이 찾아왔다. 군인들은 환기구로 수류탄을 던졌다. 차고에 불이 나 사흘 동안 꺼지지 않았다. 차고 안엔 여섯 사람이 있었다. 주검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타버렸다. 러시아군이 퇴각할 때 도시엔 3천~4천 명만 남아 있었다. 아프거나, 너무 나이가 많거나, 돌봐야 할 가족이 있거나, 떠나도 갈 곳이 없는 이들이었다.
러시아군은 부차에서 후퇴하면서도 무시무시한 흔적을 남겼다. 아이의 침대 밑, 부엌 전자레인지 안, 주변 풀숲에 부비트랩과 지뢰를 설치했다. 러시아군이 떠난 지 두 달여 지났음에도, 지뢰나 불발탄이 터져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는 뉴스가 나온다.
러시아군이 모두 빠져나간 뒤인 4월1일, 합첸코는 동네 마트 앞에서만 버려진 주검 5구를 발견했다. 어떤 중년 여성은 쇼핑몰 앞에 총에 맞은 채 쓰러져 있었다. 주검들은 러시아군이 점령한 3월 내내 차가운 바닥에 방치됐다.
6월15일 현재 키이우 주변 전체에서 1200구의 주검이 발견됐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러시아군이 뜻밖에 강한 저항으로 인해 키이우 점령에 실패하자 무고한 시민들에게 분풀이했다고 본다. 합첸코가 말했다. “평범한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죽었어요. 아무런 이유 없이, 너무 간단하게.”
우크라이나 루한스크 지역에서 복무하다 2022년 6월12일(현지시각) 전사한 보흐단 므콜라요브치 사블린 선임병의 장례식이 6월18일 낮 부차의 공동묘지에서 열리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새로 생긴 마을, 졸리 하우스, 보노 하우스…
6월18일(현지시각) 오후 5시, 키이우 외곽에 있는 도시 이르핀을 지나는 철길 한가운데 새로 ‘마을’이 생겼다. 이 마을의 공식 명칭은 ‘철길 작은 마을, 이르핀’이다. 우크라이나 국영 철도회사와 우정 당국, 그리고 이르핀시가 24m 길이의 기차 7개를 연결해 피란민이 머물 임시주거지를 마련했다.
키이우 중심에서 북서쪽으로 25㎞가량 떨어진 도시인 이르핀에선 수도로 들어가려는 러시아군과 막으려는 우크라이나군 사이에 격전이 벌어졌다. 러시아군이 이르핀을 점령하지는 못했지만 도시의 절반 이상이 파괴됐다. 주택 1100채 이상이 파괴됐으며, 아파트 단지 150곳이 훼손되고 이 중 45곳은 완파됐다. 민간인 300여명, 군인 50여명, 국토방위군(예비군) 38명이 죽었다. 우크라이나군과 시민들이 3월 말까지 계속됐던 키이우 포위를 막아내면서 러시아군은 물러갔다. 이르핀 시민 95%가 피란 갔다가 현재 절반 정도 돌아왔다. 한두 달 만에 부서진 주거지를 복원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철길 마을’이 생겼다.
6월18일 기준으로 47명이 철길 마을에 입주를 신청했다. 일주일 전부터 26명이 이미 들어와 살고 있다. 기차에는 7칸이 있는데 샤워칸·식당칸이 1개씩, 침대칸이 5개다. 침대칸에는 각각 특별한 이름이 붙었다. 앤젤리나 졸리 등 우크라이나 철도로 이 나라를 방문한 배우, 가수, 축구선수 등 유명 인사들의 이름을 땄다. ‘졸리 하우스’ ‘보노(아일랜드 출신 록밴드 유투(U2)의 멤버) 하우스’ 식이다. 전쟁 전에 생산해 시범운행 정도만 거친 새 기차다.
추운 겨울이 오기 전 주민들이 주거지를 마련하는 것은 시 당국의 최우선 과제다. 올렉산드르 마르쿠신(42) 이르핀 시장은 “집 잃은 이들이 머물 곳은 당장 필요하지만, 한두 달 안에 그 많은 집을 다 지을 수는 없다”며 “철길 마을은 겨울이 되기 전에 사람들에게 집을 마련해주기 위해 철도 당국과 협력해 이룬 사업”이라고 말했다.
철길 마을은 시민들에게 희망의 공간이기도 하다. 와르르 무너진 집을 바라보며 절망했다가도 다시 일어설 용기를 북돋는 공간이다.
한 주 동안 철길 마을에서 생활한 올렉산드르(53)는 “평생 살진 않겠지만 이곳에 필요한 모든 것이 있다”며 “당장 집을 짓기 어려운 것을 잘 안다. 이보다 뭐가 더 필요하겠느냐”고 말했다. 그의 주택은 3월 격전으로 완전히 파괴됐다.
모래성으로 싸인 여왕, 나무판자로 싸인 기념비
러시아군이 키이우에서 퇴각한 지 두 달 반이 지난 6월 현재 이르핀을 비롯해 부차, 보로댠카 등 수도 외곽 도시는 재건에 한창이다. 일단 사람들이 머물 ‘임시주거지’ 마련이 급하다. 각 도시는 폴란드 정부가 지원하는 ‘조립식 주택’ 공급 확대에 힘쓰고 있다. 조립식 주택은 이층침대 2개, 작은 옷장이 들어가면 꽉 차는 두세 평 크기의 가설건축물(컨테이너)이다.
격렬한 탱크 교전이 벌어진 드미트리우카 마을에선, 군사 당국과 함께 순직 군인의 유가족 등을 위한 ‘개별 주택 재건 프로젝트’에 들어갔다. 현재 공사를 진행하는 주택은 다섯 채 정도다. 9월 개학 전까지 무너진 학교들도 다시 지어 올려야 한다. 타라스 디디츠 드미트리우카 마을장은 “전쟁 중에 우크라이나 정부로부터 필요한 예산을 모두 지원받기란 불가능하다”며 “자선단체를 찾아 다양한 기회와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고 말했다.
10세기에 ‘키이우 루스’를 통치한 올가 여왕의 동상 앞에서 전날 결혼한 신혼 부부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키이우 시민들은 지난 3월 말 폭격으로부터 동상을 보호하기 위해 모래주머니를 높이 쌓아 올렸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6월19일(현지시각) 키이우 도심의 ‘성 미하일 황금돔 수도원’ 앞 광장에 있는 올가 여왕(재위 기간 945~960년) 동상은 여전히 모래성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올가 여왕은 동슬라브족 최초의 국가인 ‘키이우 루스’의 기틀을 닦은 인물로 우크라이나 사람들에겐 독립과 통합을 상징하는 존재다.
우크라이나는 수도를 지켜냈지만 아직도 동부 전선에선 러시아군과의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고 있다. 키이우 시민들은 겉으론 일상을 되찾은 듯한 모습이지만, 언제 다시 수도가 공격받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산다. 여왕을 지키는 모래성을 쉽사리 없애기 어려운 이유다. 키이우시는 올가 여왕의 기념비는 물론 키이우 중심 솁첸코 공원에 있는 시인 타라스의 기념비 등 도시 곳곳에 있는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모래주머니, 나무판자 등으로 꽁꽁 싸매 보호하고 있다.
평일, 주말을 막론하고 시민들은 성 미하일 황금돔 광장을 비롯해 외곽 도시 드미트리우카 들머리에 전시된 ‘패배한’ 러시아군의 탱크, 전차 등을 보려 몰려든다. 이들 러시아군의 무기는 모두 부서지거나 붉은 녹이 슬었다. 우크라이나 시민들에게는 승리의 기억이자 처절한 전투의 증거다. 아이들은 전차를 놀이터 삼아, 장난감 삼아 타고 오르고 흔들었다. 엄마 아빠는 이런 아이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파란 하늘과 노란 밀밭에 싸인 영웅
러시아군과 맞서 싸우다 목숨을 잃은 용사들의 주검이 매일, 우크라이나 각지에 있는 용사들의 고향으로 돌아온다.
6월18일(현지시각) 낮 12시, 부차에 있는 ‘영웅의 골목’ 묘지에서 이날도 장례식이 열렸다. 러시아군과 우크라이나군의 격전이 벌어지는 동부 루한스크 지역에서 복무하다 다친 소총병 겸 간호사 보흐단 므콜라요브치 사블린(42) 선임병이 병원에서 치료받다가 6월12일 전사했다.
가족과 친인척, 마을 주민들은 색색의 꽃을 한 아름 가슴에 안은 채 관을 둘러쌌다. 파란 하늘과 노란 밀밭을 의미하는 우크라이나 국기가 관을 감쌌다. 우크라이나 정교회 사제의 집전 아래 장례식이 시작됐다. 무거운 공기를 뚫고 여기저기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들이 담긴 관 앞에 선 늙은 어머니는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식이 진행되는 동안 어머니와 누나, 군인의 아내는 신음을 내며 울다가 넋이 나가다를 반복했다.
“누군가를 위해 죽는 것만큼 대단한 사랑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나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쳤습니다. 우리는 그를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신부가 말했다. 조문객들은 사블린이 누워 있는 관으로 한 명씩 다가가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한 아름 안고 온 꽃을 선물했다. 고마움과 미안함, 존경과 사랑을 담아서. 가족들의 순서는 제일 마지막이었다. 어머니와 누나는 관에 얼굴을 묻었다. 어깨가 들썩였다. 한참 동안 관을 어루만졌다. 부인은 관에 손을 얹은 채 꾸역꾸역 눈물을 삼켰다.
탕. 탕. 탕. 총소리가 세 번 크게 울려 퍼졌다. 깊게 파인 구덩이 안으로 용사의 관이 내려갔다. 한 군인이 부인에게 다가가 곱게 접은 국기를 건넸다. “그는 영웅이었습니다.” 가족은 구덩이 옆에 높게 쌓인 흙을 집어 관 위로 세 번씩 뿌렸다.
“아들아, 네가 어떻게 우리를 떠날 수 있니. 네가 우리를 구했다. 미안하다… 아들아.”
어머니는 흙 속으로 사라지는 아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외치고 또 외쳤다. 부인은 사람들이 자리를 뜨기 시작하자 그제야 남편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다. 분홍 장미 한 다발을 내려놓고 고개를 떨궜다. 장례식을 마친 뒤 사블린 선임병의 누이인 나탈리아(47)는 “조국을 수호하러 가기 전부터, 그 후에도 그가 언제나 자랑스러웠다”며 “그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었고, 결코 자신만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매일 고향 땅으로 돌아가는 영웅들
이후에도 사흘 연속 매일 같은 곳에서 장례식이 열렸다. 6월19일에는 교전 중 숨진 세르히 페트로브치 마진 중령, 6월20일에는 도네츠크 지역에서 전투 중 숨진 블라디슬라브 볼로드미로브치 안드레예브가 고향 땅으로 돌아와 묻혔다.
우크라이나 정부 발표에 따르면 동부 돈바스(루한스크주·도네츠크주 일대) 지역에선 최근 매일 200명 이상이 숨지고 있다. 군인들의 주검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데는 숨진 뒤부터 일주일가량 걸린다. 이렇게 최전방 전사자의 장례가 우크라이나 곳곳에서 날마다 치러진다.
부차·이르핀·보로댠카·드미트리우카·키이우(우크라이나)=
글 노지원 <한겨레> 기자 zone@hani.co.kr, 사진 김혜윤 <한겨레> 기자 uniqu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