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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유럽

군화 신은 발레리나 “전쟁의 끝, 온다” [우크라 현지 인터뷰]

등록 2022-06-21 14:21수정 2022-06-21 21:45

우크라이나를 다시 가다 (19)
국토방위군 ‘스비트라나’
17일(현지시각) 오후 우크라이나 보로댠카 임시 시청건물에서 대학에서 발레를 가르치다 국토방위군이 된 스비트라나 레그라가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보로댠카/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17일(현지시각) 오후 우크라이나 보로댠카 임시 시청건물에서 대학에서 발레를 가르치다 국토방위군이 된 스비트라나 레그라가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보로댠카/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전쟁이 시작됐다. 그녀는 발레 슈즈를 잠시 벗어두고 ‘군화’를 신었다. 전쟁은 발레리나를 ‘전사’로 바꿔놨다.

17일(현지시각) 낮, 스비트라나 레그라(44·Svitlana Legra)가 보로댠카시 인도 지원 부서 사무실로 들어섰다. 모든 사람이 그를 반겼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환한 미소로 환대했다. 그를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짙은 올리브색 캡 모자와 티셔츠, 바지까지…군인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인도 지원 부서는 보로댠카 제2학교 1층 교실을 사무실로 빌려 쓰고 있다. 학교 한 곳만 빼고 모든 관공서가 파괴됐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 외곽도시, 그중에서도 보로댠카는 러시아군의 폭격이 가장 격렬했던 곳이다. 이곳에 한때 집이 있었다는 사실도 알 수 없을 만큼 완벽하게 무너져 내린 건물이 즐비하다. 키이우 주변 도시 중 경제 수준도 그리 높은 편이 아니다.

“(군복을 입은 내 모습이) 이상해 보이나요? 사실 저는 문화대학에서 무용을 가르치는 선생님입니다.”

무용수 스비트라나는 지난 3월 국토방위군에 합류했다. 전쟁이 시작된 지난 2월24일 키이우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던 것이 계기가 됐다. 그는 전쟁 초기 키이우에 피난민을 위한 쉼터를 열었고, 100명 넘는 이들과 함께 생활했다. 사람들을 돌보는 데서 나아가 전방의 군부대, 러시아군에 점령된 도시의 병원들로 각종 물자와 구호품을 전달했다. 이를 위해 동료들과 대형 창고 3곳을 마련했다. 하지만 시민 신분으로 ‘후방 지원’을 하는 데에는 여러 어려움이 따랐다.

“신뢰할 수 없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어요. 물건을 훔쳐가는 이들, 공격적인 사람들…좋지 않은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국토방위군에 경비를 요청했어요. 우리 건물에는 아이들이 살고 있었고 몇 가지 중요한 의약품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한밤중 창고 앞을 지키고, 군을 돕는 모습을 본 국토방위군 사령관은 그에게 “직접 영토 방어에 참여해달라”고 요청했다. 스비트라나는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때부터 전방의 군을 지원하는 일에 참여하면서 육군 기지와 병원을 누볐다. 지역 사회 곳곳을 돌며 전쟁 속 삶이 무너진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잠시 발레 슈즈를 다시 신고 공연을 하기도 했다. 스비트라나와 동료들은 보로댠카를 비롯한 키이우 외곽 마을에서 8차례 공연을 했다. 그럴 때마다 동료들은 스비트라나에게 “(군인이) 군화 대신 발레화를 신은 거냐”며 놀렸다.

17일(현지시각) 오후 우크라이나 보로댠카 임시 시청건물에서 대학에서 발레를 가르치다 국토방위군이 된 스비트라나 레그라가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보로댠카/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17일(현지시각) 오후 우크라이나 보로댠카 임시 시청건물에서 대학에서 발레를 가르치다 국토방위군이 된 스비트라나 레그라가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보로댠카/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스비트라나는 지역 사회 구호 활동과 함께 국토방위군으로서 사격 연습 등 군사 훈련을 받아야 한다. 그럴 때마다 동료들은 스비트라나의 사격 자세가 ‘너무 우아하다’고 농담을 한다. 정해진 시간에 특정 장소에서 경비도 선다. 보로댠카와 같은 러시아군에 파괴된 도시를 찾아 집 짓는 일을 돕고, 겨울용 난방 기기를 사러 다닌다.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동부전선의 병사들에게 보낼 식량, 전투복을 전달하는 일도 한다. “지휘관은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계속하게 해줘요. 제가 보초를 계속 서는 것보다 차를 몰고 다니며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더 의미있는 일이라는 걸 잘 알죠. 저는 집에 있는 시간보다 현장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아요.”

스비트라나의 허리춤에는 총집을 매달 고리가 있지만, 그는 최근엔 총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총을 보관하지만,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에 지니고 다니진 않아요. 시민들과 아이들이 총을 가진 사람을 무서워하거든요.” 국토방위군 복무 초기 두 달은 항상 총을 지니고 다녔지만, 이제는 잠시 총을 내려뒀다.

17일(현지시각) 오후 우크라이나 보로댠카 임시 시청건물에서 대학에서 발레를 가르치다 국토방위군이 된 스비트라나 레그라가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다 전쟁의 끝에 대해 이야기하다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 보로댠카/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17일(현지시각) 오후 우크라이나 보로댠카 임시 시청건물에서 대학에서 발레를 가르치다 국토방위군이 된 스비트라나 레그라가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다 전쟁의 끝에 대해 이야기하다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 보로댠카/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전쟁의 전망을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스비트라나는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군인들이 그만 죽었으면 좋겠다. 사망자가 너무 많다”라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하지만 이내 단호한 목소리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위대한 국가다. 전 세계에 보여줬다. 우리가 단결했으니 100% 승리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우리의 땅을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선의 동료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지만 그럼에도 우크라이나는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의에 찬 표정이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난 다른 나라 깃발 아래서 살지 않을 거예요. 빼앗긴 크림반도와 모든 영토를 해방시켜야 합니다. 재건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시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를 찾아갈 겁니다.”

지난 2021년 1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전면화되기 직전 우크라이나 여성 5만7천명이 우크라이나 군에 복무 중이었다. 전체 국군의 22%에 달하는 수치다. 이 가운데 3만2천명이 실제 군사 작전에 투입된다. 스비트라나처럼 우크라이나 국토방위군(예비군, 시민군)으로 복무 중인 여성은 올해 초 기준 전체 우크라이나 국토방위군의 8%를 차지한다.

보로댠카/노지원 기자 z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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