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유럽의회 한반도관계대표단 소속 미힐 호헤빈 의원이 서울 마포구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한 뒤 사진 촬영에 응하고 있다. 노지원 기자
“‘비핵화’라는 결론을 앞세워서 협상을 시작한다면 북한이 받아들일 길이 없다. 북한이 사실상 ‘핵보유국’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유럽의회 한반도관계대표단에 속한 미힐 호헤빈(Michiel Hoogeveen·33) 의원이 19일 서울 마포구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에서 <한겨레>와 만나 현재 완전히 멈춰 있는 ‘한반도 비핵화’를 둘러싼 대화와 북의 핵 보유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그는 “나는 현실주의자”라면서 “‘세계가 어떠해야 하는지’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볼 때 이런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30대 초반인 호헤빈 의원이 유럽의회에 입성한 것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불이 아직 남아 있던 2019년이다. 현재 경제통화위원회 부의장을 맡고 있고 국제무역위원회, 한반도관계대표단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네덜란드 보수 정당인 JA21(해법21) 출신이다. 사회과학 연구자 시절 “북한의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기 위해” 2014년부터 세 차례 평양, 원산, 금강산, 마식령 스키장 등 북한 현지를 둘러봤다. 그가 북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고교 재학 시절 북한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를 본 뒤였다. 대학에서 경영학, 대학원에서 국제정치를 공부하면서 ‘무역을 통해 북한을 바꿀 수 있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 개성공단 등을 주제로 연구도 했다. 직접 북에 가보게 된 계기가 된 것은 연구자 시절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했던 발표였다. 현장에 온 북쪽 연구자와 치열한 토론을 벌인 뒤 직접 북한을 방문했다.
호헤빈 의원은 “북한은 스스로 한반도 비핵화를 기꺼이 하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비핵화라는 최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십 년 세월이 걸린다”고 말했다. 미국 등 서방이 대화를 시작하며 북한의 선비핵화 조치를 요구하는 것은 현실적인 해결책이 아닐 뿐 아니라 대북 협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북은 이미 핵을 보유하고 있고, 이를 날려버릴 여러 사거리의 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다. 6차례에 걸친 핵실험도 한 사실상 ‘핵보유국’에게 무조건 비핵화를 요구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이라는 게 호헤빈 의원의 생각이다. 그는 “북한은 핵실험을 했고,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 이것들을 얻기 위해 수십억 달러를 투자했다”며 “대통령, 정책입안자, 협상가들이 끊임없이 저지르는 실수는 북한과 협상을 ‘비핵화’라는 결론과 함께 시작한다는 것이다. 북한이 받아들일 리가 없다”고 말했다.
호헤빈 의원은 윤석열 정부가 비핵화 로드맵으로 제안한
‘담대한 구상’(“북한이 핵 개발을 중단하고 실질적인 비핵화로 전환한다면 그 단계에 맞춰 북한의 경제와 민생을 획기적으로 개선”)은
“이명박 대통령의 ‘비핵·개방 3000’을 떠올리게 한다”고 했다. 그는 “(북한에) 핵무기 보유고를 보여달라, 핵무기를 포기하라, 그러면 우리가 북한에 ‘맥도널드’를 들여오고 투자를 하겠다는 것과 다름없다”며 “북한 말에 따르면 이는 ‘뇌물’을 줄 테니 핵을 포기하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아가 북한 입장에서 이는 ‘미 제국주의’에 굴복해 뇌물을 받는 거나 다름없어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윤 대통령이 북한에 “경제적 투자를 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지지하지만 결론을 내고 협상을 시작하면 절대 북한과 대화에서 성공할 수 없다. 정말 북한 핵무기를 없애고 싶다면 더 핵무기 이야기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꼬집었다.
미국 바이든 정부에 대해서도 신랄한 평가를 했다. 그는 미국이 북핵 정책에 대해선 “오바마 행정부와 같은 ‘
전략적 인내 2.0’을 하고 있다. 잘못된 방향이다”라고 지적했다.
나아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임기(2011년 12월)를 시작하기 두 달 전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군의 공습으로 리비아 국가원수 무아마르 카다피가 사망한 것, 1994년 안전보장을 대가로 핵을 포기했던 우크라이나가 현재 러시아에 침공당한 사례 등을 봐도 북한이 선제로 핵을 포기할 가능성 현저히 낮다고 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와 미국의 대북 경제 제재의 효용성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각을 나타냈다. 그는 대북 경제 제재의 부작용에 대해 “제재가 (애초 목표와 달리) 정권이 아니라 원산의 어부, 사리원의 농부 등 일반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며 이는 정권이 ‘미국 등 서방 때문에 북한이 가난해지고 있다’고 말할 명분을 준다고 말했다. 호헤빈 의원은 북한 현지를 둘러본 뒤 “제재가 잘못된 사람들을 겨냥하고 있다는 것을 봤고 관점이 많이 바뀌었다”며 “제재가 정권을 보다 강해지게 한다”고 말했다. 이뿐 아니라 는 중국이 있는 한 대북 제재가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기 어렵다면서 “중국은 완충 지역으로서의 북한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국제사회 제재에 동참하더라도 북한에 계속 생명줄이 돼 줄 것이다”라고 진단했다.
그는 “‘북한에 맥도널드가 들어오게 해주겠다’는 식의 접근이 아니라 개성공단처럼 합작법인을 설립하는 식의 사업부터 시작해볼 수 있다”는 대안을 내놨다. “북한에 있을 때 이런 종류에 투자엔 기꺼이 참여하리라는 것을 느꼈다”며 이를 통해 “신뢰를 구축”해야 한다고 했다. 초반부터 비핵화 약속을 받아내기보다는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 이산가족 상봉 등 문화, 경제적 교류”부터 시작하면 남북, 북-미간 신뢰가 생기고, 이를 바탕으로 비핵화 협상이 추동력을 얻을 수 있다는 결론이다.
노지원 기자
zon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