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8일 핀란드 수도 헬싱키에서 열린 시위에 참가한 한 시민이 “나토 (가입 논의)를 중단하라”고 쓴 손팻말을 들어 보이고 있다. 헬싱키/조일준 기자
[강대국 사이에서] ① 핀란드
하우칼라 핀란드 외무부 자문관 인터뷰
하우칼라 핀란드 외무부 자문관 인터뷰
“냉전시기 긴장과 대립 속에서 중립을 지키는 것은 급류에서 카약을 타는 능력을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항상 ‘어려운 분투’를 해왔습니다.”
히스키 하우칼라 핀란드 외교부 특별자문관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옛소련 붕괴까지 반세기 가까이 지속된 동-서 냉전 체제가 핀란드의 생존에 매우 적대적인 환경이었다고 회고했다. 그 시기 핀란드가 선택한 중립외교의 경험과 교훈을 <한겨레>가 지난달 핀란드 수도 헬싱키에서 하우칼라 자문관을 만나 들어봤다.
2차 대전 뒤 소련의 포섭 거부
자주국방 능력 있었기에 가능 외교안보 정책은 일관성이 중요
정권 바뀐다고 급격한 변화 안돼 EU 가입으로 ‘중립’ 의미 퇴색
최근 러시아의 확장은 큰 도전
-냉전이 한창이던 1975년 헬싱키 협정으로 시작된 동-서 진영의 안보협력체제인 ‘헬싱키 프로세스’가 올해로 40주년을 맞는다. 핀란드가 중립국 지위여서 이런 과정을 주도할 수 있었나?
“헬싱키 프로세스는 핀란드가 첫 회의 주최국이었고 헬싱키에서 최종협약이 서명됐다는 점에서 핀란드가 초기 주도권을 행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젠 그것은 더 이상 핀란드만의 것이 아니다. 범유럽과 미국, 중앙아시아까지 폭넓게 아우르는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핀란드는 냉전 시기 중립화 노선을 지켜왔다. 동-서 두 진영의 바깥에 있었기 때문에 양쪽의 ‘만남의 장’이 될 수 있었다. 1980년대 말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 1990년대 중반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핀란드에서 만났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핀란드는 그런 지위를 잃었다. 핀란드가 정치적으로는 이제 더 이상 중립이 아니며 유럽연합 일원이기 때문이다. 이젠 영세중립국인 스위스가 그런 역할을 맡고 있다.”
-옛소련 붕괴 이전엔 핀란드의 중립주의가 핀란드의 안보와 평화 주도국 구실에 도움이 됐나?
“핀란드가 조타수나 오케스트라 지휘자였던 건 아니다. 핀란드는 단지 국제사회에 기회를 제공하고 좋은 중재자 구실을 했다. 냉전 시기 핀란드가 중립을 유지한 것은 우리의 생존방식이자, 핀란드의 중립이 다른 나라들에도 좋다는 걸 강조하기 위한 외교안보 정책이기도 했다.”
-중립 선언만으로 중립이 보장되는 건 아닐 텐데, 중립화 노선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은 우리를 공산권 블록으로 끌어들이고 싶어했지만 핀란드는 그걸 원치 않았다. 우리는 그런 압박에 저항할 수 있는 힘, ‘조용한 국방력’을 갖추고 있었다. 또 급류를 헤쳐갈 뛰어난 리더십과 아주 좋은 외교가 있었다. 우르호 케코넨 대통령(재임 1956~1981)이 장기집권을 했지만 외교안보 분야에서 특히 뛰어난 리더십을 보여줬다. 약간의 운도 따랐는데, 작은 나라는 운도 좀 필요하다.”
-지금 핀란드는 군사동맹에는 참여하고 있지 않지만 정치적으로는 중립이 아니라고 했다. 친유럽 서구화를 공식화한 것인가?
“핀란드의 정체성은 본디 항상 서구였다. 냉전 시기에도 그랬다. 냉전 이후 핀란드의 변화는 ‘서구화’가 아니라 ‘세계화’다. 오늘날엔 세계화 역량이 훨씬 더 중요하다. 모든 나라가 네트워크로 서로 연결돼 있다. 특히 작은 나라의 안보는 유럽연합이나 유엔 같은 국제기구 없이는 매우 취약하다. 핀란드의 안보는 이런 네트워크에 의지하는 것이다. 우리는 러시아도 이런 네트워크에 참여해 협력하고 자기 지위를 찾기를 바라지만, 지금의 러시아는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상황이 핀란드가 당면한 큰 도전이다.”
-러시아가 왜 주변국에 개입하고 세력을 확장하려는 공세적 태도를 취하는가? 블라디미르 푸틴 정부가 러시아 내 민족주의 정서를 이용한다고 보나?
“외교부 관리로서 답변하기에 부적절할 수 있다.(웃음) 러시아의 확장 동력을 민족주의와 정치적 포퓰리즘으로 볼 수도 있다. 민족주의는 매우 강력하지만 동시에 매우 위험한 힘이다. 하지만 민족주의 팽창은 러시아만이 아닌 세계적 현상이다. 유럽연합, 중국, 일본도 마찬가지다. 한 집단이 자신의 특별함과 우월성을 강조하고 타자를 배제하는 건 위험하다. 전쟁은 바로 그런 것들을 재료로 만들어진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는다. 긍정적 민족주의는 자신뿐 아니라 상대에게도 호혜적이다. 반면, 쇼비니즘(광신적 애국주의)은 증오·전쟁·불관용을 가져오는 파괴적인 힘이다. 정치 지도자들은 이런 흐름을 부추길 게 아니라 억제할 책임이 있다.”
-핀란드에서도 정권이 바뀌면 안보정책의 구체적 방향도 바뀌는가?
“우리의 역사적 교훈은 외교안보 문제는 하나의 비전과 컨센서스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과거 케코넨 대통령은 정치인이 대외적으로 핀란드 외교안보 정책과 어긋나는 발언을 하면 직접 편지를 써서 지적하기도 했다. 지금은 합의를 위한 합의는 사라졌지만, 합의를 이뤄가는 문화는 여전하다. 또 핀란드는 독보적으로 강한 정당이 없어 연립정부를 이뤄왔으므로, 외교안보 정책의 급격한 변화는 어려울 것이다.”
-한반도는 지금도 남북한이 분단된 채 미국·중국·일본·러시아 등 강대국의 패권주의와 군사적 대립의 한복판에 있다. 핀란드의 경험에서 교훈을 찾을 수 있나?
“핀란드는 인접국 러시아와 1000년 이상 관계를 맺어왔다. 모든 걸 다 해봤다. 협력도 해보고 전쟁도 해봤다. 그리고 얻은 결론은 협력이 더 낫다는 것이다. 윈스턴 처칠도 ‘협상이 언제나 전쟁보다 낫다’(To jaw-jaw is always better than to war-war)고 하지 않았나. 그러나 탄탄한 자주국방 능력을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
헬싱키/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자주국방 능력 있었기에 가능 외교안보 정책은 일관성이 중요
정권 바뀐다고 급격한 변화 안돼 EU 가입으로 ‘중립’ 의미 퇴색
최근 러시아의 확장은 큰 도전
하우칼라 자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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