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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유럽

러시아-유럽 사이 갈팡질팡하다…내전 소용돌이 속으로

등록 2015-05-25 21:43수정 2015-05-26 10:54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의 독립광장(마이단)과 주변에는 지난해 초 ‘유로마이단’ 시위 때 숨진 100여명의 시민들을 추모하는 꽃과 초를 비롯해 희생자 사진, 추모비, 십자가, 그리고 시위 당시 사용했던 방탄 헬멧과 바리케이드 잔해들이 곳곳에 전시돼 있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의 독립광장(마이단)과 주변에는 지난해 초 ‘유로마이단’ 시위 때 숨진 100여명의 시민들을 추모하는 꽃과 초를 비롯해 희생자 사진, 추모비, 십자가, 그리고 시위 당시 사용했던 방탄 헬멧과 바리케이드 잔해들이 곳곳에 전시돼 있다.
[강대국 사이에서] ⑤ 우크라이나
마이단, 열망과 혼돈의 광장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의 도심 한복판에는 ‘마이단 네잘레즈노스티’(독립 광장)가 있다. 1991년 소련의 붕괴로 우크라이나가 독립하면서 이런 이름을 얻었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그냥 ‘마이단’(광장)으로 줄여 부른다.

지난달 27일 찾아간 이 곳은 유럽의 여느 도심 광장과 다를 게 없이 평온해 보였다. 시민과 관광객들로 적당히 붐볐다. 광장 주변엔 고딕, 비잔틴, 바로크 양식의 고풍스런 건축물과 다양한 조각상들이 예술적 정취를 자아냈다.

그러나 광장 주변에는 지난해 반정부 시위 때 바로 이 곳에서 숨진 이들을 추모하는 상징물들이 곳곳에 놓여 있다. 추모비, 십자가, 희생자 사진, 꽃송이, 촛불, 방탄 헬멧, 그리고 온갖 구호가 적힌 포스터들…. 키예프의 한 대학에서 한국어 강사로 일하는 따냐 보댜니츠카(28)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기념물들을 가져다 놓으면서 자연스럽게 추모 공간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광장 주변 어느 집의 출입문 석조기둥에는 “엄마, 금방 돌아올게요”라고 쓴 스프레이 낙서가 지금도 선명했다.

이 광장에선 2013년 11월부터 2014년 2월까지 석달 동안 친유럽 정책과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유로마이단)가 일어났다. 거의 매일 많게는 50만명이 모였고, 경찰의 무력 진압과 저격수들의 발포로 최소 130명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유럽연합(EU)과의 경제협력 협상을 전격 중단하고 친러시아 정책으로 돌아선 게 발단이었다.

시위는 급기야 친러 대통령 탄핵→친서방 정권 선출→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동부 돈바스 지역 친러 분리주의 세력의 독립 선언→내전 발발까지 숨가쁜 격변으로 이어졌다. 지난 2월 독일과 프랑스의 적극적 중재로 정부군과 친러 반군이 두 번째 휴전협정을 맺기까지 양쪽에서 60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제 ‘유로마이단’은 단순히 ‘광장’을 넘어 우크라이나의 ‘반러 독립투쟁’을 상징하는 낱말로 의미가 확장됐다. 광장은 자주독립의 열망과 주변 강대국의 패권경쟁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 내전까지 치달은 우크라이나의 외교안보 현실이 뒤엉킨 공간이다.

냉전 해체뒤 탈러시아 가속
2013년 겨울 민주화 시위 통해
친러→친서방 정권 바뀌었지만
러시아 개입으로 내전 이어져

급속한 서구화에 러시아계 반발
안보보장 각서도 휴짓조각으로
러시아-유럽 사이 해법찾기 험난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 시내에 있는 한 대학의 무인기(드론) 교육센터에서 군복을 입은 남성들이 여성 강사로부터 비행 시뮬레이션 교육을 받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 시내에 있는 한 대학의 무인기(드론) 교육센터에서 군복을 입은 남성들이 여성 강사로부터 비행 시뮬레이션 교육을 받고 있다.
러시아가 아니라 유럽이고 싶다

키예프 시내의 한 대학에는 무인기(드론) 교육센터가 있다. 우크라이나 동부 내전의 최전선에서 무인기를 이용해 항공정찰을 하는 요원들을 양성하는 곳이다. 기자가 이 곳을 찾은 지난달 27일, 강의실에는 군복을 입은 건장한 사내들이 노트북 컴퓨터를 펴놓고 젊은 여성 강사로부터 비행 시뮬레이션 교육을 받고 있었다. 이 센터는 설립에서부터 시설운용과 교육장비 마련, 이론 수업과 조종 실습까지 모든 과정이 우크라이나 시민들의 자원봉사로 이뤄진다. 수강생들에겐 무료 숙식이 제공된다. 교육센터의 홍보 담당 자원봉사자는 “올해 1월부터 4월 중순까지 3기 40여명이 교육을 마치고 도네츠크와 루간스크의 전선으로 갔다”고 말했다. 이들에게 적어도 지금의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최대 교역국인 이웃나라가 아니라 조국의 앞길을 막는 적국이다.

바로 이날 키예프의 대통령궁에선 도날트 투스크 유럽연합(EU) 정상회의 상임의장과 장 클로드 융커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이 페트로 포로셴코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만나 우크라이나 지원 방안을 논의했다. 유럽연합 최고 지도부의 우크라이나 방문은 지난해 6월 양쪽이 자유무역을 포함해 포괄적인 헙력협정을 맺은 이후 처음이었다. 포로셴코 대통령은 이날 우크라이나의 유럽연합 가입 의사를 거듭 밝히고 정치·경제·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 유럽연합은 극심한 경제난에 빠진 우크라이나에 앞으로 수년간 110억유로 상당의 차관과 무상공여 등을 지원할 계획이다.

지난해 우크라이나 동부 내전과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을 계기로, 우크라이나는 ‘탈러 입구’(러시아 탈출과 유럽 진입)에 더욱 속도를 내고 있다. 지난 21일 우크라이나 의회는 러시아와의 군사분야 협정 5건을 폐기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포로센코 대통령의 서명은 남은 절차에 불과하다. 앞서 지난 15일에는 ‘비공산화 법률’(Decommunization Bills)들이 대통령 서명으로 정식 발효됐다. 비공산화법은 과거 우크라이나가 소비에트연방에 편입돼 있던 시절의 모든 역사적 유물과 상징, 사회제도와 문화 등을 폐기하고 금지하는 것이 뼈대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지금처럼 극한 대립으로 치닫게 된 직접적 계기는 우크라이나의 급격한 정책 변화에서 비롯했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우크라이나가 독립하기까지 200년 동안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직·간접적인 통치권이나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동서 냉전의 해체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통제를 벗어나 민족국가로 완전히 독립하기에 좋은 기회였다. 특히, 1994년 우크라이나는 미국·러시아·영국과 함께 서명한 ‘부다페스트 안전보장 각서’를 통해, 소련 붕괴 뒤 남겨진 4000여개의 핵무기를 포기하는 대신, 독립과 주권과 국경선을 보장받는 국제 합의까지 이뤘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2013년말께 유럽과 러시아 사이에서 균형을 잃고 급격하게 친서방 노선으로 돌아서면서 전체 인구의 17%를 차지하는 러시아계 주민들의 반발을 샀다. 러시아가 개입하는 명분도 여기에서 비롯했다. 두 나라의 안보 협력을 규정한 ‘부다페스트 각서’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령 크림반도를 합병하면서 사실상 휴짓조각이 됐다. 러시아는 “크림 지역의 분리는 우크라이나 내부의 정치·사회·경제적 위기에 따른 것으로 부다페스트 각서의 적용 대상이 아니다”고 주장한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의 독립광장(마이단) 주변에 지난해 초 ‘유로마이단’ 시위 때 숨진 100여명의 시민들을 추모하는 꽃과 초, 추모비, 십자가 등이 전시돼 있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의 독립광장(마이단) 주변에 지난해 초 ‘유로마이단’ 시위 때 숨진 100여명의 시민들을 추모하는 꽃과 초, 추모비, 십자가 등이 전시돼 있다.

걷히지 않는 불신, 그치지 않는 총성

러시아로선 남서쪽 접경국인 우크라이나의 ‘유럽화’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우크라이나가 공언하는 ‘유럽연합 및 나토 가입’은 러시아로선 턱밑에 적대세력이 들어서는 것이다. 또, 내해에 가까운 흑해에서 유럽의 안마당인 지중해로 나아가는 전략적 요충지의 통제권이 도전받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서방’ 세력에 대한 러시아의 깊은 불신과 배신감도 문제 해결을 더욱 어렵게 하는 주요 원인이다. 현재 유럽의 안보구도는 서유럽과 미국을 한 편으로 하는 해양세력과 러시아를 중심으로 ‘유라시아 구상’을 앞세운 대륙세력이 충돌하는 모양새다. 앞서 1990년 서방은 러시아에게 동·서독 통일에 대한 양해를 구하면서 군사동맹인 ‘나토’의 동진 확장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지금 나토는 1999년 폴란드·체코·헝가리를 시작으로 냉전 종식 이후에만 신규 회원국을 12개국이나 늘리며 러시아를 압박하고 있다.

정재원 국민대 국제관계학부 교수는 “러시아로선 1991년 소비에트연방 붕괴 이후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서방과 친하게 지내보려 손을 내밀었는데 서방이 이를 외면하고 되레 압박했다고 여길 것”이라고 말했다. “서방의 민주화 논리에 박탈당하고 이용당하면서 한때의 대제국이 2류 국가로 전락한다는 위기감”이 팽배하다는 얘기다. 우크라이나의 ‘탈러 입구’ 일변도의 외교안보 정책은 의도했든 아니든 러시아에게 중대한 도전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반면, 서방의 입장에서는 ‘21세기 차르’로 불리는 푸틴이 주도하는 러시아 제국의 부활 시도가 달가울 까닭이 없다. 우크라이나는 두 거대 세력이 상대를 견제하는 대리전의 전장이 되고 있다. 최근 우크라이나 안보국방위원회의 알렉산드르 투르치노프 서기는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러시아의 위협을 줄이기 위해 우크라이나 영토에 미국의 미사일 방어(MD) 시스템을 배치하는 협상을 할 수 있다”고 말해, 러시아의 심기를 극도로 자극했다. 러시아는 즉각 “우리도 대응 조처를 취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그런 계획은 전망이 없고 비건설적이며 세상을 흔드는 발언에 지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우크라이나 동부에선 지금도 총성과 포격이 그치지 않는다. 정부군과 반군은 서로 상대가 휴전협정을 위반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지난 2월 정부군과 친러 반군이 국제사회의 중재로 두번째 휴전협정을 맺은 게 무색할 정도다. 지난달 기자가 키예프에서 만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성향의 조국당 소속인 이고르 뤼첸코 의원은 “지금 우크라이나의 상황은 완전히 ‘카오스’(혼돈) 상태”라며 “제2, 제3, 아니 10번째 민스크 협정이 이뤄져도 분리주의 반군의 배후인 러시아가 물러서지 않는 한 진정한 평화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자가 지난달 우크라이나 현지 취재를 하던 닷새 내내 우리나라 외교부는 현지 여행객을 대상으로 “우크라이나 오데사 지역 및 크림지역 특별여행주의보 발령”,“동부지역에 적색경보(철수 권고)”같은 휴대폰 문자 메시지를 발송했다.

기자는 우크라이나 동부 내전의 전투원으로 자원해 참여한 한 20대 후반의 여성 전사를 키예프의 한 펍(선술집)에서 만났다. 그는 인터뷰가 끝난 뒤 마침 그 곳에 와있던 친구들을 소개해줬다. 그들은 자신의 삶과 나라의 불투명한 미래를 걱정하면서도 젊은이 특유의 패기와 낙천적인 여유를 잃지 않고 있었다. 객관적 현실과 국제관계의 힘의 논리만 보면 눈앞의 우크라이나 미래는 아직 밝지 않다. 그들에게 그런 말을 차마 할 수는 없었다. <끝>

키예프/글·사진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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