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렉시트 찬성-반대를 앞두고 피말리는 접전 끝 찬성파 승리
“독립된 영국의 새벽이 밝아왔다.” 길고 지루했던 ‘런던의 잠 못 이루는 밤’이 지나고 24일(현지시각) 새벽이 되자 충혈된 눈빛의 나이절 패라지(52) 영국 독립당 당수가 지지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놓고 밤새 엎치락뒤치락했던 국민투표 결과가 ‘탈퇴파’의 승리로 굳어져가고 있을 때였다. “이것은 옳은 사람들, 보통 사람들, 양식 있는 사람들의 승리입니다.” 격앙된 패라지의 연설이 이어질 때마다 주변을 둘러싼 지지자들이 환호의 함성을 질러댔다. 그는 이어 “우리는 다국적 기업과 대형 상업은행과 거대한 정치와 거짓말과 부패와 속임수와 싸웠다”며 “오늘 정직과 품위와 국가에 대한 믿음이 승리할 것이다”라고 기세를 높였다. 지지자들 가운데 한 50대 남성은 “오늘은 독립기념일”이라고 외치기도 했다. 그로부터 몇시간 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관저 앞 다우닝 10번가에서 사임 기자회견에 나섰다. 영국 저널리스트 퀜틴 레츠는 “다우닝가의 분위기는 장례식장 앞과 같다. 언론의 문상객들이 충혈된 눈으로 친구들과 고개를 끄덕이며 과장된 걱정을 하며 모여들고 있다”고 전했다. 총리의 사임 회견을 전하려는 취재진과 관광객들이 엉켜 현장에선 극심한 혼란이 이어졌다. 자신을 21살이라고 밝힌 한 대학생은 “미래가 사라졌다”며 “나는 영국인인 동시에 유럽인이다. 유럽연합은 나에게는 기회이자 희망의 보고였다”고 말했다. 잔류파인 20~30대 젊은이들이 모인 집회장에선 많은 이들이 머리를 감싸쥔 채 눈물을 흘렸다. 이번 결과를 바라보는 런던의 시선은 연령에 따라 극명하게 갈렸다. 오전 8시께 런던 시내 중심가 트래펄가 광장에서 만난 여성 대니엘(30)은 “결과가 이렇게 나올 줄 몰랐다”며 놀라워했다. 영국 국민건강보험(NHS)에서 일한다는 그는 “당장 유럽연합에서 오는 지원금이 줄지 않을까 걱정이다. 실업률이 높아질 수도 있다. 사람들이 큰 그림을 보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영국에서 오래 일했다는 이탈리아 출신 파울라(55)도 떨리는 목소리로 “영국의 유럽연합 잔류로 결정날 것으로 예상했다. 유럽연합이 나타내는 사회적 개방의 개념을 지지했는데 실망스럽다”고 말했다. 제임스(27)는 “경제도 걱정이지만 사회적인 분열이 큰 문제다. 영국 국민 중 절반은 인종차별주의자에 이기적인 사람들이라는 얘기가 됐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견줘 찬성표를 던진 이들은 대부분 ‘대영제국’에 대한 추억을 간직한 50대 이상의 중·노년층이었다. 이들이 강조한 것은 유럽연합이 그동안 영국의 정책 자율성을 지나치게 제한해 왔다는 점이었다. 마거릿 굴(62)은 이날 투표 결과를 “매우 흥분되는(exciting) 것”이라며 “축하할 일이고 매우 합리적인 일이다. 한국의 일에 일본이 간섭하면 좋겠느냐. 영국이 고립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무역은 계속 이뤄질 것이다. 나라가 없어지는 게 아니다”고 말했다. 역시 찬성표를 던진 마커스(54)도 “유럽연합 탈퇴로 영국은 더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본다. 유럽 단일 시장 이념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유럽연합이 마음대로 정하는 단일 시장은 부당하다”고 말했다. 이들은 탈퇴에 찬성한 이들이 이민에 부정적이고 인종 차별주의자라는 일부의 지적에 대해서도 “그렇지 않다”며 적극적으로 반박했다. 이번 사태가 앞으로 영국과 세계에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에 대해선 누구도 확신하지 못했다. 당장 우려되는 것은 압도적으로 ‘잔류’를 선택한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의 동향이다. 당장 북아일랜드의 마틴 맥기니스 부총리는 아일랜드와 통합을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할 것을 제안했다. 국민투표가 끝난 뒤 시민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브렉시트가 갈라 놓은 영국 사회의 분열이 회복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어쩌면 영원히 극복되지 못할 처참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영국인들이 앞으로 이어질 거대한 혼란의 문을 제 손으로 열어젖혔다는 것이다. 런던/조기원 기자 gard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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