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8일 유럽 위원회 회의 뒤 기자회견에서 발언을 마치고 마스크를 쓰고 있다. 베를린/EPA 연합뉴스
미국이 제안한 코로나19 백신의 지식재산권(지재권) 보호 유예 조치에 대해, 유럽 정상들이 모여 반대 입장을 재확인하며 “백신 수출 제한을 푸는 것이 먼저”라고 오히려 미국을 정조준했다. 백신 지재권 논의가 지재권의 효력 정지를 요구하는 미국과 이에 반대하는 유럽연합의 정면충돌 양상으로 전개되는 모양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7~8일(현지시각) 화상으로 열린 유럽연합(EU) 정상회의 뒤 “백신의 지재권 유예가 더 많은 사람에게 백신을 공급하기 위한 해결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그 대신 백신 생산 증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가 8일 보도했다. 이를 위해 그는 전 세계 많은 나라에서 백신이 생산될 수 있도록 면허 허가가 늘어나야 한다고 밝혔다.
메르켈 총리는 또 “미국은 백신과 백신 생산에 필요한 재료들의 국제 유통을 늘리도록 해야 한다”며 “유럽은 유럽에서 생산된 많은 백신 물량을 전 세계에 공급했다. 이것이 규범이 되어야 한다”고 미국의 이기적인 자국 우선주의를 정면 공격했다. 유럽연합은 지금까지 전체 생산량의 절반에 해당하는 2억회 분의 백신을 유럽 밖에 공급한 반면, 미국은 백신의 해외 수출을 거의 하지 않았다고 <파이낸셜 타임스>가 전했다.
임마누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메르켈 총리의 주장에 동조했다. 그는 백신 특허권을 둘러싼 논의가 유효할 것이라면서도 백신 생산을 늘리기 위한 다른 수단이 필요하다며 “미국이 코로나19 백신뿐 아니라 백신 생산에 필요한 재료의 수출 금지 조치를 당장 중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마르크 뤼터 네덜란드 총리는 회의에 참석한 정상들 사이에 백신 지재권 유예에 대한 “전반적인 머뭇거림”이 있었다며 지재권 유예가 기존의 백신 공급망을 교란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전령아르엔에이(mRNA) 백신 생산에는 19개 나라에서 공급되는 280가지의 재료가 필요하며, 여기에는 특허권이 80~100개 관련돼 있는 현실을 지적한 것이다.
백신 제작사도 반대 목소리를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화이자와 독일의 바이오엔테크도 지재권 보호 중지에 반대 목소리를 높였다. 앨버트 불라 화이자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7일 링크트인에 게시한 직원 대상 서한에서 지재권 보호 면제는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고 절대적으로 믿는다”고 밝혔다고 <시엔비시>(CNBC)가 보도했다. 불라 최고경영자는 “현재 우리가 백신을 더 빨리 생산하지 못하게 하는 병목은 인프라가 아니다”라며 “제약요인은 우리 백신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매우 특별한 원료가 부족하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바이오엔테크도 지재권 보호 면제가 코로나19 대유행을 끝낼 적절한 방법이라고 보지 않는다고 8일 밝혔다고 독일 <데페아>(dpa) 통신이 보도했다. 이 회사의 대변인은 지재권 보호는 “우리 백신의 생산이나 공급을 제한하는 요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미국은 백신 지재권의 효력을 정지하더라도 중국, 러시아에 관련 기술이 넘어가지 않도록 하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고 <로이터>가 보도했다. 미국은 지재권 효력 정지로 특히 화이자와 모더나의 전령아르엔에이 기반 백신 기술이 중국, 러시아로 넘어갈 수 있는 점에 우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관련 특허는 이미 접근이 가능하지만, 온도와 같은 생산공정 정보는 영업 비밀로 공개되지 않았다.
박병수 선임기자, 워싱턴/황준범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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