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현지시각) 세상을 떠난 도널드 럼스펠드 전 미국 국방장관이 2003년 2월13일 상원 군사위원회에 출석한 모습. 로이터 연합뉴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시절 국방장관을 지내며 이라크 전쟁을 이끌고 대북 강경파로도 이름을 높인 도널드 럼스펠드가 지난 29일(현지시각) 88살 일기로 숨을 거뒀다.
럼스펠드의 가족은 30일 성명을 내어 그가 전날 뉴멕시코주 타오스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사인은 다발골수종이다. 그의 가족은 “우리는 아내 조이스, 가족, 친구들에 대한 그의 변함 없는 사랑과 그가 나라를 위해 헌신한 삶의 진실함을 기억할 것”이라고 말했다.
럼스펠드는 1975~1977년 제럴드 포드 행정부와 2001~2006년 부시 행정부에서 국방장관을 맡았다. 미 역사상 정부를 바꿔가며 국방부 수장을 두 번 지낸 유일한 인물이다. 그것도 각각 최연소(43살), 최고령(74살) 국방장관이다.
럼스펠드는 부시 행정부 시절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이라는 두 개의 전쟁을 지휘했다. <뉴욕 타임스>는 부시 행정부에서의 럼스펠드는 베트남전쟁 당시 로버트 맥나마라 장관 이후 가장 강력한 국방장관으로 여겨진다고 짚었다. 그는 2001년 1월 취임 뒤 군 관료조직과 무기체계를 간소화화고 미사일방어(MD) 체계 구축, 기동성 강화 등 군 개혁에 열을 올렸다. 하지만 그해 9·11 테러가 발생하면서 미국은 중동 전쟁의 수렁에 빠져들었다.
2001년 10월 아프간을 공격해 전쟁을 벌이는 와중에, 대표적 네오콘(신보수주의자)으로 꼽히는 럼스펠드와 딕 체니 부통령은 이라크에 대량파괴무기(WMD)가 있다며 이라크와 사담 후세인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2003년 3월 시작해 8년여 동안 미국에 7000억달러 비용 지출과 4400여명의 미군 전사자를 안기며 미국을 수렁에 빠뜨린 이라크 전쟁은 럼스펠드 또한 추락의 길로 이끌었다. 미국은 전쟁 시작의 명분이었던 대량파괴무기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라크 전쟁이 길어지며 미군 피해가 늘어가자 럼스펠드에 대한 비판이 고조됐다. 이라크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와 쿠바 관타나모 수용소에서의 포로 학대는 민주당은 물론 공화당에서도 럼스펠드 경질론에 기름을 부었다. 럼스펠드는 2004년 두 차례 부시에게 사의를 밝혔으나 부시는 즉시 수용하지 않았고, 2006년 11월 공화당이 의회 선거에서 완패한 뒤에야 교체했다.
이라크 전쟁은 미국 대외정책의 최악의 실패 사례로 꼽히지만, 럼스펠드는 2011년 펴낸 회고록 <알려진 것과 안 알려진 것>에서 후세인 제거를 강조하면서 이라크 침공 결정에 후회가 없다고 밝혔다. 책 제목은 그가 2002년 의회에서 이라크의 대량파괴무기 보유를 주장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다는 것을 알지만,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또한 존재한다”고 했던 발언에서 따온 것이다.
럼스펠드는 북한에 대해서도 강경 노선을 고수했다. 그는 1998년 북한, 이라크 등의 미사일 위협에 맞서 미사일방어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럼스펠드 보고서’를 만들었다. 2003년 국방장관으로 방한했을 때 북한을 ‘악(evil)’이라고 비난하고, 귀국길에는 “극적인 정권교체가 갑자기 북한을 휩쓸 수도 있다”고 북한을 자극했다. 2006년 9월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부시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럼스펠드를 가리키면서 “이 사람보다는 내가 합리적”이라고 농담하기도 했다.
부시는 럼스펠드 사망 소식에 성명을 내어 “지성, 진실성, 그리고 거의 고갈될 줄 모르는 에너지를 지닌 사람”이라며 애도했다.
럼스펠드는 1932년 7월9일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태어나 프린스턴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30살 때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그는 4선 의원까지 지낸 뒤 리처드 닉슨 행정부에 들어가 경제기회국장, 대통령 자문역 등을 맡았고,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에서는 중동 특사를 맡는 등 4명의 공화당 대통령과 호흡을 맞췄다. 그는 정부 내 다른 장관들, 의원, 군 내부와 자주 의견 충돌을 일으킨 것으로 유명하다. 공직을 맡지 않는 동안에는 제약, 전자 등의 회사 대표를 맡으며 부를 쌓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부인과 세 자녀, 7명의 손주 등이 있다.
워싱턴/황준범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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