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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국제일반

일, 한반도 위기서 기회 잡는데…정부의 위태로운 ‘일본 올인’

등록 2022-11-20 09:04수정 2022-12-03 10:52

[한겨레S] 지정학의 풍경
일본의 동아시아 전략
18일 일본 도쿄의 한 거리에서 북한의 미사일 발사 뉴스를 알리는 대형 모니터 앞을 시민들이 지나고 있다. EPA 연합뉴스
18일 일본 도쿄의 한 거리에서 북한의 미사일 발사 뉴스를 알리는 대형 모니터 앞을 시민들이 지나고 있다. EPA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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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대전 때 일본은 1945년 5월 독일이 항복해 전황이 완전히 결정 났는데도 같이 항복하지 않고 버텼다. 일본 지도부, 특히 군부의 결사항전이라는 몰지각한 정세 판단이 그 이유로 거론된다.

그런 일본이 항복한 까닭은 미국의 원자폭탄 공격으로 엄청난 피해를 보고서야 비로소 그 심각성을 깨달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태평양전쟁 종전에 관한 주류적 시각이다. ‘미국의 원자폭탄’ 때문이 아니라 ‘소련의 참전’ 때문이라는 수정주의적 시각도 있다. 8월9일 대일본 선전포고를 한 소련이 파죽지세로 만주를 석권해, 일본 본토까지 침공 위협을 당하자 일본이 항복했다는 것이다. 소련이 일본 본토로 진군하면, 천황제 등 일본의 정체가 완전히 파괴되고 사회주의화될 것이라는 공포에 서둘러 항복했다는 분석이다.

일본이 2차 대전 때 빨리 항복했다면

이 두 시각은 일본이 정세 판단을 못 하고 무모하게 버티다가 뒤늦게 항복했다는 데 공통점이 있다. 과연 당시 일본 지도부는 절망적인 전황이나 소련의 참전도 예상 못 하는 광기와 기능부전의 상태였을까?

이를 반박하는 주장과 연구도 있다. 당시 일본은 종전 이후에 유리한 입지를 만들려고 항복을 늦추었다는 주장이다. 소련의 참전을 유도해서 동아시아에서 미국-소련 대립 구도를 만들어서 종전 이후 일본의 입지와 역할을 만드는 ‘세력균형책’이었다는 것이다. 일본이 빨리 항복했다면 중국 본토나 만주, 한반도 등 동아시아 전역은 미국의 세력권으로 떨어지게 되는 상황이었다. 그럴 경우, 아무런 견제도 받지 않은 미국은 일본에 가혹한 전후 처리를 강요하고, 전후 일본의 역할과 지위 역시 보잘것없을 것이라고 일본이 계산했다는 것이다. 고시로 유키코 일본대학 교수는 2004년 4월 <미국 역사 리뷰>에 ‘유라시아의 몰락―2차 대전에서 일본의 끝내기 게임’이라는 논문에서 이런 분석을 했다. 유키코 교수는 일본이 1944년 10월 필리핀 근처의 레이테만 해전 패전 때부터 승산이 없음을 알고서, 소련과 미국 사이에서 세력균형을 잡는 종전 전략을 준비했다고 분석했다. 종전 전략 수립을 연구한 다카기 소키치 해군 소장은 1945년 3월 보고서에서, 미국이 아시아에서 소련을 혼자서 상대할 수 없다고 판단될 때만 일본의 역할을 미국이 인정할 것이라고 봤다. 참모본부에서 대소련 종전 공작을 담당한 다네무라 사코 대령도 일본은 미군의 본토 공격과 상관없이 소련이 만주와 한반도에 진주한 뒤에 항복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일본의 종전 전략은 소련의 한반도 진입을 용이하게 하고 미국의 한반도 진입을 저지하는 것이었음을 유키코 교수는 규명하려 했다. 1945년 들어서 일본은 한반도 병력 배치를 조정해, 남쪽에서 미국을 방어하는 데 주력했다. 또, 중국에 있던 병력 100만명을 소련 침공에 대항하려고 만주로 이동시키지도 않았다. 일본 황군에서 최고의 전력이라던 관동군은 소련이 진군하자 별다른 저항도 하지 않고 퇴각했다. 당시 소련군이 1리 전진하면, 일본군은 2리 퇴각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 포츠담선언을 소련이 참전한 지 30시간 만에 수락했다. 일본은 소련의 참전을 유도해 동아시아에서 소련의 입지를 내주고는 미국에 항복한 것이다. 이로써 일본은 미국에 연대해 소련을 견제하는 역할과 지위를 만들 수 있었다.

강화파였던 고노에 후미마로 전 총리는 “소련 참전은 신이 준 선물로, 이제 전쟁을 마칠 수 있다”고 말했다. 종전 이후 일본은 미국의 안보 우산 아래서 안보 비용을 치르지 않고 고속 경제성장을 누렸고, 2차 대전 때 꿈꾸었던 대동아공영권을 경제적으로 누릴 수 있었다. 종전 이후 요시다 시게루 전 총리는 “1차 대전의 승자였던 일본보다 2차 대전의 패자였던 일본이 더 낫다”고 했다.

일본은 중국이나 러시아 등 유라시아 대륙 세력을 막는 해양 세력의 일원인 지정학적 지위를 가지나, 대륙 세력과 세력균형을 항상 추구해왔다. 이는 한반도에 기본적으로 위협과 위기를 조성하지만 한반도는 그 가운데서 기회를 찾아야 하는 숙명이기도 하다. 한반도 분단은 일본의 이런 종전 전략을 낳은 일본의 지정학적 세력균형책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이 미국과 중·러 사이에서 세력균형을 도모하겠다는 것은 종전 이후 보수 본류들의 잠재된 노선이었고, 이는 분단된 한반도에도 작용했다.

요시다 시게루로 대표되는 전후 일본의 ‘보수 본류’는 경제 우선과 주변국 중시의 노선을 펼치려 했고, 요시다는 중국과의 관계를 조기 정상화하려고 했다. 후임 총리들인 하토야마 이치로, 이시바시 단잔 등도 중국과 화해해 경제 이익을 챙기고, 냉전 질서에서 한편에만 서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 기회주의 전략이 노리는 것

일본은 1990년대 초 사회주의권이 해체되기 시작하자, 가장 먼저 북한과 관계 정상화에 나섰다. 1990년 9월 가네마루 신 당시 자민당 부총재가 북한을 전격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회담한 뒤 북-일 수교 공동선언을 발표하고, 2002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북한을 방문해 북-일 공동선언을 발표한 것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아베 신조 정권 이후 일본은 중국의 부상과 자신들의 상대적인 약화라는 상황 변화에 처했다. 일본은 다시 ‘북한의 악마화’를 고리로 미국과 동맹을 강화하며 동아시아에서 유리한 세력균형을 도모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 때 북-미 관계 정상화를 일본이 뒤에서 방해한 것이 대표적이다.

일본은 중국과 러시아와의 관계, 특히 북한과의 관계에서 ‘바람보다 빨리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기회주의와 능소능대의 두 양면을 보여왔다. 전후 일본은 한반도의 분단을 상수로 하여 유리한 세력균형을 도모하는 지정학적 전략을 기본적으로 선택해왔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도 끊임없이 중·러, 북한과의 관계 강화에 먼저 나서고 입질을 해왔다. 한반도 등 동아시아 정세에서 한국은 일본의 전략과 입장을 동조화해서도 안 되고, 사갈시해서도 안 된다. 한국이 중·러 및 북한과의 관계를 안정화해야 일본에 대해서도 지렛대가 생기고, 한반도 문제에서 일본의 긍정적 역할도 기대할 수 있다. 윤석열 정부가 취임한 뒤 일본에 올인하는 노선이 위태롭고도 두려운 이유이다.

정의길 국제부 선임기자 Egil@hani.co.kr

<한겨레>에서 국제 분야의 글을 쓰고 있다. 신문에 글을 쓰는 도중에 <이슬람 전사의 탄생> <지정학의 포로들> 등의 책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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