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현지시각)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북부에 있는 알아흘리아랍병원이 공격을 받아 500여명이 숨지는 참사가 벌어진 뒤 이 참사 때 부상을 입은 이들이 가자시티에 있는 알시파병원의 복도 바닥에 앉아서 공포에 떨고 있다. 여성 1명은 아이를 안은 채 울고 있고 또 다른 여성은 얼굴을 감싸고 있다. 가자/AP 연합뉴스
17일 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한 병원이 공습을 당해 무려 500여명에 이르는 민간인이 숨지면서, 누가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는지를 두고 이스라엘방위군(IDF)과 하마스 간에 치열한 책임 공방이 시작됐다.
이날 주요 외신 보도를 모아 보면, 가자지구 중부에 위치한 알아흘리아랍(아랍인민)병원 폭격 참사는 저녁 8시43분(현지시각·한국시각 18일 오전 2시43분)에 일어났다. 월스트리트저널이 확보한 사고 영상을 보면, 늦은 밤 조용하던 병원 인근에서 갑자기 커다란 굉음과 함께 포탄이 떨어진다. 이어, 병원 일부가 무너져 내리고, 큰불이 나면서 주변이 아비규환으로 변한다. 뉴욕타임스 등이 공개한 또 다른 영상에선 구급대는 들것, 민간인들은 담요를 잡고 주검으로 보이는 덩어리를 옮기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알아흘리 아랍 병원이 17일 밤(현지시각) 대규모 폭발로 파괴됐다. 이번 참사로 최소 500명이 숨진 가운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가 폭발 원인을 두고 책임 공방을 벌이고 있다. EPA 연합뉴스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보건부는 “이번 사태로 최소 500명이 숨졌다”며 한탄했다. 국경없는 의사회 소속 가산 아부시타 박사 역시 영국 스카이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이번 일은 학살”이라며 분노했다. 현재 구조 작업이 진행 중이어서 인명 피해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은 하마스가 가자지구를 점령한 2007년 이후 발생한 가장 끔찍한 참사로 기록될 전망이다.
하마스는 이번 참사를 이스라엘 소행으로 단정짓고 보복을 다짐했다. 서안지구의 마흐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 역시 “병원 대학살은 명백한 전쟁 범죄”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분노한 팔레스타인 시민들은 서안지구의 행정수도인 라말라를 비롯해 나블루스·투바스·제닌 등에서 항의 시위를 벌였고, 당국은 최루가스와 섬광수류탄을 쏘며 시위대 해산에 나섰다.
주변 아랍국들도 비난의 목소리를 쏟아냈다. 압둘팟타흐 시시 이집트 대통령은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라고 지적했고,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성명에서 “극악무도한 범죄”라는 입장을 내놨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팔레스타인 민간인 수백명의 죽음이 경악스럽다”고 말했다. 라비나 샴다사니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 대변인은 “국제인권법의 중대한 위반”이라며 철저한 조사를 예고했다.
이스라엘군은 ‘결백’을 주장했다. 이들은 엑스(X·옛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군 작전 시스템 분석을 보면, 병원 피격 당시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이 발사한 로켓이 알아흘리 병원 근처를 지나간다”며 “가자지구 병원을 때린 로켓의 발사 실패 배후에 이슬람 지하드가 있다”고 주장했다. 요나탄 콘리쿠스 대변인(중령)도 시엔엔(CNN)에 “조사 결과, 이슬라믹 지하드가 이스라엘 북부 혹은 중부를 향해 발사한 로켓 가운데 최소 한발 이상이 지상으로 떨어졌고, 알아흘리 병원에서 폭발한 것으로 밝혀졌다”고 말했다. 이스라엘은 자국 무인항공기가 촬영한 피격 당시 상공 영상을 언론에 공개하고, ‘로켓 오폭’이라는 팔레스타인 무장세력 대화 내용을 공개할 것이라며 적극 대응에 나섰다.
다만, 시엔엔이 이날 정리한 ‘가자지구 주요 병원 실태’를 보면, 이스라엘군이 전면 봉쇄 이후 지역의 주요 병원 9곳에 대해 인도적 배려를 한 흔적이 눈에 띄지 않는다. 알시파 병원 등은 물이 끊겨 우물로만 물을 공급받는 중이고, 알두라 어린이 병원에선 이스라엘의 백린탄 공격 정보에 따라 환자들이 대피하는 일도 있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이스라엘 방문을 앞두고 발생한 이번 참사로 지난 7일 시작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안갯속으로 빠져들 전망이다. 이번 참사를 일으킨 쪽은 도덕적으로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게 됐다. 나아가 바이든 대통령의 중재가 시작도 되기 전에 사실상 ‘실패’하면서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상호증오가 증폭되는 모양새다. 비비시(BBC)는 이 참사는 “아랍권 전역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시위를 부르며 분노의 도화선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홍석재 기자, 신기섭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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