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작권 재연기 흔들리는 군사주권 ① 무엇을 잃었나
정총리 “모든 조건 충족때까지…”
군사주권 되찾을 기회 스스로 차
10조 이전비용 물고도 용산 잔류
‘정예강군 도약’ 계획 더 멀어져
군 내부서도 “능력도 있는데 왜…”
박근혜 정부가 지난달 23일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환수의 무기한 연기를 발표한 뒤, 이번 조처가 군사주권에 대한 사실상의 포기 선언이며 심각한 국익 훼손과 안보 재앙을 불러올 수 있다는 우려가 고조되고 있다.
정부는 ‘조건을 갖춰야 전작권을 환수할 수 있다’는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정홍원 국무총리는 3일 국회 외교·통일·안보 분야 대정부 질문 답변에서 “북에서 감히 야욕을 못 갖도록 하는 모든 조건을 갖추는 게 우리가 할 일이고, 비대칭 전력에서 열세인 우리는 그 조건을 갖출 때까지는 전작권을 보류하는 게 맞다”고 말했다.
그러나 여러 전문가들은 박근혜 정부가 시기를 못박지 않고 한국군의 능력과 주변 안보 환경 등 ‘조건’이 충족돼야 전작권을 넘겨받기로 함으로써 사실상 전작권 환수를 포기했다고 지적한다. 또 이를 통해 국가주권의 핵심을 이루는 군사주권을 되찾아올 수 있는 역사적 기회의 문을 스스로 닫아버렸다는 냉엄한 평가를 내린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이번 결정으로 군을 통제하는 군사주권 환수를 사실상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게 됐다”고 말했다.
현행 군사지휘체계에선 전쟁 조짐이 판독돼 방어준비 태세인 ‘데프콘3’만 발령돼도 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이 한미연합사령관에게 넘어간다. ‘전쟁이냐 아니냐’의 판단과 전시 군 운용권의 핵심이 실제 전쟁이 벌어지기도 전에 미군 4성장군에게 귀속되는 것이다. ‘데프콘3’ 이상은 1976년 판문점 미루나무 사건과 1983년 아웅산 테러 사건 때 발령된 바 있다.
리처드 스틸웰 전 주한미군 사령관은 이를 두고 “한-미 지휘 관계는 지구상에서 가장 엄청날 정도로 국가주권을 양보한 경우”라고 평가한 바 있다. 김종대 군사평론가는 “국가의 존망과 국민의 생사가 달린 전쟁을 하느냐 마느냐를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나라, 사실상의 준보호국 처지를 자원해서 연장하겠다는 게 이번 결정의 진짜 의미”라고 말했다.
전작권 포기는 현재와 미래의 국익에도 중대한 손상을 입힐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10조원에 이르는 막대한 이전 비용을 한국이 부담하고서도 결국 서울 용산 미군기지의 17%가 미국 손에 남게 됐다. 미-중 갈등에 말려들어 외교적 재앙을 자초하게 됐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무엇보다 정예강병 건설이라는 묵은 숙제를 풀기가 한층 요원해졌다. 전작권 포기는 지금처럼 미군이 정보·지휘통제를 맡고 한국은 육군 중심의 손발 노릇을 맡는 분업 구조가 계속될 것임을 뜻한다. 국방대 합동교리실장 출신의 권영근 한국국방개혁연구소 소장(예비역 대령)은 “비대한 육군을 줄이고 정보능력과 육해공군 합동전력 증강에 투자해 독자적인 억지력을 갖춘 강군으로 비상한다는 구상은 물건너갔다”고 말했다.
매년 300억달러 넘는 국방비를 쓰면서도 전작권 환수를 포기한 정부와 군 수뇌부의 결정에 군 내부의 비판 기류도 감지된다. 한 영관급 장교는 “군 조직의 특성상 공개적 비판에 나서진 못하지만, 동료들끼리 모인 자리에선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닌데 이게 제대로 된 군대냐’며 끓는 분위기”라고 했다.
정치권에 대한 질책은 어느 때보다 거세다. 시민사회에선 지난 대선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엔엘엘(NLL·북방한계선) 포기’ 발언 논란이 벌어졌던 상황과 비교해 지금 정치권의 안이한 대응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박정은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은 “사실도 아닌 ‘엔엘엘 포기’ 논란을 선거에 활용하더니 정작 명백한 ‘주권 포기’는 환영하는 여당은 말할 것도 없고, 그때도 끌려다니더니 이번에도 무기력하기만 한 야당도 참 한심하다”고 말했다. 그는 “국회는 특위 등을 꾸려 ‘주권 포기’ 진상을 파헤치고 비준 동의도 반드시 받도록 해 안보 재앙 가능성을 차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손원제 기자 won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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