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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국제일반

‘버니크래츠’ 꿈틀…샌더스는 돌풍이 아닌 밀알이었다

등록 2016-07-07 15:33수정 2016-07-07 22:14

버니샌더스+데모크라츠=버니크래츠
정치개혁 실천할 공직 출마자·지지자 봇물
샌더스 메시지·풀뿌리 후원금 모금 발판
미 의회·자치단체서 개혁 입법 등 모색
지난달 22일(현지시각) 미국 민주당 대선 경선후보인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뉴욕주에서 ‘우리는 여기서 어디로 갈까’ 행사에서 연설하고 있다. 뉴욕/ AFP 연합뉴스
지난달 22일(현지시각) 미국 민주당 대선 경선후보인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뉴욕주에서 ‘우리는 여기서 어디로 갈까’ 행사에서 연설하고 있다. 뉴욕/ AFP 연합뉴스

미국의 75살 ‘민주적 사회주의자’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의 도전은 끝난 것일까?

로레타 린치 미 법무장관이 6일(현지시각) 민주당의 사실상 대선후보인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의 ‘이메일 스캔들’과 관련해 어느 누구도 기소하지 않겠다고 공식 발표하면서, 이제 샌더스에게 남은 건 다음주께로 전망되는 ‘클린턴 지지 선언’뿐인 것처럼 보인다. 지난해 4월 출마 선언 이후 주류 정치권에 지각변동을 일으켰던 샌더스는 이슈 밖으로 사라진 모양새다. 그러나 샌더스가 지난달 24일 뉴욕 연설에서 “정치 혁명은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라고 밝힌 것처럼, 도처에서 태동하고 있는 ‘버니크래츠’(Bernie+democrats)들은 샌더스가 한때의 ‘돌풍’이 아닌 많은 열매를 맺을 ‘밀알’이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지난달 28일 유타주 민주당 프라이머리(예비선거)에서는 당 역사상 처음으로 트랜스젠더 상원의원 후보가 탄생했다. 미국 사회는 상원의원 후보 미스티 스노가 성전환자라는 것보다 솔트레이크시티의 잡화점 계산원이라는 사실에 더 놀랐다. 스노는 미국 사회가 추앙하는 직업인도, 정치 엘리트도 아니었고, 심지어 대학도 나오지 않았다. 미국 사회 한 귀퉁이에서 하루하루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보통의 미국인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그는 샌더스처럼 최저임금 인상과 유급 육아휴가를 공약으로 내세웠고, 경쟁자인 결혼생활 상담가 조너선 스윈턴이 낙태권 옹호에 소극적이라는 점을 비판했다. 민주당 유권자들은 유명 상담가 대신 진보적 성향의 잡화점 직원을 자신들을 대표할 주 상원의원 후보로 택했다.

이변은 콜로라도주 스프링스 지역구에서도 있었다. 또다른 트랜스젠더이자, 샌더스의 열혈 지지자인 미스티 플로라이트가 이라크전 참전군인 출신 경쟁자를 제치고 민주당 하원의원 후보로 결정됐다. 공화당이 우세한 지역의 두 민주당 트랜스젠더 후보가 본선에서도 승리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민주당 예비경선 승리만으로도 이미 정치 지형을 흔드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고 평가된다. 그리고 여기에는 샌더스의 ‘정치 개혁’ 메시지가 실제로 현실 정치에 영향을 미쳤다는 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샌더스 지지를 밝힌 뒤 공직에 출마한 후보들을 소개하는 ‘버니크래츠 네트워크’ 통계를 보면, 5일 현재 상·하원 선거와 주지사 선거 등에 출마한 버니크래츠가 434명에 이른다. 다양한 버니크래츠 조직도 생겨나고 있다. 2018년 중간선거에서 상·하원 의원을 대거 당선시켜 샌더스의 구상들을 입법화하기 위한 ‘완전히 새로운 의회’(Brand New Congress), 샌더스 대선 캠페인을 정치 운동화하기 위한 ‘피플스 서밋’(People’s Summit) 등이다. 샌더스 지지자인 미네소타주의 키스 엘리슨은 <뉴욕 타임스>에 “우리는 학교 이사회에 출마할 사람이 필요하다. 우리는 시의원에 출마할 사람이 필요하다. 우리는 주의원에 출마할 사람이 필요하다. 우리는 지역구 위원회와 공원 이사회에 출마할 사람이 필요하고, 샌더스의 메시지를 진짜로 수용해 지역 커뮤니티를 이끌어 갈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샌더스의 ‘풀뿌리 선거자금 모금’ 모델은 버니크래츠들에게 현실 정치의 로드맵을 제시했다. 샌더스는 큰손들이 주무르는 슈퍼팩에 의존해 선거를 치르는 민주당 경선 관례를 뒤집었다. 오로지 소액 정치후원금만으로 ‘27달러의 기적’을 일궈냈다. 샌더스는 740만명한테 평균 27달러(약 3만원)를 후원받아 2억1200만달러(약 2453억원) 이상을 모금했다. “미국 민주주의는 억만장자들이 후보들과 선거들을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니다”라던 자신의 말을 증명했다.

미 정치 전문지 <폴리티코>는 민주당을 지지하는 수백만명의 젊은 유권자 명부와 이메일 리스트, 인터넷·모바일 카드번호 기록을 ‘샌더스가 남긴 최대 유산’으로 꼽았다. 샌더스는 스스로 후원금 모금의 새 장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티머시 커노바, 제퍼 티치아웃, 프라밀라 자야팔, 루시 플로레스 등 ‘진보 진영의 총아’들을 지원하는 데도 이 유산을 아낌없이 나눠주고 있다. ‘완전히 새로운 의회’에 간여하고 있는 레이먼 라이언은 진보 성향 잡지 <더 네이션>에 “우리는 이(샌더스) 모델이 의회(선거)에도 적용되길 원한다”며 “캠페인 하나가 이렇게 큰 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이런 단순함이 너무 좋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샌더스의 백악관 입성 여부만큼이나 그가 넓혀 놓은 진보주의의 영역에도 주목해왔다.

샌더스는 전국민 건강보험과 공립대 무상교육 등 급진 좌파들이나 주장하는 것으로 여겨지던 진보적 의제들을 미국 정치의 한가운데로 옮겨놨다. <더 네이션>의 편집장인 카트리나 밴든 휴벌은 <워싱턴 포스트> 칼럼에서 “(7월 전대에서) 지명은 클린턴이 되겠지만, 토론은 샌더스가 이겼다”며 “샌더스는 민주당이 근본적인 변화를 시작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샌더스의 젊은 지지자들은 민주당의 미래다. 샌더스는 이른바 밀레니얼 세대로 불리는 젊은 유권자들 사이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확인했다. 이들은 경기침체와 오랜 전쟁의 그늘, 불어난 학자금 대출 부담과 월가 점령시위 속에서 ‘정치적 각성’을 이룬 세대다. 정치분석 매체 <파이브서티에이트>의 해리 엔턴은 “2016년 민주당 유권자들이 2008년 민주당 프라이머리와 비교해볼 때 훨씬 더 진보적인 것으로 판명됐다”며 “10년 안에 민주당 내 온건 보수 유권자가 마이너리티가 되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며, 샌더스의 이념은 더 진보적인 미래의 민주당원들과 더욱 잘 맞을 것”이라고 말했다.

클린턴이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없다. 미 주간지 <뉴요커>는 “샌더스의 영향을 알아보려면 클린턴의 캠페인 연설 하나만 들어보면 된다”며 샌더스가 이끌어낸 변화를 한마디로 요약했다. 불평등·무역·월가의 전횡 등에 대해 중도적 입장이었던 클린턴이 좌파 샌더스의 언어를 수용했다는 지적이다. 클린턴은 뉴욕주 상원의원으로 출마한 2000년 및 대선 후보에 첫 도전했던 2008년에 견줘 확실히 중도에서 왼쪽으로 이동했다.

이미 샌더스의 최저임금 15달러 주장 등을 수용한 클린턴은 6일에도 샌더스 캠프 쪽이 ‘전당대회 이전 지지 선언’ 조건으로 내건 공립대 등록금 면제 정책을 발표했다. 샌더스가 애초 주장한 것처럼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하진 않았으나, 연소득 12만5000달러(약 1억4432원) 이하 가정 자녀의 공립대 등록금을 면제하겠다고 약속했다. 미 언론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샌더스가 다음주 초 공동 유세에서 클린턴 지지 선언을 할 것으로 전망한다. 지난해 4월29일 “힐러리 클린턴의 정책을 조금이라도 진보적 방향으로 이동시키는 데 기여하고 싶다”며 공식 대선 출마를 선언한 샌더스가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샌더스는 클린턴 뿐만 아니라 민주당도 변화시켰다. 민주당 전국위원회(DNC)는 지난 1일 역대 가장 진보적인 강령을 발표했다. 초안에서는 최저임금 시간당 15달러로 인상, 월가와 연방정부 간 회전문 인사 단속 등을 채택했다. 샌더스가 ‘경선 돌풍’에 힘입어 정강위원회 위원 15명 가운데 5명에 대한 지명권을 얻어낸 영향으로 풀이된다.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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