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주도한 보리스 존슨 외무장관(전 런던시장·오른쪽)과 미국 대통령 당선자 도널드 트럼프가 입맞춤하는 모습을 묘사한 벽화가 영국 브리스톨의 거리에 그려져 있다. 지난 6월 젊은 세대의 정치 참여를 독려하는 캠페인 단체 ‘위아유럽(WE ARE EUROPE)’이 영국 국민투표에 참여하라는 메시지와 함께 그린 벽화다. 이 단체는 러시아 화가 드미트리 브루벨이 지난 1990년 베를린 장벽에 그린 ‘형제의 키스’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설명했다. 1970년대 소련 공산당 서기장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와 동독 공산당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가 나눈 입맞춤을 묘사한 ‘형제의 키스’의 부제는 ‘주여, 이 치명적 사랑을 이겨내고 살아남게 도와주소서’였다. 위아유럽 홈페이지 갈무리
9일 재벌 도널드 트럼프가 제45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됐다는 소식은 전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올해 6월,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브렉시트’만큼 전세계를 뒤흔든 정치적 사건이다.
지난 6월23일(현지시각) 실시된 영국 국민투표에서 유럽연합 탈퇴 찬성표는 51.9%로 반대표보다 4%포인트 가량 높았다.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였다. 국민투표 나흘 전인 6월20일 영국 <비비시>(BBC) 월드뉴스 진행자이자 워싱턴 특파원을 지낸 케이티 케이는 찬반 의견이 팽팽한 브렉시트의 현실화는, 역시 접전이 예상되는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승리를 거두는 ‘신호’일 수 있다는 기사를 썼다. 두 사건이 현실화하는 배경에 공통점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1. 성난 민심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운동을 주도한 인물은 영국의 집권 보수당 보리스 존슨 외무장관(전 런던시장)이다. 트럼프와 존슨은 기존 정치권에 불만이 많은 대중정서를 파고들었다. 영국에서는 유럽연합 일원으로서 얻는 이익보다 손해가 크다는 불만이 많았다. 독일 다음으로 분담금을 많이 내고 있지만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국이 먼저다’라는 구호가 나온 배경이다. 존슨은 “유럽연합 이민 정책 때문에 영국이 중범죄를 저지른 이민자를 추방하지 못하고 있다”는 발언으로 민심을 자극했다. 트럼프 역시 “언론·정치 엘리트들에 더 이상 의존할 수 없다. 미국을 다시 강하게 만들 것”이라는 공약을 내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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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3월 영국 런던 시민이 만들어 유튜브에 올린 동영상 ‘이매진(상상)-대통령에 트럼프(오른쪽), 총리에 보리스 존슨’ 의 한장면. 이 영상을 만든 시민은 장르 구분을 코미디로 해야할지, 공포물로 해야할지 고민했다고. 유튜브 영상 갈무리
2.세계화의 역풍
영국 뿐만 아니라 미국 노동자들은 세계화로 인해 삶이 파괴되고 있다. 이민자 증가·자유무역·기술발전 같은 복합적인 배경은 특히 백인 노동자 계층의 일자리와 수입의 안정성을 위협하고 있다. 영국과 미국의 정책 입안자들은 이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실패했다. <비비시>는 “만약 유럽연합 탈퇴 진영이 승리한다면, 반(反) 세계화 정서가 생각보다 훨씬 강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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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민자를 향한 분노
경제학자들은 임금정체 문제가 이민자 탓인지 로봇 탓인지를 놓고 논쟁한다. 그러나 유권자들은 이러한 논쟁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 대신 이민자들을 비난한다. 실리콘밸리에서 개발된 기술을 탓하기보다 마케도니아나 멕시코에서 건너온 사람들에게 분통을 터뜨리는게 더 쉽기 때문이다.
4. 잃어버린 긍지
강대국이었던 영국과 미국 사람들은 국민으로서 그리고 개인으로서 자부심에 상처를 입었다. 좋은 일자리를 찾기 어려운 현실에 직면한 남성 노동자들은 그들의 아버지나 할아버지처럼 혼자서는 가족을 부양할 수 없는 처지다. 영국에서는 자국 통치권을 유럽연합에 넘겨버렸다는 상실감이 있었다. 유럽연합을 떠나면 더 강해지고 번영하고 존중받을 수 있다는 설득이 효력을 발휘한 배경이다. 미국의 트럼프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오바마 대통령의 ‘글로벌 사과 순방’이 미국의 명성을 저해했다는 정서가 있다.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지 71년 만인 올해 5월 오바마는 현직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 히로시마를 방문했다. 2012년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였던 밋 롬니는 후보 수락연설에서 “오바마는 사과 순방(apology tour)을 하겠지만 나는 일자리 순방(jobs tour)을 다니겠다. 미국은 다른 나라를 억압하지 않았으며 전 세계를 독재자로부터 해방시켰다”고 오바마를 비난한 바 있다.
5. 포퓰리즘(인기 영합주의)
보리스 존슨과 트럼프는,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단순한 해법을 내놓고 이성이 아닌 감성에 호소한다. 존슨은 명문대 출신이지만 대중에게 친근한 정치인으로 보수진영을 대변하고, 직설적인 화법으로 ‘영국판 트럼프’로 불리기도 한다. 딘 베이커 미국 경제정책연구센터 공동소장은 지난 7월 <한겨레>에 기고한 칼럼에서 보수당 정부가 지출을 대폭 삭감하면서 영국의 성장을 옥죄었다고 비판한다. 문제는 ‘이민’이 아니라 ‘잘못된 정책’이라는 것. 이로 인해 영국의 실질임금이 2008년 금융위기 이전보다 낮아졌고 노동자들의 삶은 팍팍해졌다. 그러나 유럽연합 탈퇴 지지자들은 정책 문제를 제쳐놓고 이민자들이 공공의료서비스 체계를 마비시켰다는 말이 안 되는 주장으로 성난 민심을 선동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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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국민투표가 치러진 다음날, 스코틀랜드에 위치한 본인 소유 골프장을 방문한 트럼프는 브렉시트를 ‘위대한 결정’이라고 치켜세웠다. 역설적이게도, 스코틀랜드는 유럽연합 탈퇴 반대 여론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지역이다.
“영국의 결정과 내가 대선 후보가 되는 데 도움을 준 반주류·대중영합 정서에는 거대한 유사점이 있다고 본다. 유럽에서 볼 수 있듯, 사람들은 그들의 나라를 되찾고 싶어 한다. 어젯밤 일어난 일(브렉시트) 이상의 일이 더 많이 일어날 것이다.” (2016년 6월24일 <뉴욕타임스>)
트럼프가 스코틀랜드에서 ‘눈치 없이’ 던졌던 이 말은, 결국 현실이 됐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