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현지시각)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일단의 반전 시위대가 ‘이란과의 전쟁 반대’를 외치고 있다. 토요일인 이날 미국 전역에서 반전 시위 행진이 이어졌다. 시애틀/AFP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란 군부 실세인 카셈 솔레이마니 쿠드스군 사령관 살해를 지시한 것은 이를 하나의 선택지로 제시했던 참모들조차 깜짝 놀랄 일이었다. 솔레이마니 살해는 미-이란 전쟁으로 이어질 위험성이 있고, 이는 해외주둔 미군, 특히 중동에서의 철수를 외쳐온 트럼프 대통령의 고립주의 기조와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이다. ‘탈중동’을 밀어붙여온 트럼프 대통령이 의외의 초강수로 미국을 오히려 중동 전쟁의 수렁으로 몰아넣는 모습이다.
지난 대선에서 ‘미국 우선주의’를 핵심 정책기조로 내건 트럼프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들의 중동 전쟁을 실패로 규정하고 “우리 아이들(군인)을 집으로!”를 공약했다. 그는 지난해 10월 이슬람국가 격퇴전에서 미군의 동맹이었던 쿠르드족을 내팽개쳤다는 비판을 들으면서도 시리아 동북부에서 미군을 철수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 2018년 이란핵합의에서 탈퇴한 뒤 이란에 대한 경제제재를 가하면서도 군사적 충돌은 회피하며 “대화하자”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러나 솔레이마니 살해는 이와 정반대 방향으로 여겨진다.
<워싱턴 포스트>는 “트럼프가 자신이 피하겠다고 다짐했던 중동 분쟁으로 뛰어들었다”고 지적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국방장관을 지낸 리언 파네타는 이 매체에 트럼프 대통령이 솔레이마니를 제거하고 중동 정세를 흔드는 행위의 위험성을 충분히 고려하고 결정한 것인지 두렵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러한 위험부담을 안고도 솔레이마니 살해 결정을 내린 데 대해 미 정부는 최근에 이란이 보여온 위협적 행동을 이유로 든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지난 3일 <이란 인터내셔널>과 한 인터뷰에서 “솔레이마니가 수백명의 미국인과 이라크인 등을 죽일 수도 있는 임박한 공격을 계획하고 있었다”는 점 등을 이유로 제시했다.
그러나 미 언론은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해 6월 이란의 미국 드론 격추에 대응해 이란을 상대로 보복공격을 승인했다가 인명 피해를 우려해 철회했을 때 부정적인 여론이 일었던 점이 이번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고 짚었다. ‘고립주의 노선’과 ‘적국들에 강하게 보이고픈 욕망’ 사이에서 흔들려온 트럼프 대통령이 이번에는 후자를 택했다는 것이다.
‘제2의 벵가지 사태’에 대한 우려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오바마 행정부 시절인 2012년 리비아 동부 벵가지에서 무장 시위대가 미 영사관을 공격해 미국대사와 직원 3명이 숨진 뒤 힐러리 클린턴 당시 국무장관의 ‘나약한 대응’은 지난 대선 때 트럼프 후보의 단골 공격 지점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올해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 후보가 역공할 빌미를 주지 않겠다는 계산을 했을 수 있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과 전선을 형성하는 게 11월 재선에 해롭지 않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외부와 갈등이 고조될 때는 유권자들이 현직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주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공화당 일각에서는 오바마 행정부에서 부통령을 지낸 조 바이든이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될 경우, 트럼프 대통령이 중동 정책과 관련해 ‘우유부단한 오바마 정부’와 ‘단호한 트럼프’를 대조시켜 이득을 볼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고 <워싱턴 포스트>는 전했다. 하지만 이라크 전쟁이나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보듯, 중동에서의 군사적 개입은 미 정부의 의도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워싱턴/황준범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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