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곧 세계무역기구(WTO)와 코로나19 백신의 지식재산권 효력 일시 정지 문제를 논의할 예정이어서 결과가 주목되고 있다. 미 화이자의 백신. 로이터 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코로나19 백신의 지식재산권을 한시적으로 면제하는 방안을 세계무역기구(WTO)와 곧 논의하기로 했다. 두 쪽이 합의에 도달하면, 세계무역기구의 ‘무역 관련 지재권에 관한 협정’(TRIPS)에 명시되어 있지만, 사문화되다시피한 특허 효력 일시 정지(강제실시권)가 사상 처음으로 전세계 차원에서 시행될 전망이다.
백신 지재권의 효력이 중단하면, 생산 능력이 있는 제약업체는 누구나 백신을 만들어 공급할 수 있게 된다. 다만, 코로나19 백신의 원료 공급 문제도 함께 해결되어야 할 과제다.
론 클레인 백악관 비서실장은 2일(현지시각) <시비에스>(CBS) 방송 인터뷰에서 “우리 캐서린 타이 무역대표부(USTR) 대표가 다음주 세계무역기구에 가서 어떻게 백신을 더 널리 배분하고 허가하며 공유할지에 관한 논의를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클레인 실장은 이 문제와 관련해 며칠 내로 미 정부에서 추가로 밝힐 게 있을 거라고 덧붙였다. 세계무역기구는 오는 5~6일 일반이사회를 열어 백신 지재권에 대해 논의할 예정이다.
미국은 인도 등의 코로나19 상황이 급격하게 악화하는 가운데 백신 공급을 늘리기 위해 제약사들의 백신 기술 지재권 보호를 한시적으로 면제하라는 국제 사회와 보건 전문가들의 요구를 받아왔다. 최근 타이 대표는 화이자, 노바백스 등 제약사 경영진을 만나 지재권 면제 문제를 논의했고,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은 지재권 면제도 백신 공급 증대의 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앤서니 파우치 국립알레르기·감염병연구소 소장도 타이 대표와 지재권 문제를 상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지재권 면제는 제약사들이 반대하고 있고, 미 정부 안에서도 찬반이 갈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표적 미 진보 정치인인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무소속)은 이날 <엔비시>(NBC) 방송 인터뷰에서, 부자 나라들은 코로나19에서 회복 중인데 빈국들이 감염 대폭 증가를 겪고 있는 것은 “도덕적으로 불쾌한 일”이라며 세계무역기구가 화이자와 모더나 백신의 지재권을 포기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계무역기구의 지재권 협정은 국가비상사태나 긴급상황, 공공의 비영리목적 등 예외적인 상황에서는 각국 정부가 특허권자의 동의 없이 특허 사용 허가를 내줄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때문에 협정 가입국은 다른 나라의 동의 없이 조처를 취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미국과의 마찰 등을 의식해 쉽게 행동에 나서지 못한다.
백신 특허 효력 중지 요구는 지난해 10월 인도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세계무역기구에 처음 제안했고, 60여개국이 이를 지지한 바 있다. 지난달 14일에는 고든 브라운 전 영국 총리, 프랑수아 올랑드 전 프랑스 대통령 등 정치인과 노벨상 수상자 등 175명도 이를 지지하는 편지를 조 바이든 대통령에 보냈다. 이 편지에 서명한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미 컬럼비아대학 교수는 “긴급 상황에서 특허의 효력을 중단할 수 있다는 원칙은 국제 사회가 모두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미국은 2001년 9.11 테러 이후 독일 바이엘사의 탄저균 치료용 항생제 값이 너무 비싸다며 관련 특허에 대해 강제실시권을 발동하겠다고 경고해, 바이엘의 가격 인하를 유도한 바 있다.
워싱턴/황준범 특파원, 신기섭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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