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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일본

“3살 딸 숨진 것도 몰랐소”…조선인 무덤 ‘사도광산’ 추가 증언

등록 2022-08-15 14:30수정 2022-08-16 05:43

“밥 5분 만에 먹어야…늘 배고파”
“죽음을 확인한 사람만 4명”
“내가 안 가면 형을 잡아간다니…”
사도 시민들의 ‘역사 되살리기’
조선인 400명 담배배급 명부 단초
생존자 찾아 한국 방문 증언 모아
1995년 12월1일 사도시민들이 주최가 돼, 전후 50년을 맞은 사도섬에서 ‘사도광산에서 일한 한국인의 증언을 듣는 모임’이 개최됐다. 사진 가장 오른쪽부터 사도광산 조선인 생존자인 노병구(당시 72살), 윤종광(당시 73살)의 모습이다. 과거·미래 사도와 조선을 잇는 모임 제공
1995년 12월1일 사도시민들이 주최가 돼, 전후 50년을 맞은 사도섬에서 ‘사도광산에서 일한 한국인의 증언을 듣는 모임’이 개최됐다. 사진 가장 오른쪽부터 사도광산 조선인 생존자인 노병구(당시 72살), 윤종광(당시 73살)의 모습이다. 과거·미래 사도와 조선을 잇는 모임 제공
일본 도쿄역에서 조에쓰 신칸센을 타고 2시간을 달려 니가타에 닿은 뒤, 다시 쾌속선으로 북서쪽으로 1시간을 더 가면 사도섬이 나온다. 제주도의 절반 크기(854.5㎢)인 이곳은 오키나와 다음으로 일본에서 큰 섬이다. 지난달 23일 <한겨레> 취재진이 방문한 사도섬 료쓰항에는 ‘축 세계유산추천 결정, 사도섬의 금산’이라는 대형 펼침막이 걸려 있었다.

이 섬에 있는 아이카와금산(사도광산)은 에도시대(1603~1867년)에 일본 최대 금 생산지로 이름을 얻었다. 태평양전쟁(1941~1945년)이 시작되자 광산의 기능이 바뀐다. 금뿐만 아니라 군사 물자에 필요한 구리·아연·납 등을 집중적으로 캐기 시작한 것이다. 부족한 일손을 메우기 위해 식민지였던 조선인 노동자 1500여명이 미쓰비시광업이 운영하는 사도광산에 동원됐다.

광산 주변에는 80여년 전 조선인 노동자들이 생활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광산 뒤쪽 빈터에 돌무더기가 쌓인 곳이 있다. 조선인 노동자들이 매일 밥을 먹던 식당 자리다. 지금은 안내판 하나 없이 휑한 모습으로 방치돼 있다.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지금은 다른 건물이 들어섰지만,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담배를 배급하고 이들이 원하는 송금 등 우편 업무를 처리하던 장소가 있다.

사도광산 주변에는 80여년 전 조선인 노동자들이 생활했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광산 뒤쪽 빈터에 돌무더기가 쌓인 곳이 있는데, 조선인 노동자들이 매일 밥을 먹던 식당 자리다. 안내판 하나 없이 휑한 모습이다. 사도/김소연 특파원
사도광산 주변에는 80여년 전 조선인 노동자들이 생활했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광산 뒤쪽 빈터에 돌무더기가 쌓인 곳이 있는데, 조선인 노동자들이 매일 밥을 먹던 식당 자리다. 안내판 하나 없이 휑한 모습이다. 사도/김소연 특파원
일제강점기에 이 건물에서 일했던 도미타 쓰요시(작고)가 지역 향토학자 혼마 도라오에게 자신이 보관해온 ‘조선인 연초(담배) 배급명부’를 전달한 시점은 1980년대 말~1990년대 초로 추정된다. 1944~1945년 회사 쪽이 광부들에게 담배를 지급하는 과정에서 만든 이 명부에는 조선인 400여명의 이름(일본식·한국식이 섞여 있음)·생년월일·이동상황 등이 적혀 있었다. 도미타는 우편 관련 기록은 패전 직후 모두 소각했지만 ‘연초 명부’에 대해서는 별다른 지시가 없어 보관하고 있었다. 명부 원본은 현재 사도박물관이 보관 중이다.

이 명부를 확인한 혼마가 1991년 8월 재일동포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사도섬에 있는 절 ‘쇼코사’의 하야시 미치오(75) 스님에게 사본을 건넸다. 잊힌 지역사를 되살리고 일본의 역사적 책임을 일깨우려는 작은 역사의 수레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하야시 스님은 <한겨레> 취재진에 “명부의 실체를 밝히고 과거 사도광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면 생존자를 찾고 증언을 들을 필요가 있었다. 재일동포 장명수 등과 함께 1991년 11월 한국으로 가서 직접 현지 조사에 나섰다”고 말했다. 담배 명부와 함께 ‘충청남도 사람들의 성격이 비교적 온순해 광산 노동에 적합하다’고 적혀 있던 당시 조선인 모집 담당자의 수기도 발견됐다. 이들은 무턱대고 ‘충청남도 논산’으로 방향을 잡았다.

지역신문 <대전일보>가 이들의 한국 방문 목적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임덕규 전 국회의원이 다방면으로 도움을 줬다. 그 결과 김주형(이하 당시·65)과 정병호(75) 등 생존 피해자들과 만남이 이뤄졌다. 이들의 증언은 영상과 기록으로 남아 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생존자 증언은 중간에 광산에서 도주한 뒤 일본에 정착한 임태호(1919년생)의 구술이 유일했지만, <한겨레>가 추가로 5명의 증언을 확보할 수 있었다.

1943년 17살 때 사도광산으로 끌려간 김주형은 “사도로 가기 1년 전부터 면 관계자와 모집 담당자들이 ‘한 집에 한 명은 가야 한다는 명령이 있다’고 말하고 다녔다”고 증언했다. “어머니는 울고 난리가 났지. 막내아들 보낸다고 하는데 안 울겠어. 내가 안 가면 니 형 잡아간다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갔지.” 김씨는 갱내에서 바위를 뚫기 위해 파이프를 연결하는 일을 했다. 그는 “24시간 3교대 근무였다. 힘들어서 도망가고 싶었지만, 도망갔다가 잡힌 사람이 두들겨 맞는 것을 보고 그런 마음을 접었다”고 말했다.

정병호도 1943년 27살 때 같은 마을에 사는 주민 10여명과 함께 동원됐다. 그는 갱내에서 바위에 다이너마이트 폭파용 구멍을 뚫는 일을 했다. 하루하루가 공포였다. “갱도 일이 폐에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갱도에 들어갈 때마다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가장 무서웠던 것은 땅 밑까지 내려갈 때 갑자기 휴대용 등불이 꺼져 시꺼먼 상태가 됐을 때야.” 정씨는 1944년 떨어지는 돌에 맞아 3개월이나 입원을 해야 했다. 해방 뒤 정씨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떠날 때 3살이던 딸아이는 숨진 뒤였다. 아내는 집을 나가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1995년부터 ‘과거·미래 사도와 조선을 잇는 모임’에 참여했던 고스기 구니오(84) 전 사도시의원이 사도광산 조선인들이 생활하던 기숙사 터 앞에 서 있다. 지금은 수풀만 우거져 있는 상태다. 사도/김소연 특파원
1995년부터 ‘과거·미래 사도와 조선을 잇는 모임’에 참여했던 고스기 구니오(84) 전 사도시의원이 사도광산 조선인들이 생활하던 기숙사 터 앞에 서 있다. 지금은 수풀만 우거져 있는 상태다. 사도/김소연 특파원
1995년 12월1일 사도섬에서 뜻깊은 자리가 마련됐다. 전후 50년을 맞아 ‘사도광산에서 일한 한국인의 증언을 듣는 모임’이 개최됐다. 사도섬 시민들이 1991년부터 임시 조직으로 운영하던 ‘과거·미래 사도와 조선을 잇는 모임’(사조회, 올 5월 해체)이 정식으로 발족한 뒤 주최한 행사였다. 한국 조사 과정에서 만난 생존자 가운데 윤종광(이하 당시·73), 노병구(72), 유족인 김순평(46)이 초대됐다.

당시 증언 자료를 보면, 윤씨는 “사도광산에 다시 올 수 있을 것이라고 꿈에도 생각을 못 했다. 그때 같이 일했던 한국인 동료들은 대부분 사망했다. 내가 이렇게 올 수 있었던 것은 기적”이라며 감개무량한 감정을 드러냈다. 19살 때인 1941년 사도로 동원된 윤씨는 “면에서 할당이 있다고 해서 부모와 아내를 남겨두고 사도로 끌려왔다”고 말했다. 갱내에서 바위를 뚫고 난 뒤 흩어진 돌을 모으는 일 등을 했던 윤씨는 “자유롭지 못한 생활이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밥은 5분 만에 먹어야 했고, 항상 배가 고팠다. 자는 것까지 통제를 받았다”며 “노임도 어떻게 되는지 잘 알지 못했다. 휴가를 내는 것도 어려운 분위기였다”고 강조했다.

노병구는 17살 때인 1941년 사도에 동원됐다. 노씨는 어린 나이에 조선인들이 사고로 숨지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상황이 너무 괴로웠다고 호소했다. 그는 “1942년 제3갱도에 있던 조선인이 다이너마이트 폭파 바람 때문에 휴대용 등불이 꺼지면서 앞이 보이지 않아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 사체가 운반되는 모습을 봤다. 내가 죽음을 확인한 사람만 4명”이라고 말했다.

사도섬에 있는 절 ‘쇼코사’의 하야시 미치오(75) 스님은 재일동포인 장명수 등과 함께 1991~1995년 세차례나 한국으로 가서 사도광산 조선인 노동자들을 찾아내 증언을 들었다. 그는 5년 전 교통사고로 지금은 거동이 불편한 상태다. 사도/김소연 특파원
사도섬에 있는 절 ‘쇼코사’의 하야시 미치오(75) 스님은 재일동포인 장명수 등과 함께 1991~1995년 세차례나 한국으로 가서 사도광산 조선인 노동자들을 찾아내 증언을 들었다. 그는 5년 전 교통사고로 지금은 거동이 불편한 상태다. 사도/김소연 특파원
사도광산에서 생존한 조선인들은 강제동원과 가혹한 노동을 증언하고 있지만, 일본 정부는 사도광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 신청하며 해당 기간을 에도시대로 딱 잘랐다. 불편한 역사에 눈을 감겠다는 태도다. 앞선 2015년 등재된 군함도(하시마) 등의 유산을 설명하는 도쿄 산업유산정보센터에선 ‘조선인과 일본인 노동자 사이에 차별은 없었다’는 자료를 버젓이 내걸고 있다.

1995년부터 사조회에 참여했던 고스기 구니오(84) 전 사도시의원은 “일본 정부가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어렸을 때 조선인을 ‘반도인’으로 불렀다. 일본인보다 밑에 있다는 차별적인 말이 일상에서 아무렇지 않게 사용됐다.” 그는 또 “사도광산에서 어려운 갱내 일은 조선인이 전적으로 맡았다. 이것이 차별이 아니면 무엇이냐”고 강조했다. 실제 미쓰비시광업 사도광업소가 작성한 ‘반도노무관리에 대하여’(1943년) 자료를 보면, 사고 위험이 높고 노동조건이 열악한 갱내 노동에 조선인 473명, 일본인 146명이 투입됐다. 약 76%가 조선인이었다.

사조회 모임을 이끌었던 하야시 스님도 “사도에서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간 조선인들도 폐병 등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대부분 일찍 사망했다. 현지 조사를 하며 당사자뿐 아니라 가족들의 고통이 계속되고 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봐야 한다. 도망치면 안 된다. 전쟁 책임 문제는 인간의 존엄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우리 일본인들이 계속 추궁받아야 할 큰 과제”라고 강조했다.

사도(니가타현)/김소연 특파원 dand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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