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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일본

일본 기자 만나기 창피합니다, 창피해

등록 2015-06-26 20:11

[토요판] 친절한 기자들
안녕하십니까, 독자 여러분. 도쿄 특파원 길윤형입니다. 이 자리는 오랜만이네요.

이번주 여러분께 말씀드릴 내용은 지난 2주 동안 한-일 간에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나름의 배경 설명입니다. 사실 이런 설명이 필요한가 싶기도 했지만, 동기인 토요판의 남종영 팀장으로부터 “친해지는 척했다가 마는 척했다가 하는데 왜 이렇게 의미 부여를 많이 하느냐는 생각이 든다”는 말을 듣고 쓰는 쪽으로 결심을 굳혔습니다. 그의 분석이 어찌 보면 지금 상황에 대한 매우 정확한 평가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며칠간의 팩트만 짚어볼까요. 나름 드라마틱했던 2주에 걸친 한-일 간의 공방은 방미를 코앞에 둔 박근혜 대통령이 (결국은 취소됩니다) 11일치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위안부 문제에 상당한 진전이 있다. 협상이 막바지 단계에 왔다”고 말한 데서 시작합니다.

한 나라의 정상인 대통령의 말은 천금 같은 무게를 갖습니다. 게다가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요구하며 집권 이후 2년 반 동안 일본과 정상회담을 사실상 거부해온 박 대통령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왔으니 정부 당국자, 양국의 기자, 위안부 관련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긴장하기 시작합니다. 한-일 사이에 8번씩이나 국장급 회담을 하더니 ‘정말 뭐가 있는 게 아니야’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지요.

일본 정부의 반응은 사뭇 달랐습니다. 아베 정권의 최고위 관계자는 박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말하는 것은 자유지만 도대체 뭘 보고 진전이라고 하냐”는 다소의 경멸이 섞인 반응을 쏟아냅니다. 이쯤에서 사정을 알 만한 사람들은 박 대통령 발언이 ‘실언’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만, 각종 관계자들은 이후 며칠 동안 저에게까지 “정말 뭐가 있냐”는 확인 전화를 걸어오게 됩니다.

대통령이 “진전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럼 그를 모시는 외교당국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정말 뭔가 진전이 있는 듯한 분위기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외교부는 윤병세 장관의 21~22일 방일 여부를 놓고 나름 뜸을 들이다 17일 관련 내용을 발표합니다. 이후 외교장관 회담이 열리던 21일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 기념행사에 박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교차 참석한다는 내용이 전격 발표됩니다. 이를 통해 22일 양 정상의 행사 참석이 실현되고, 한-일 관계가 본격적으로 개선의 실마리를 잡았다는 분위기가 연출됩니다. 물론 한-일 관계 개선을 채근해온 미국의 요구도 최근 상황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겁니다. 미국은 기념행사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뒤 “한-일 관계가 더 넓고 깊어지길 고대”한다며 박수도 쳐줍니다.

그러나 이는 일종의 ‘외교적 착시’일 뿐 현재 한-일 간의 핵심 현안인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양국의 입장에 본질적인 변화는 없습니다. 이를 명확히 드러내는 것은 한-일 정상회담에 대한 윤 장관의 발언입니다. 그는 정상회담의 실현 여부를 묻는 여러 질문에 “아직 시기에 대해 말할 단계는 아니다. 여건 조성이 좀더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여건 조성’이란 뭘까요? 이는 여전히 위안부 문제의 진전입니다. 그 때문에 일본 외무성 관계자는 한국이 더이상 위안부 문제를 정상회담의 조건으로 삼지 않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렇지 않다. 변함이 없다”고 말합니다. 거대한 연극이 한 편 끝나고 한-일 모두 원점으로 돌아온 셈이지요.

이번 해프닝은 전혀 의미가 없었던 것일까요? 그렇진 않습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한국 내부에선 위안부 문제 해결과 정상회담을 연계시키는 현재의 입장에 대한 재검토가 진행될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이 그동안의 입장을 손바닥 뒤집듯 뒤집고 양자 정상회담에 나서기엔 부담이 큽니다. 그 때문에 한-일 외교장관은 이번 회담에서 “한-중-일 정상회담을 조속히 열자”는 데 합의합니다. 3자 간에 정상회담을 하고 나면 한-일 양자 간에 정상회담을 하기도 쉬워집니다. 그러나 중국은 자신들은 두번이나 일본과 정상회담을 해놓고, 한국에는 “8월에 나오는 아베 담화를 지켜보자”며 쉽게 응하지 않고 있습니다. 역사 문제를 매개로 한국을 좀더 오래 잡아두고 싶은 중국의 계산이겠죠.

길윤형 도쿄 특파원
길윤형 도쿄 특파원
둘째로 한국 외교의 핵심 현안인 위안부 문제에 대한 박 대통령의 이해 수준이 매우 낮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까발려집니다. 이는 세월호 침몰 사고가 발생한 지 7시간 만에 나타나 “학생들이 구명조끼를 입었다는데 그들을 발견하거나 구조하기가 힘이 듭니까”라는 발언과 함께 박근혜 정부 5년의 성격을 상징하는 어록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부끄럽냐고요? 그렇습니다. 사실 동료인 일본 기자들을 만나다 보면 이따금 창피해서 고개를 들기가 다소 힘이 듭니다.

길윤형 도쿄 특파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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