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서경식 교수, 와다 하루키 교수.
[토요판] 특집
와다 하루키, 서경식에게 답하다
와다 하루키, 서경식에게 답하다
▶ <한겨레>는 3월12일치 토요판 20·21·22면을 통해 와다 하루키(78) 도쿄대 명예교수에게 보내는 서경식(65) 도쿄경제대 교수의 도발적인 공개편지를 실었다. 와다 교수가 답신을 보내왔다. 와다 교수는 위안부 문제 해결에 참여해온 사람으로서 책임감을 느낀다면서도 지난해 한일 외무장관의 12·28 합의 백지철회 주장은 무책임하다고 비판한다. 두 지식인 간의 편지 속에 한일 현대사가 진하게 묻어 있다.
서경식씨가 내 앞으로 보내는 공개서간을 <한겨레> 지면에 3개면(<한겨레> 12일치 20~22면)에 걸친 대논문으로 발표했다는 것을 알고 놀라운 마음으로 서둘러 그 글을 찾아 읽었다. 이후 <한겨레>가 보내준 지면을 보니, 논문의 가장 앞에 “초심은 어디 가고 왜 반동의 물결에 발을 담그십니까”라는 비난의 질문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본문에선 “선생님의 초심은 건재한가요. 외람되지만 나는 지금 그것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이는 선생님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전후 진보세력의 실패와 한일 연대운동의 파산과도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이것을 보고 더욱더 놀라는 마음을 갖게 됐다.
1953년 고등학교 1학년 때 구보타 간이치로 대표의 발언(1953년 10월 한일회담 3차 회담 때 “일본이 진출하지 않았으면 러시아, 중국에 점령돼 더 비참해졌을 것”이라고 말한 발언-역자 주)에 대해 한국 대표가 분노해 일한회담이 결렬됐다. 그때 나는 일본의 36년간의 통치는 “조선을 일본의 노예로 만들어, 여러 부와 재산을 짜낸 것이었다” “모국어를 말하는 것까지 금지했”기 때문에, 일본 쪽이 “지난 일에 대해 미안했다라는 마음”을 갖는지가 “일한회담의 기초이며 근본이다”라고 주장한 한국의 발언이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초심이라고 한다면, 나는 지금까지 초심을 잊어본 적이 없다. 내 ‘초심’에 대한 질문은 부당하며 받아들일 수 없다.
이 말 한마디를 말해두고, 서경식씨의 대논문에 반론을 하려 한다. 서씨는 이 논문에서 먼저 이번 위안부 문제에 대한 (12·28) 일한합의에 대한 내 의견이 애매하다고 비판하면서 요시미 요시아키(일본의 위안부 연구자·주오대 교수)의 백지철회론을 인용해, 이에 완전히 동의한다, 와다도 이것에 동의해 즉시 합의 철회를 위해 싸우는 한일 시민의 편에 서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의견에는 동의할 수 없다.
위안부 문제 둘러싼 3라운드 최종 국면
요시미 교수든 서씨든 일한합의를 비판하는 것엔 문제가 없다. 나도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비판하는 것과 백지철회를 주장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운동가든 전문가든 일한합의의 백지철회를 주장한다면, 이번 합의를 받아들인 피해자 할머니가 나타날 경우 그 행동을 인정하지 않고 그 사람을 비난하는 것이 된다.
위안부 문제는 위안부 피해자가 위안소에서 강요당한 것은 (인간으로)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항의하고, 일본 국가를 고발한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그래서 일본 정부가 내놓은 사죄와 그에 따른 조처에 대해 받아들일지 받아들이지 않을지는 이름을 밝히고 고발한 피해 당사자들의 권리다. 지금에 와서 피해 당사자 전체의 목소리를 확인하지 않고 “백지로 돌려 다시 한번 수정해야 한다”고 단정할 수 있는 권리가 요시미 교수에게 있을까.
이번 일한합의를 검토하기 위해선 아베 신조 총리와 박근혜 대통령의 일한합의가 1990년대 이래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의 역사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번 일한합의는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긴 투쟁의 제3라운드의 최종 국면을 이루고 있다.
제1라운드는 1990년 시작됐다. 그해 한국 여성단체가 위안부 문제에 대한 ‘6항목’의 요구를 내놓았다. 일본 정부는 1995년에 아시아여성기금 사업을 시작했지만, 한국의 피해자 다수와 운동단체, 일본의 운동단체가 반대해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그 결과 아시아여성기금은 한국에선 60명에게 지급되는 것으로 종료됐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는 책임자 처벌 등을 더한 8개 항목의 요구를 통해 법적 책임을 인정하는 해결을 주장해왔다. 기금은 2007년 사업을 종료해 해산했다.
제2라운드는 2009년 일본에서 정권교체가 이뤄지면서 시작됐다. 일본의 운동단체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전국행동 2010’(이하 전국행동)을 조직해 민주당 정부에 법적 해결(전시성적강제피해자문제 해결촉진법 제정)을 요구하는 운동을 개시했다. 그러나 정권을 잡은 민주당은 이 요망에 응답하지 못했고 입법 해결의 길은 막히고 말았다. 이때 2011년 한국 헌법재판소가 위안부 문제에 있어 “한국 정부의 부작위를 헌법 위반”이라 판결한 것은 ‘하늘의 도움’이었다. 그해 12월 정대협의 수요시위가 1000회에 달해 일본 대사관 앞에 소녀상(평화비)이 설치됐다. 그 며칠 뒤 일한 정상회담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노다 요시히코 총리에게 위안부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강경한 요청을 하게 된다.
이것을 보고 전국행동은 2012년 2월 하나부사 도시오 공동대표의 이름으로 정부간 협의를 통한 정치결단에 의한 해결을 요구한다. 해결의 내용은 ①피해자의 마음을 울릴 수 있는 사죄 ②정부자금에 의한 속죄금의 지급 ③인도지원이란 생각의 거절이라는 3개 항목이었다. 이것은 한국 정대협의 동의를 얻지 않은 안이었지만, 하나부사 안은 일한 양국 정부에 전해져 12월28일 사이토 쓰요시 관방부장관과 이 대통령의 특사인 이동관 대사 사이에 해결안이 합의됐다. (그 내용은) ①일한 정상회담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합의를 이뤄 그 내용을 정상회담 코뮈니케로 발표한다 ②총리의 새로운 사죄문에는 ‘도의적’이라는 말을 쓰지 말고 ‘책임을 인정한다’라고 표현한다 ③주한일본대사가 총리의 사죄문과 국비로 조성한 사죄금을 피해자에게 전한다 ④제3차 일한역사공동연구위원회를 발족시켜 일한 공동으로 위안부 문제의 진상규명을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을 이명박 대통령은 승인했지만, 일본의 노다 총리가 흘려보내고 말았다.
1953년 고1때 3차 한일회담 당시
한국 대표의 발언이 정당하다 생각
만약 그것이 초심이라고 한다면
한번도 초심 잊어본 적 없어
초심에 대한 서경식의 질문은 부당 12월28일 합의, 백지철회론은 무리
그 동력이 일본 국내엔 없어
합의 개조·개선으로 가게 하는 게
지금까지 운동을 해온 사람의 책임
아베 사죄표명 이끌어내는 게 중요 길고 엄혹했던 고난의 도정을 아시는가 이후 민주당 정부는 선거에서 패배해 하야하고, 2012년 말 고노 담화, 무라야마 담화의 재검토를 목표로 하는 역사수정주의자 아베 신조의 자민당 정권이 탄생했다.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 결코 아닌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2013년 2월 취임한 박근혜 대통령은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해 문제 해결을 요구한다는 점을 내세워 일한 정상회담을 거부하며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제3라운드가 시작됐다. 일한관계는 험악해지고, 일본의 우익적 주간지는 2013년 가을부터 박 대통령 개인에 대한 비방 중상 캠페인을 펼치기에 이르렀다. 미국의 개입이 있어, 결국 2014년 3월 아베 총리는 고노 담화를 계승한다는 것을 국회에서 밝혀 말하기에 이른다. 이 시점에서 공동행동과 한국의 정대협도 협의 결과 위안부 문제의 새로운 해결안을 만들고, 이것이 6월 제12차 아시아연대회의의 결정이 된다. 그 내용의 중심은 ①고노 담화의 계승 발전에 근거한 해결 ②일본 정부의 책임을 인정한 사죄, 가해사실의 승인(군의 위안소에서 자신의 뜻에 반해 위안부·성노예 등이 되었다는 것 등) ③뒤집을 수 없는 방식의 사죄 표명 ④사죄의 증거로서의 배상 ⑤진상규명과 재발방지 등이었다. ‘법적 책임’을 인정하라는 단어가 없고, ‘법적인 배상’ ‘책임자 처벌’이라는 요구도 사라져 있었다. 운동단체로서 생존 피해자가 있는 지금이 문제해결의 최후의 시기라는 생각에서 일본 정부가 받아들일 수 있을 형태를 생각해 요구를 새롭게 표현한 것이었다. 아베 총리는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새로운 조처를 취하는 것을 오랜 시간 거부해왔다. 그러나 결국 2015년 4월 미국을 방문한 뒤 한국 정부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비밀교섭을 진행하게 됐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해 11월 정상회담에서 조기 타결을 목표로 교섭을 가속하는 데 합의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피해자가 받아들이고, 한국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해결을 요구하고, 연내 타결을 희망한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운동단체는 일한 정부 교섭의 귀추를 지켜보고 있었다. 12월28일 일한 합의는 이상의 흐름의 귀결로서 태어난 것이다. 서경식씨는 위안부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운동은 이처럼 길고, 엄혹한, 고난의 도정이었는지를 얼마나 이해하고 발언하고 있는 것일까. 일한 합의가 발표된 뒤, 일본의 운동단체는 고심하면서도 현실적인 태도를 취했다. 전국행동은 12월29일 성명을 발표했다. 먼저 “일본 정부가 드디어 국가의 책임을 인정했다. 이것은 피해자와 시민운동이 쟁취한 성과다”라고 평가한 뒤 비판적인 논평을 더해 “총리대신의 사죄와 반성을 총리 자신이 다시 한번 공식적으로 표명할 것”을 요구했다. 한국에선 정대협이 강하게 반발해 12월28일 당일 정대협을 필두로 한 20여개 여성단체를 중심으로 백지철회를 요구하는 공동성명이 나왔다. 일본의 운동단체도 한국의 단체의 이와 같은 반응을 전해 듣고 애초의 입장을 수정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분노와 비판이 높아지고 있음을 충분히 고려한다 해도 일한 양국 정부의 합의를 백지철회시키는 것은 (지금까지) 일의 경과를 생각해볼 때 어렵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양보를 통해 지지자인 역사수정주의파로부터 비난을 받은 아베 총리에게 이번 ‘최종적 해결’안을 백지철회시켜 전혀 새로운 해결안을 내놓게 할 동력이 일본 국내엔 없다. 그래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요구해온 일본인으로서 이번 일한 합의를 개조·개선하는 길을 갈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하는 게 오히려 지금까지 운동을 해온 사람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주한대사가 ‘아베 편지’ 피해자에게 전해야
지금 필요한 것은 외상회담 합의를 실현한다면 아베 총리가 사죄표명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아베 총리의 사죄가 문서화되어야만 한다. 기시다 외상의 발표 뒤엔 다음과 같은 아베 총리의 사죄문이 있어야 한다.
“위안부 문제는 당시 군의 관여 아래 다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준 문제이며, 이런 관점에서 일본 정부는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
나는 일본국의 내각총리대신으로 다시금 위안부로서 다수의 고통을 경험하시고, 심신에 걸쳐 치유되기 힘든 상처를 입은 모든 분들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한다.
2015년 12월28일 일본국 내각총리대신 아베 신조”
이 사죄의 말을 편지에 담아 한국의 피해자들에게 전하는 게 급무이다. 주한대사가 살아 계신 한국인 피해자 전원이 계신 곳을 방문해 편지를 전해 드려야 한다. 그때엔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에 10억엔을 기탁한 취지가 이 총리의 사죄문에 분명히 나와 있음을 정중하게 설명을 드릴 필요가 있다.
10억엔은 피해자에게 일본 정부의 사죄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일정 금액을 보내는 데 사용하고, (나머지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분명히 세우기 위한 사업에 사용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서씨는 아시아여성기금에 대해서도 길게 논하고 있다. 현재 일한합의에 대한 내 자세가 아시아여성기금에 대한 내 태도를 반복한 것, 즉 같은 과오를 되풀이하는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시아여성기금에 대해 나도 논해 보겠다.
서씨는 아시아여성기금이 발족할 때의 상황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하고 있다. 1993년 고노 담화로부터 호소카와 총리의 회견까지 일본 정부의 움직임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국제적으로는 1995년 9월 베이징 세계여성대회의 행동강령이 언급되고 있다. 이대로 순조롭게 갔다면 국면은 달랐을 것이다, 이를 위해선 일본의 진보적 시민과 한국의 반식민지주의 세력이 연대해 일본 정부와 대치하는 것이 필요했다는 주장이다.
이런 인식은 현실과 상당히 괴리돼 있다. 일본 정부는 미야자와 정권에서도, 호소카와 정권에서도 (1965년) 일한청구권협정을 통해 청구권에 기초한 지불은 해결됐기 때문에 피해자에 대한 국가보상은 불가능하다는 원칙을 따라왔다. 1994년 6월 무라야마 연립정권이 태어나자 지난 대전은 “자존자위, 아시아 해방의 전쟁이었다, 그 전쟁에 대해 사죄도 반성도 해선 안 된다”는 ‘전후 50주년 의원연맹’이 조직돼 자민당 의원 3분의 2가 가담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외무성은 전후 50주년 기념사업으로 평화교류사업계획을 입안해 이것으로 위안부 문제에 대한 대처를 준비하고 있었다.
무라야마 내각의 관방장관이었던 이가라시 고조는 국가보상을 주장해온 사람이었지만, 위안부 문제의 입법을 단념하고 정부 자금으로 움직이는 재단법인을 만들어 정부 돈과 시민 모금을 더해 피해자에게 일시금을 지급하는 틀을 갖고 고노 요헤이 외무상, 다케무라 마사요시 대장상과 절충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 단계에서 1994년 8월19일 <아사히신문>에 “전 위안부에게 위문금, 민간기금으로 기금 구상, 정부는 사무비뿐”이라는 커다란 제목이 달린 기사가 나왔다. 이것이 피해자 할머니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 운동단체들이 기금 구상에 절대 반대하게 된 것이다. 이가라시 관방장관은 기자회견을 열어 이 기사에 반론을 해야 했다.
‘펌프의 마중물’로서 다음엔
정부 돈 받으려 한 아시아여성기금
오류와 결함으로 결국 거부됐지만
일본정부 공식사죄와 법적 보상
회피수단으로 보는 덴 동의 못해 일본인과 조선 민중은 여전히
적의 관계에 머물 것인가
한국인의 협력을 신뢰하고
일본인 바꾸기 위해 노력하기
이것이 우리들이 걸어야 할 길 얀 루프 오헤른과 마리아 헨슨의 경우 내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을 꼬집어 서경식씨는 “‘위문금’이라고 부르든 다른 무엇이라 부르든 정식 배상금은 절대로 주지 않겠다는 것이 정권의 물러설 수 없는 의도”였기 때문에 반론할 수 없었던 게 아닌가라고 비판한다. 내가 주장하고 있는 것은 위문금에는 사죄의 마음을 담을 수 없으니까 정부가 사죄하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가라시 관방장관도 전후 50년 문제 프로젝트팀의 사회당 의원도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피해자에게 지급하는 돈을 정부 자금으로 한다는 것에 대한 관료와 자민당 의원들의 찬성을 얻을 수 없어 단념하게 된 것이다. 그 상태에서 피해자에게 지급하는 ‘속죄금’을 국민의 모금만으로 충당한다는 것을 기본 콘셉트로 한 아시아여성기금이 설립되게 된 것이다. 국민 모금만으로 속죄금을 지급한다는 것이 한국에선 ‘국민모금을 통한 위문금’이라는 (나쁜) 이미지를 더한층 고정시켜, “정부가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는 당연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아시아여성기금이 거부된 것이다. 나는 그 아시아여성기금의 발기인이 되도록 정부의 요청을 받고 승낙했다. 서경식씨는 내가 당시 쓴 몇몇 문서를 인용해 당시 내가 한 기금 참가에 대한 이유 설명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비판하고 있다. 분명 나는 국민으로부터 모은 돈도 국가예산으로부터 나오는 자금과 다름이 없다는 ‘기금변호론’에 휩쓸린 설명도 하고 있다. 그러나 내 마음은 ‘펌프의 마중물’로서 국민이 먼저 속죄의 돈을 냈으니, 다음엔 정부도 더 많은 돈을 내주길 바란다는 것이었다. 1995년 11월6일 기금 비판파와 연 공개토론회에서 나는 ‘속죄금’을 한국·필리핀 피해자에게 건네주러 가게 된다면, 그 사업은 반드시 다른 국가의 피해자들에게도 확대된다, “(사업이) 확대되면 국민 모금으로는 불가능할 것이다. (중략) 그래서 일본 정부도 국민도 멈출 수 없는 길로 들어서 있는 것이다”라고 호소하고 있다. 나는 아시아여성기금의 개량·개선·수정이라는 길을 취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와 볼 때 그 기회가 기금 발족 1년 뒤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1996년 봄, 속죄금 액수를 결정하기 위한 회의가 기금 내부에서 열렸다. 당시 모금액으로는 제안된 속죄금액(개인당 300만엔 안과 200만엔 안)이 보장되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기금의 지급) 대상 이해자는 먼저 한국·대만·필리핀의 330명 정도였다. 속죄금이 300만엔이라면 10억엔, 200만엔이라면 6억6000만엔이 필요하게 된다. 모금액은 1996년 4월 현재 3억3000만엔 정도였기 때문에 분명히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때 기금의 운영심사회에서는 부족분을 정부가 보충해야 한다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하라 분베에 이사장은 200만엔 안을 채택하고,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와 담판을 벌여 부족분은 정부가 책임진다는 확약을 얻었다. 이것이 기금에 보고돼 모두가 이해를 했지만 이사회 회의록에는 기재하지 않고 비밀에 부쳐졌다. 이때 기금의 기본 콘셉트는 파산(유지할 수 없다는 게)이 분명해져 있었다. 당시 기본 콘셉트를 수정하는 것을 정식으로 논의해 결정했어야 했다. 그러나 이 찬스를 기금 내부의 사람들이 살리지 못했다. 나는 이 사실에 대해 큰 책임을 느끼고 있다. 그럼에도 아시아여성기금은 일본 정부가 진행한 사죄와 속죄의 사업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것을 “일본 정부가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을 회피하는 수단”이었다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 나는 내 책에서 “아시아여성기금은 이런 오류와 사업 내 결함이 있어 한국과 대만에선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국민적 화해에 공헌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시아여성기금은 필리핀과 네덜란드에선 분명히 의미있는 사업을 하는 게 가능했고, 성공을 거두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고 썼다. 이 주장을 서경식씨는 비판하고 있다. 네덜란드에선 피해자임을 밝히고 일본 정부를 비판해온 얀 루프 오헤른이 기금을 거절했다. 서씨는 “이 한 사람의 여성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기금이 ‘성공’했다고 말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정당한 평가라 할 수 없다. 필리핀에선 마리아 헨슨을 언급하며 “철두철미 일본국가에 유린됐던”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속죄금’을 받은 것을 두고 “마음의 평안”을 주었다고 할 수 있을까”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헨슨은 기금을 받을 때 “지금까지 불가능하고 생각했던 꿈이 실현됐습니다. 매우 행복하다”고 말했다. 서씨의 사고방식의 문제점은 다음 구절에서도 드러난다. “설사 한국을 비롯한 모든 지역의 피해자들이 ‘보상금’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국가가 명확하고 오해의 여지가 없는 사죄와 보상을 하지 않는 한 일본인들은 스스로를 위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제3의 찬스’를 살려내 변할 수 있었다 필리핀에서 가난해서, 고령이어서 ‘속죄금’을 받았다고 보는 것은 필리핀 피해자들에 대한 편견이 아닐까. 그리고 모든 지역의 피해자가 속죄금을 받아도 일본인이 스스로를 위로해선 안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서씨는 또 아시아여성기금은 “피해자 구제”나, “일본국가의 책임을 분명히 해” “연대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가 아니고 일본인의 “양심”을 “위안하기 위해서”가 아닌가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해하기 힘든 주장이다. 이번 글을 읽고, 나는 서경식씨의 세계와 나의 세계가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통감하고,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씨는 이번 글에서 1989년 자신의 논문 <제4의 호기-‘쇼와’의 끝과 조선>을 언급하며 나에게 묻고 있다. 이 논문은 내가 1974년 발표한 <한국 민중을 주시하는 것-역사로부터의 반성>(<전망> 12월호)에서 내가 전개했던 ‘제3의 찬스’론을 염두에 두며 제기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내 주장은 일본 국민이 식민지 지배의 역사를 부정하고 조선반도의 사람들과의 새로운 관계를 창조해 가는 찬스를 1945년(제1의 찬스)과 1965년(제2의 찬스)에 맞이했음에도 이것을 살리는 게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1973년 김대중씨 납치사건이 벌어진 뒤 일한조약이 체결된 8년째의 현실과 한국 민중의 투쟁을 접하면서 제3의 찬스가 도래했다. 일본 시민의 일한 연대운동이 국민적으로 확대된 것은 1980년 전두환 쿠데타에 의해 김대중씨를 사형시키려는 음모가 진행될 때였다. 이 때 일본에선 국민도 언론도 김대중씨에 대한 경의와 공감으로부터 이 사람을 죽이게 해선 안 된다는 마음을 갖게 됐다. 나는 제3의 찬스를 정말로 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1980년대엔 전두환 대통령의 방일을 계기로 우리는 조선 식민지지배를 반성·사죄하는 국회 결의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고 1984년부터 선전을 개시했다. 1987년 한국 민주혁명이 승리의 때를 맞이한 뒤 1988년에 나는 야스에 료스케(일본의 진보적 지식인. 전 <세카이> 편집장)와 짝을 이뤄 북한과 정부간 교섭을 통해 ‘식민지 지배의 청산’을 시행할 것을 요구하는 활동을 벌였다. 1989년 1월 쇼와 천황(일본인이 쓴 글이라 천황 표기는 원문대로 했다-편집자 주)이 숨졌다. 1월31일 나는 쓰루미 슌스케(일본의 진보적 지식인), 하타다 다카시(〃), 히다카 로쿠로(〃) 등과 성명을 발표했다. “역사 청산이 이뤄지지 못한 채 쇼와라는 시대가 막을 내렸다.” 조선민족에 대해 “우리나라는 식민지 지배의 청산을 이루지 못했다”고 지적하며 식민지 지배가 군사력에 의해 강제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이것이 조선민족의 ‘측량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겼다는 것을 사죄하는 국회 결의를 채택하도록 요구했다. <한겨레>는 2월8일 사설 ‘일본 국회는 식민지 죄과를 사죄하라-지식인들의 ‘사죄결의’ 요구는 정당하다”에서 우리들의 호소를 지지해줬다. 3월1일 우리는 국회 결의를 요구하는 국민서명운동의 스타트를 선언했다. 서씨가 ‘제4의 호기’라는 논문을 갖고 등장한 것은 바로 이 순간 1989년 3월8일이었다. ‘제4의 호기’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일본이) ‘제3의 호기’를 살리지 못하고 끝났다는 인식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번 논문에서도 서씨는 “일본 국민은 이 ‘제3의 찬스’를 잡은 것인가”라고 묻고 있다. 서씨는 한국 민주혁명의 승리가 일본에 영향을 끼쳐 가네마루 신 자민당 부총재, 다나베 마코토 사회당 위원장이 북한을 방문해 일조교섭이 개시되거나 1993년엔 고노 담화가 나오고, 마침내는 1995년의 무라야마 담화가 되는 것을 보지 않고 있다. 그런 비관적인 자세가 생겨난 이유가 문제의 논문 ‘제4의 호기’ 안에 드러나 있다. 서씨가 ‘제4의 호기’라고 부르는 것은 천황의 죽음이다. 식민지 지배는 천황의 이름에 의해 이뤄진 것인데도 천황이 숨진 일본은 “천황의 전쟁책임을 면책하는 것에 의한 일본인 전체의 ‘일억총면책’을 시도하려고”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서씨는 이를 통해 일본에 절망한 듯 보인다. ‘제4의 호기’도 아마 살리지 못할 것이라고 본다. 한국의 전진에 맞춰 일본인도 전진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너무 나이브한 일일 것이다”. 그 지점에서 서경식씨는 경고한다. “침략과 수탈의 역사를 자기부정하”지 못한다면, “일본인은 장래에 걸쳐 ‘항일투쟁’에 계속해 직면하게 될 것에 다름 아니다”라고. 그 말이 이번 글에도 되풀이되고 있다. 일본인과 조선 민중은 여전히 적의 관계에 머물 것인가. 나는 일한 양국민의 관계는 ‘제3의 찬스’를 살려내는 데 성공해 변했다고 생각한다. 한국 국민의 협력을 신뢰하고 일본 국민의 의식을 바꾸기 위한 노력을 이어가는 것. 이것이 우리들이 걸어야 할 길인 것이다.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번역 길윤형 특파원 charisma@hani.co.kr [관련 기사] ▶ 바로 가기 : 와다 교수 답신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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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 가기 : 초심은 어디 가고 왜 반동의 물결에 발을 담그십니까
▶ 바로 가기 : “아시아 여성기금과 불가역적 최종합의는 하나”
와다 하루키 교수가 제시하는 아베 총리 사죄문
“위안부 문제는 당시 군의 관여 아래 다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준 문제이며, 이러한 관점에서 일본 정부는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 나는 일본국의 내각총리대신으로 다시금 위안부로서 다수의 고통을 경험하시고, 심신에 걸쳐 치유되기 힘든 상처를 입은 모든 분들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한다”
- 2015년 12월28일 일본국 내각총리대신 아베 신조
윤병세 외교부 장관(오른쪽)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이 지난해 12월28일 오후 서울 외교부 청사에서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공동 기자회견을 마친 뒤 악수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한국 대표의 발언이 정당하다 생각
만약 그것이 초심이라고 한다면
한번도 초심 잊어본 적 없어
초심에 대한 서경식의 질문은 부당 12월28일 합의, 백지철회론은 무리
그 동력이 일본 국내엔 없어
합의 개조·개선으로 가게 하는 게
지금까지 운동을 해온 사람의 책임
아베 사죄표명 이끌어내는 게 중요 길고 엄혹했던 고난의 도정을 아시는가 이후 민주당 정부는 선거에서 패배해 하야하고, 2012년 말 고노 담화, 무라야마 담화의 재검토를 목표로 하는 역사수정주의자 아베 신조의 자민당 정권이 탄생했다.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 결코 아닌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2013년 2월 취임한 박근혜 대통령은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해 문제 해결을 요구한다는 점을 내세워 일한 정상회담을 거부하며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제3라운드가 시작됐다. 일한관계는 험악해지고, 일본의 우익적 주간지는 2013년 가을부터 박 대통령 개인에 대한 비방 중상 캠페인을 펼치기에 이르렀다. 미국의 개입이 있어, 결국 2014년 3월 아베 총리는 고노 담화를 계승한다는 것을 국회에서 밝혀 말하기에 이른다. 이 시점에서 공동행동과 한국의 정대협도 협의 결과 위안부 문제의 새로운 해결안을 만들고, 이것이 6월 제12차 아시아연대회의의 결정이 된다. 그 내용의 중심은 ①고노 담화의 계승 발전에 근거한 해결 ②일본 정부의 책임을 인정한 사죄, 가해사실의 승인(군의 위안소에서 자신의 뜻에 반해 위안부·성노예 등이 되었다는 것 등) ③뒤집을 수 없는 방식의 사죄 표명 ④사죄의 증거로서의 배상 ⑤진상규명과 재발방지 등이었다. ‘법적 책임’을 인정하라는 단어가 없고, ‘법적인 배상’ ‘책임자 처벌’이라는 요구도 사라져 있었다. 운동단체로서 생존 피해자가 있는 지금이 문제해결의 최후의 시기라는 생각에서 일본 정부가 받아들일 수 있을 형태를 생각해 요구를 새롭게 표현한 것이었다. 아베 총리는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새로운 조처를 취하는 것을 오랜 시간 거부해왔다. 그러나 결국 2015년 4월 미국을 방문한 뒤 한국 정부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비밀교섭을 진행하게 됐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해 11월 정상회담에서 조기 타결을 목표로 교섭을 가속하는 데 합의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피해자가 받아들이고, 한국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해결을 요구하고, 연내 타결을 희망한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운동단체는 일한 정부 교섭의 귀추를 지켜보고 있었다. 12월28일 일한 합의는 이상의 흐름의 귀결로서 태어난 것이다. 서경식씨는 위안부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운동은 이처럼 길고, 엄혹한, 고난의 도정이었는지를 얼마나 이해하고 발언하고 있는 것일까. 일한 합의가 발표된 뒤, 일본의 운동단체는 고심하면서도 현실적인 태도를 취했다. 전국행동은 12월29일 성명을 발표했다. 먼저 “일본 정부가 드디어 국가의 책임을 인정했다. 이것은 피해자와 시민운동이 쟁취한 성과다”라고 평가한 뒤 비판적인 논평을 더해 “총리대신의 사죄와 반성을 총리 자신이 다시 한번 공식적으로 표명할 것”을 요구했다. 한국에선 정대협이 강하게 반발해 12월28일 당일 정대협을 필두로 한 20여개 여성단체를 중심으로 백지철회를 요구하는 공동성명이 나왔다. 일본의 운동단체도 한국의 단체의 이와 같은 반응을 전해 듣고 애초의 입장을 수정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분노와 비판이 높아지고 있음을 충분히 고려한다 해도 일한 양국 정부의 합의를 백지철회시키는 것은 (지금까지) 일의 경과를 생각해볼 때 어렵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양보를 통해 지지자인 역사수정주의파로부터 비난을 받은 아베 총리에게 이번 ‘최종적 해결’안을 백지철회시켜 전혀 새로운 해결안을 내놓게 할 동력이 일본 국내엔 없다. 그래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요구해온 일본인으로서 이번 일한 합의를 개조·개선하는 길을 갈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하는 게 오히려 지금까지 운동을 해온 사람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지난해 12월29일 조태열 외교부 2차관이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나눔의 집을 방문해 회담 결과를 설명하는 모습. 와다 하루키 교수는 한일 회담 합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아베 총리가 사죄 표명을 하고 이에 관한 편지를 주한일본대사가 직접 위안부 피해 할머니에게 전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진공동취재단
한국과 일본의 지식인들은 지난해 7월29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외신기자클럽에서 ‘2015 한일 그리고 세계 지식인 공동성명’ 발표를 통해 일본 정부의 과거사 문제에 대한 인식 전환을 촉구했다. 왼쪽 넷째가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정부 돈 받으려 한 아시아여성기금
오류와 결함으로 결국 거부됐지만
일본정부 공식사죄와 법적 보상
회피수단으로 보는 덴 동의 못해 일본인과 조선 민중은 여전히
적의 관계에 머물 것인가
한국인의 협력을 신뢰하고
일본인 바꾸기 위해 노력하기
이것이 우리들이 걸어야 할 길 얀 루프 오헤른과 마리아 헨슨의 경우 내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을 꼬집어 서경식씨는 “‘위문금’이라고 부르든 다른 무엇이라 부르든 정식 배상금은 절대로 주지 않겠다는 것이 정권의 물러설 수 없는 의도”였기 때문에 반론할 수 없었던 게 아닌가라고 비판한다. 내가 주장하고 있는 것은 위문금에는 사죄의 마음을 담을 수 없으니까 정부가 사죄하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가라시 관방장관도 전후 50년 문제 프로젝트팀의 사회당 의원도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피해자에게 지급하는 돈을 정부 자금으로 한다는 것에 대한 관료와 자민당 의원들의 찬성을 얻을 수 없어 단념하게 된 것이다. 그 상태에서 피해자에게 지급하는 ‘속죄금’을 국민의 모금만으로 충당한다는 것을 기본 콘셉트로 한 아시아여성기금이 설립되게 된 것이다. 국민 모금만으로 속죄금을 지급한다는 것이 한국에선 ‘국민모금을 통한 위문금’이라는 (나쁜) 이미지를 더한층 고정시켜, “정부가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는 당연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아시아여성기금이 거부된 것이다. 나는 그 아시아여성기금의 발기인이 되도록 정부의 요청을 받고 승낙했다. 서경식씨는 내가 당시 쓴 몇몇 문서를 인용해 당시 내가 한 기금 참가에 대한 이유 설명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비판하고 있다. 분명 나는 국민으로부터 모은 돈도 국가예산으로부터 나오는 자금과 다름이 없다는 ‘기금변호론’에 휩쓸린 설명도 하고 있다. 그러나 내 마음은 ‘펌프의 마중물’로서 국민이 먼저 속죄의 돈을 냈으니, 다음엔 정부도 더 많은 돈을 내주길 바란다는 것이었다. 1995년 11월6일 기금 비판파와 연 공개토론회에서 나는 ‘속죄금’을 한국·필리핀 피해자에게 건네주러 가게 된다면, 그 사업은 반드시 다른 국가의 피해자들에게도 확대된다, “(사업이) 확대되면 국민 모금으로는 불가능할 것이다. (중략) 그래서 일본 정부도 국민도 멈출 수 없는 길로 들어서 있는 것이다”라고 호소하고 있다. 나는 아시아여성기금의 개량·개선·수정이라는 길을 취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와 볼 때 그 기회가 기금 발족 1년 뒤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1996년 봄, 속죄금 액수를 결정하기 위한 회의가 기금 내부에서 열렸다. 당시 모금액으로는 제안된 속죄금액(개인당 300만엔 안과 200만엔 안)이 보장되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기금의 지급) 대상 이해자는 먼저 한국·대만·필리핀의 330명 정도였다. 속죄금이 300만엔이라면 10억엔, 200만엔이라면 6억6000만엔이 필요하게 된다. 모금액은 1996년 4월 현재 3억3000만엔 정도였기 때문에 분명히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때 기금의 운영심사회에서는 부족분을 정부가 보충해야 한다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하라 분베에 이사장은 200만엔 안을 채택하고,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와 담판을 벌여 부족분은 정부가 책임진다는 확약을 얻었다. 이것이 기금에 보고돼 모두가 이해를 했지만 이사회 회의록에는 기재하지 않고 비밀에 부쳐졌다. 이때 기금의 기본 콘셉트는 파산(유지할 수 없다는 게)이 분명해져 있었다. 당시 기본 콘셉트를 수정하는 것을 정식으로 논의해 결정했어야 했다. 그러나 이 찬스를 기금 내부의 사람들이 살리지 못했다. 나는 이 사실에 대해 큰 책임을 느끼고 있다. 그럼에도 아시아여성기금은 일본 정부가 진행한 사죄와 속죄의 사업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것을 “일본 정부가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을 회피하는 수단”이었다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 나는 내 책에서 “아시아여성기금은 이런 오류와 사업 내 결함이 있어 한국과 대만에선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국민적 화해에 공헌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시아여성기금은 필리핀과 네덜란드에선 분명히 의미있는 사업을 하는 게 가능했고, 성공을 거두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고 썼다. 이 주장을 서경식씨는 비판하고 있다. 네덜란드에선 피해자임을 밝히고 일본 정부를 비판해온 얀 루프 오헤른이 기금을 거절했다. 서씨는 “이 한 사람의 여성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기금이 ‘성공’했다고 말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정당한 평가라 할 수 없다. 필리핀에선 마리아 헨슨을 언급하며 “철두철미 일본국가에 유린됐던”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속죄금’을 받은 것을 두고 “마음의 평안”을 주었다고 할 수 있을까”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헨슨은 기금을 받을 때 “지금까지 불가능하고 생각했던 꿈이 실현됐습니다. 매우 행복하다”고 말했다. 서씨의 사고방식의 문제점은 다음 구절에서도 드러난다. “설사 한국을 비롯한 모든 지역의 피해자들이 ‘보상금’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국가가 명확하고 오해의 여지가 없는 사죄와 보상을 하지 않는 한 일본인들은 스스로를 위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제3의 찬스’를 살려내 변할 수 있었다 필리핀에서 가난해서, 고령이어서 ‘속죄금’을 받았다고 보는 것은 필리핀 피해자들에 대한 편견이 아닐까. 그리고 모든 지역의 피해자가 속죄금을 받아도 일본인이 스스로를 위로해선 안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서씨는 또 아시아여성기금은 “피해자 구제”나, “일본국가의 책임을 분명히 해” “연대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가 아니고 일본인의 “양심”을 “위안하기 위해서”가 아닌가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해하기 힘든 주장이다. 이번 글을 읽고, 나는 서경식씨의 세계와 나의 세계가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통감하고,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씨는 이번 글에서 1989년 자신의 논문 <제4의 호기-‘쇼와’의 끝과 조선>을 언급하며 나에게 묻고 있다. 이 논문은 내가 1974년 발표한 <한국 민중을 주시하는 것-역사로부터의 반성>(<전망> 12월호)에서 내가 전개했던 ‘제3의 찬스’론을 염두에 두며 제기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내 주장은 일본 국민이 식민지 지배의 역사를 부정하고 조선반도의 사람들과의 새로운 관계를 창조해 가는 찬스를 1945년(제1의 찬스)과 1965년(제2의 찬스)에 맞이했음에도 이것을 살리는 게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1973년 김대중씨 납치사건이 벌어진 뒤 일한조약이 체결된 8년째의 현실과 한국 민중의 투쟁을 접하면서 제3의 찬스가 도래했다. 일본 시민의 일한 연대운동이 국민적으로 확대된 것은 1980년 전두환 쿠데타에 의해 김대중씨를 사형시키려는 음모가 진행될 때였다. 이 때 일본에선 국민도 언론도 김대중씨에 대한 경의와 공감으로부터 이 사람을 죽이게 해선 안 된다는 마음을 갖게 됐다. 나는 제3의 찬스를 정말로 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1980년대엔 전두환 대통령의 방일을 계기로 우리는 조선 식민지지배를 반성·사죄하는 국회 결의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고 1984년부터 선전을 개시했다. 1987년 한국 민주혁명이 승리의 때를 맞이한 뒤 1988년에 나는 야스에 료스케(일본의 진보적 지식인. 전 <세카이> 편집장)와 짝을 이뤄 북한과 정부간 교섭을 통해 ‘식민지 지배의 청산’을 시행할 것을 요구하는 활동을 벌였다. 1989년 1월 쇼와 천황(일본인이 쓴 글이라 천황 표기는 원문대로 했다-편집자 주)이 숨졌다. 1월31일 나는 쓰루미 슌스케(일본의 진보적 지식인), 하타다 다카시(〃), 히다카 로쿠로(〃) 등과 성명을 발표했다. “역사 청산이 이뤄지지 못한 채 쇼와라는 시대가 막을 내렸다.” 조선민족에 대해 “우리나라는 식민지 지배의 청산을 이루지 못했다”고 지적하며 식민지 지배가 군사력에 의해 강제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이것이 조선민족의 ‘측량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겼다는 것을 사죄하는 국회 결의를 채택하도록 요구했다. <한겨레>는 2월8일 사설 ‘일본 국회는 식민지 죄과를 사죄하라-지식인들의 ‘사죄결의’ 요구는 정당하다”에서 우리들의 호소를 지지해줬다. 3월1일 우리는 국회 결의를 요구하는 국민서명운동의 스타트를 선언했다. 서씨가 ‘제4의 호기’라는 논문을 갖고 등장한 것은 바로 이 순간 1989년 3월8일이었다. ‘제4의 호기’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일본이) ‘제3의 호기’를 살리지 못하고 끝났다는 인식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번 논문에서도 서씨는 “일본 국민은 이 ‘제3의 찬스’를 잡은 것인가”라고 묻고 있다. 서씨는 한국 민주혁명의 승리가 일본에 영향을 끼쳐 가네마루 신 자민당 부총재, 다나베 마코토 사회당 위원장이 북한을 방문해 일조교섭이 개시되거나 1993년엔 고노 담화가 나오고, 마침내는 1995년의 무라야마 담화가 되는 것을 보지 않고 있다. 그런 비관적인 자세가 생겨난 이유가 문제의 논문 ‘제4의 호기’ 안에 드러나 있다. 서씨가 ‘제4의 호기’라고 부르는 것은 천황의 죽음이다. 식민지 지배는 천황의 이름에 의해 이뤄진 것인데도 천황이 숨진 일본은 “천황의 전쟁책임을 면책하는 것에 의한 일본인 전체의 ‘일억총면책’을 시도하려고”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서씨는 이를 통해 일본에 절망한 듯 보인다. ‘제4의 호기’도 아마 살리지 못할 것이라고 본다. 한국의 전진에 맞춰 일본인도 전진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너무 나이브한 일일 것이다”. 그 지점에서 서경식씨는 경고한다. “침략과 수탈의 역사를 자기부정하”지 못한다면, “일본인은 장래에 걸쳐 ‘항일투쟁’에 계속해 직면하게 될 것에 다름 아니다”라고. 그 말이 이번 글에도 되풀이되고 있다. 일본인과 조선 민중은 여전히 적의 관계에 머물 것인가. 나는 일한 양국민의 관계는 ‘제3의 찬스’를 살려내는 데 성공해 변했다고 생각한다. 한국 국민의 협력을 신뢰하고 일본 국민의 의식을 바꾸기 위한 노력을 이어가는 것. 이것이 우리들이 걸어야 할 길인 것이다.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번역 길윤형 특파원 charisma@hani.co.kr [관련 기사] ▶ 바로 가기 : 와다 교수 답신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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