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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일본

‘평화헌법 옹호자’의 퇴장…새 일왕은 아베 폭주 견제할까

등록 2019-04-30 19:27수정 2019-04-30 20:03

“지지해준 국민들께 감사”란 말로
아키히토 일왕 퇴임 30일 퇴임
‘전쟁 체험 세대’ 이젠 역사 속으로

‘국정 금지’ 제약에도 평화헌법 애착
“전쟁에 목숨 잃은 수많은 이들 애도”
아베 개헌 추진에도 은근한 반대

‘전후 세대’ 나루히토 일왕 즉위
아베 우경화 견제 ‘방파제’ 역할 힘들 수도
아키히토 일왕이 30일 도쿄 황거 ‘마쓰노마’(소나무의 방)에서 거행된 퇴위식에서 국민들에게 마지막 인사말을 하고 있다. 퇴임식엔 왕세자 부부(왼쪽)와 아베 신조 총리 등 약 300명이 참석했다. 도쿄/AP 연합뉴스
아키히토 일왕이 30일 도쿄 황거 ‘마쓰노마’(소나무의 방)에서 거행된 퇴위식에서 국민들에게 마지막 인사말을 하고 있다. 퇴임식엔 왕세자 부부(왼쪽)와 아베 신조 총리 등 약 300명이 참석했다. 도쿄/AP 연합뉴스
아키히토(86) 일왕이 30일 헤이세이(平成·아키히토 시대 연호) 30년을 뒤로하고 퇴위했다. 일왕의 생전 퇴위는 1817년 고카쿠 일왕 이후 202년 만이다.

아키히토 일왕은 이날 오후 5시 도쿄 ‘황거’의 ‘마쓰노마’(소나무의 방)에서 퇴위 예식인 ‘다이이레이 세이덴노 기’를 열어 왕위를 내려놨다. 행사엔 1일 새 일왕으로 즉위하는 나루히토 왕세자 부부, 아베 신조 총리와 각료들, 지방자치단체 대표 등 약 300명이 참석했다. 일왕은 “즉위 뒤 30년, 지금까지 천황으로서 책무를 국민의 깊은 신뢰와 경애를 받고 할 수 있어 행복했다. 상징으로서 나를 받아주고 지지해준 국민에게 마음으로부터 감사한다”고 말했다. 이어 “내일 시작되는 레이와(令和·아들 나루히토 새 일왕 연호) 시대엔 평화롭고 결실이 많아지길 황후와 함께 기원한다”고 말했다. 아베 신조 총리는 “국민에게 다가서고 재해 지역 주민에게 가까이 다가가 격려하며 국민의 내일에 용기와 희망을 주셨다”고 감사 인사를 했다.

일왕은 앞서 오전 10시엔 왕실 조상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모시는 사당 가시코도코로에서 퇴위를 알리는 의식을 했다. 예복을 입은 일왕이 가시코도코로에서 나와 예를 올리는 장면이 <엔에이치케이>(NHK) 등을 통해 생중계됐다.

비가 흩뿌리는 날씨에도 적잖은 시민들이 아침부터 황거 앞 광장에서 일왕 퇴위를 축하했다. 가나가와현에서 온 65살 여성은 일왕 부부에 대해 “국민에게 다가가려는 모습이 상징적이었다.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려 한다”고 <엔에이치케이>에 말했다.

아키히토의 퇴위로 ‘전쟁 체험 세대’가 일본 역사에서 ‘상징적 퇴장’을 하게 됐다. 아키히토 일왕이 태어난 1933년은 전쟁의 시대였다. 태어나기 2년 전 제국주의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켰고, 4년 뒤 중일전쟁을 일으켜 돌이킬 수 없는 패전의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전쟁의 광기에 휩쓸려 들어가던 시기에 부친 히로히토는 살아 있는 신인 아라히토가미(현인신)로 군림했다. 그는 “신성하여 침범돼서는 안 되는” 통치자였으며, 육·해군 통수권을 쥔 최고사령관이기도 했다.

아키히토 일왕이 30일 도쿄 ‘황거’에서 일본 왕실의 조상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에게 퇴위 사실을 고하기 위해 그를 모시는 사당인 ‘가시코도코로’로 향하고 있다. 그가 착용한 황색 의상은 헤이안 시대(794~1185)부터 일왕이 중요 의식 때 입어온 ‘고로젠노고호’라는 옷이다. 도쿄/로이터 연합뉴스
아키히토 일왕이 30일 도쿄 ‘황거’에서 일본 왕실의 조상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에게 퇴위 사실을 고하기 위해 그를 모시는 사당인 ‘가시코도코로’로 향하고 있다. 그가 착용한 황색 의상은 헤이안 시대(794~1185)부터 일왕이 중요 의식 때 입어온 ‘고로젠노고호’라는 옷이다. 도쿄/로이터 연합뉴스
아키히토 일왕은 1999년 1월 즉위 10돌 기자회견에서 유년기를 회상하며 “내 어린 시절 기억은 3살 때인 쇼와 12년(1937년)에 시작된다. 전쟁은 쇼와 20년(1945년) 8월까지 이어졌다. 그래서 난 전쟁이 없는 시기를 모른 채 자랐다”고 말했다. 그때 왕세자였던 아키히토는 군 시설을 견학하거나 승전 행사에서 일장기를 흔드는 등 전의를 고양하는 상징으로 이용됐다. 그런 기억 때문인지 일왕은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이들에 대한 애도와 안타까운 마음이 있다”고 말했다.

1930년대에 태어나 80대에 이른 이 세대는 군대 보유와 교전권을 부정한 평화헌법의 ‘마지막 수호 세력’이라고도 할 수 있다. 2000년대 들어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자위대가 파병되자 위기 의식을 느낀 이 세대는 2004년 평화헌법을 수호하려 ‘9조의 모임’을 결성했다. 이후 15년이 흘러 전쟁을 직접 겪은 세대는 크게 줄었다. 지금까지 적극적 호헌 활동을 하는 이는 노벨문학상 수상자 오에 겐자부로(1935년생) 정도다.

이들과 동시대를 산 아키히토 일왕도 평화헌법의 강력한 옹호자였다. 그는 ‘일왕은 국정에 관여해선 안 된다’는 제약 속에서도 이따금 평화헌법에 애착을 드러냈다. 2013년 12월 “평화와 민주주의를 반드시 지켜야 하는 소중한 것으로 생각해 일본국 헌법을 만들어 여러 개혁을 시행해 오늘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아베 신조 총리가 ‘필생의 과업’이라며 추진하는 개헌에 은근한 반대 의사를 밝힌 것이다.

패전 뒤 새 헌법 아래에서 일왕은 ‘통치자’에서 ‘국민의 상징’으로 지위가 변했다. 1989년 1월 왕위를 물려받은 아키히토는 이듬해 “일본국 통합의 상징으로서 현대 시기에 적합한 일왕의 직무를 수행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가 찾아낸 상징 일왕의 모습은 재해 현장에서 피해자들 앞에서 무릎 꿇고, 태평양전쟁 격전지에서 숨진 이들을 추모하는 삶이었다. 1975년 7월 왕세자 시절 처음 방문한 오키나와에서 한 시민이 화염병을 던지자, “신경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루히토 일본 왕세자. 도쿄/연합뉴스
나루히토 일본 왕세자. 도쿄/연합뉴스
새로 등극하는 나루히토는 1960년생이다. 같은 전후 세대인 아베 총리보다 6살 적다. 그 역시 패전 70돌을 맞은 2015년 “전쟁의 기억이 옅어지려는 요즘, 겸허히 과거를 돌아보는 게 중요하다”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정치 성향이나 헌법관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2월 기자회견에서도 왕위 계승 소감을 묻는 질문에 “국민과 고락을 함께하면서 상징(일왕)이란 것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계속 고민하겠다”고 말하는 데 그쳤다. 새 일왕이 부친처럼 아베 총리의 폭주를 견제하는 ‘보이지 않는 방파제’가 되긴 힘들 것이란 견해가 우세하다.

도쿄/조기원 특파원,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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