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속 한 장면. 이엔에이 제공
[왜냐면] 허태준ㅣ 작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선풍적인 인기와 함께 드라마를 둘러싼 논쟁이 치열하다. 대표적으로는 ‘장애’를 소재로 한 드라마에 대한 ‘우려’와, ‘판타지’인 드라마에 과도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민다는 의견이 대립한다. 실제로 드라마를 보는 대부분의 시청자는 우영우를 보며 ‘힐링’을 받는다고 말한다. ‘우영우’라는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매력과 선한 모습에 위로를 받는 것이다.
같은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임에도 누군가에게 불편한 요소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불편하지 않다. 왜 그럴까? 그건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시스템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영우는 시스템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고, 이를 통해 타인을 돕는다. 우영우는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고 성장하는 캐릭터로 비치며,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라는 드라마를 일종의 ‘성공신화’로 보이도록 만든다.
하지만 많은 이들의 생각처럼, 우영우는 정말 장애를 ‘극복’했을까? 아쉽지만 그렇게 해석될 장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가 갑자기 어리숙하지 않게 똑바로 말하거나, ‘각성’이나 ‘변신’이나 ‘환골탈태’를 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고래와 김밥을 좋아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태어난 대로 살 뿐이다.
그렇다. 그는 언제나 ‘우영우’로 존재하고, ‘우영우로 존재하기 위해’ 노력한다. 우연히 다른 사람에 비해 뛰어난 기억력을 가졌고, 그 기억력이 기존 시스템에 자신의 자리를 마련하는 좋은 수단이 되었을 뿐, 그가 ‘장애가 없는 사람’처럼 되기 위해 노력했다는 묘사는 없다. 오히려 드라마 전반에서 그가 극복하고자 하는 건 ‘장애’가 아니라, 언제나 ‘차별과 편견이 만연한 현실’이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주제는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고 성장하는 성공 스토리’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받고자 분투하는 투쟁기’에 가깝다. 회전문 앞에서 우영우가 발걸음을 멈추는 장면이 이러한 주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대형 빌딩의 냉방과 보온에 유리한, 효율성과 기능성에 중점을 둔 입구에서 ‘장애’는 멈춘다.
드라마에서 장애인으로 묘사되는 우영우는 자신 앞에 놓인 문제를 극적인 노력으로 극복했을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해당 장면에서 부각되는 건 ‘이준호’라는 인물로 대표되는, 함께 발을 맞추며 문턱을 넘어서는 타인의 호의 그리고 대형 빌딩으로 들어갈 수 있는 ‘다른 입구’에 대한 필요성이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대다수 장애인은 시스템 안에 편입될 수 없다. 우영우처럼 자폐증을 앓고 있는 이들도, 휠체어를 탄 지체장애인도, 눈이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도 회전문을 혼자 넘어갈 수 없다. 그들이 최소한 자신의 위치를 확보할 수 있도록 사회 시스템을 보완·수정하자는 ‘다른 입구’에 대한 요구는, 효율성과 기능성이라는 문턱에서 멈춘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불편하지 않다. 드라마 속 인물 ‘우영우’도 불편하지 않다. 하지만 그로 인해 투영되는 자리에는 여전히 불편함이 남는다. 그곳에는 사회 시스템에 걸맞은 능력을 가진 장애인 ‘우영우’도, 함께 문을 넘어설 비장애인 ‘이준호’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논쟁해야 하는 대상은 드라마가 아니다. 옹호해야 하는 것도 드라마가 아니다. 정말로 이야기되고 바뀌어야 하는 건, 극복되어야 하는 건 드라마 밖의 ‘현실’이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통해 우리 사회가 지금껏 보지 못했던 이들을 만날 수 있다면, 그들과 보폭을 맞추고, ‘다른 입구’를 함께 요구할 수 있다면, 드라마는 단순한 ‘힐링’을 넘어 타인을 환대하고 포용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우리의 현실이 문턱 앞에서 멈추지 않도록 말이다.